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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마을의 유래와 위치
이마을은 본래 조선시대(朝鮮時代)부터 초월면 신대동(新垈洞)이었다. 마을이 처음생길 때에 새로 터를 잡고 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터라는 뜻으로신대동(新垈洞)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197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초월면에서실촌면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곤지암리에서 곤지암천건너 좌측에 있는 마을로, 북으로는 초월읍 늑현리와 연해 있고, 동으로는 실촌읍열미리와 접하고 있다. 곤지암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어서 농용수가 풍부하여농업이 발달된 마을이다.
새터말
조선시대부터 신대동(新垈洞)이라고불리던 마을이다. 대석동에서 동북쪽으로 지방도를 따라 도로변에 형성되어 있는마을이다.
마을의 문화유적
신 립(申 砬)장군 묘
신대리산1번지에는 경기도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된 신 립 장군의 묘가 있다. 신립은 본관이평산(平山)이고 자(字)는 입지(立之)이다 조선 명종(明宗)22년(1567) 무과(武科)에급제하였고, 선조(宣祖)16년(1583)온성부사(溫城府使)로 있을 때, 야인(野人)들의침입을 여러 번 물리쳐 육진(六鎭)을 지켜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일어나자 팔도도순변사(八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충주(忠州) 탄금대에서 배수진을치고 왜군(倭軍)과 결전(決戰)을 벌였으나 참패를 당하고, 부장 김여물과 함께남한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군(封君) 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우암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한 비석이 있다.
신 준(申 埈) 묘
신립(申砬)의손자이며, 신경진(申景鎭)의 아들인 신 준(申 埈)의 묘가 있는데, 인조(仁祖)대의무관(武官)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정사공신(精社功臣)이 되었고,총융사(摠戎使)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그는 인조(仁祖)20년(1642)과 인조(仁祖)25년(1647), 두 차례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부임하였던 경력이 있다. 평흥군(平興君)에 봉해졌고,시호(諡號)는 충정(忠精)이다.
신 완(申 琓)의 묘와신도비
신준(申埈)의 손자이며, 숙종(肅宗)대에 문신(文臣)으로 서인(西人)의중심인물로 남인(南人)과 자주 대립하였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호(號)는 경암(絅庵)이며, 시호(諡號)는문장(文莊)이다. 저서(著書)로 경암집(絅庵集) 4권이 있고, 그는 박세채(朴世采)의문인으로 학문에도 뛰어났다. 묘소에 건립된 석물(石物)들은 문화재적(文化財的)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묘하(墓下)에는 박필주(朴弼周)가 찬(撰)한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조선백자 도요지
이 마을에서는16~17세기에 조선백자를 굽던 도요지가 22개소나 발굴되었다. 이곳 유적지에서는대접과 접시에 상감이나 인화장식이 있는 순백자와 철화백자가 주로 생산되었다. 이중에서 6개소는 문화재청에 의하여 사적(史蹟)으로지정되어있다.
절골
새터마을 동쪽으로 약 500m지점에 있는 신대리 산14번지 일대에 있는 옛 절터가 있었던 곳을 말한다.
작은골
새터마을북쪽에 있는 작은 논다랑이가 있는 골짜기를말한다.
하오개들
새터마을에서 초월읍 학동리로 가는 골짜기를 하오개들이라고 한다. 하오개란 '학현'(鶴峴)의 속어이다.
원수고개
학동리로넘어가는 고개를말 하는데, 이 고개에 옻물이 나오는 곳이있다.
시비내미골
예전에 산에서 땔나무를 해서 생활할 때, 늑현리사람들과 신대리 사람들이 서로 이 골짜기에서 땔나무를 하는데, 서로 시비가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거리들
곤지암리의 곤재마을과 대석동, 그리고 신대리의 3개 마을의 갈림길이어서 붙여진이름이다.
성죽바위
새터 마을에서 동쪽으로 400m 지점 산 아래에 있는큰 바위를 말한다.
진병골
새터마을 동쪽 끝에 있는 골짜기인데,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진을 쳤던 골짜기여서 붙여진이름이다.
앞들
새터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논들을말한다.
뒷방군이
성죽바위가 있는 골짜기 아래에 있는 밭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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