사이트맵
즐겨찾기 추가
문화원 소개
광주의 역사
문화행사소식
광주학연구소
참여마당
문화강좌
자료실
원장 인사말
연혁
조직구성
문화원사업
회원가입안내
찾아오시는 길
광주시역사
문화유적지
역사적인물
광주의 민속
구전설화
지명유래
문화행사
문화앨범
연구소소개
소장인사말
연구소연혁
연구위원소개
자료실
공지사항
자유게시판
묻고답하기
정보공개
오프라인강좌
온라인강좌
동영상자료실
일반자료실
참여마당
공지사항
자유게시판
묻고답하기
정보공개
글쓴이
비밀글
이메일
비밀번호
글입력시 입력한 비밀번호
제 목
본래는 광주군 광주읍 중대리(中垈里)였다. 조선시대에는 중리(中里)와 대리(垈里)로 2개 행정리(行政里)였으나,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축소 개편하면서 두 마을을 합쳐 ‘중대리’(中垈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리(垈里)를 ‘텃골’이라고 부르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덕곡(德谷)이라고 기록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광주 안씨(廣州 安氏)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조선 초기에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을 역임한 조선조 최초의 청백리(淸白吏)인 사간공(思簡公) 안 성(安 省)이 입향(入鄕)하여 600여 년간 세거하여 오고 있다.
-------------------------
위 기사는 중대리(中垈里) 지명유래 첫부분입니다.
이중에 "조선 초기에~~~~600여년간 세거하여 오고 있다"라는 기사는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저의 직계선조 사간공 안성선조는 거주지가 고려때는 개성. 조선때는 한성이었고 [개성유후사 유후]직을 끝으로 경상도 안동 하회에서 사시다가 1421년 7월 16일에 卒하시니 그해 10월에 중대동 터골 지금 묘소로 返葬하여 묘소가 있습니다.
그 아들인 감찰공(사간공의 아들 從生)이하 후손들이 영장산 자락 터골에 장사를 하여 묘소가 있게되고 호성공신 광양군 滉의 묘소가 있게되니 그 종손이 살기 시작하였으므로 1610년경부터 터골에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내력은 광주안씨 족보에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순암공(安鼎福)의 아버지인 安極공의 여러 기록. 순암공의 여러기록에서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 조선조 선조때인 1610년경부터 광주안씨 호성공신 광양군 滉의 후손이 살기 시작한 세거지다"라고 기사 수정을 요청합니다.
한편, 광주안씨가 터골보다 오래전부터 살아온 세거지는 지금 하남시 감북동(전에는 광주)에 1450년대부터 살아온 내력이 족보. 하남시 역사기록에 있고 묘비문(금석문)에 증거합니다.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