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중(�養中)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 그는 고려가 멸망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事二君)의 충절을지킨 고려 말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으로 광주시 초월읍 신월리 두둘기 마을에 영면(永眠)하고 있는 고려 말의 충신이다.『동사찬요(東史簒要)』(1606년 간행, 吳澐 저) 열전(�傳)에 길재(吉再), 이양중, 서견(徐甄), 김주(�澍)를 고려 말에 절의(節義)를 지킨 사군자(四君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양중이 이처럼 고려 말 수절신(守節臣)으로 평가 받는 것은 그의 절조(節操)가 남달랐기 때문이다.고려 말의 정국은 극히 혼란스러웠다. 북에서는 홍건적(紅巾賊)이 창궐하여 고려를 침입하니 공민왕(恭愍王)이 도성인 개성을 버리고 안동(安東)으로 파천(播遷)하는일이 벌어졌고, 남으로는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과 약탈로 백성들은 노략질을 당하고, 조정은 그들을 토벌하기에 국력을 소모하여야 했다. 이양중(�養中)은 이러한 혼란기에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쓰러져가는 고려의 사직(社稷)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고려의 멸망을 막지는 못하였다.조선 태조 이성계(�成桂)의 5남인 이방원(�芳遠, 훗날의 태종)과 절친하였으며, 어려서 원천석(元天錫) 문하에서 동문수학(同門修學) 하면서 의형제를 맺은 사실로미루어 볼 때 이방원 보다는 나이가 위로 1350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방원이 문과에 급제한 것이 1382년(우왕 8)이니 아마도 이양중의 급제시기도 이 무렵일것으로 보인다. 이양중의 21대 종손인 이창희 광주문화원 부원장의 말에 의하면, 종택(宗�)이 있던 광주시 초월읍 신월리는 1950년 6∙25 전쟁 때 중부전선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포화(砲火)에 종택이 전소되고 족보와 선조들의 교지∙문집∙서책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한 권의 서책도 전해오는 것이 없어 안타깝지만 정확한 생몰년 시기는 확인 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