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개관 광지원리는 한양에서 충청도를 지나 경상도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로 남한산성으로의 진입이 가장 용이한 삼거리에 있는 마을이며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곳에는 예전 광진교를 지나 덕풍역을 거쳐 여주, 충청도 방면으로 가던 관리나 역마가 쉬던 곳으로 전해진다. 43번 국도변에 위치한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예로부터 남한산성의 관문지역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중부면사무소 소재지이며, 중부농협과 광지원초등학교를 두고 있다. 예전에 과거를 보러가던 어느 선비가 원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문 밖에서 불이 난 것 같아 문을 열어보니 달빛이 연못에 반사되어 불기둥이 이는 것처럼 보여 ‘연못에서 불이 난 것 같다.’라고 하면서 불이 연못에서 피어나는 원이라는 뜻의 광지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조선 초기로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 첫 입향 성씨는 은씨(殷氏) 성(姓)을 가진 사람으로 전해 온다.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숙종(肅宗)때에 진주 강씨(姜氏)가 입향 한 때부터이다. 이후 이씨(李氏), 정씨(鄭氏), 김씨(金氏), 손씨(孫氏), 오씨(吳氏), 민씨(閔氏)들이 차례로 입향하였다. 노적봉, 청룡봉을 비롯한 남한산성 불봉과 검단산으로 뻗어 내린 산맥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에서 발원하여 흘러 내려오는 번천(樊川)과 엄미리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오는 엄미천이 이 마을에서 번천과 합수하여 팔당호로 유입되고 있다.
(2) 제의절차
① 동화의 제작과 형태
광지원리에서는 동화를 ‘해’라고 부르며, 청룡교 옆 공터에 하나를 세운다. 하지만 과거 광지원리에서는 안말, 바깥말, 섬말에 각각 하나의 해를 세웠었다. 그러나 마을 인구가 점차 줄고 따로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이를 지금의 섬말로 통합하는 대신 규모를 크게 하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제보자 강병학 (남, 50세,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광지원리 103-7번지, 이장), 2009년 2월 1일 조사. 올해는 약 4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해를 세우는데 동참하였다. 과거에는 정월대보름날 오전에 해를 세웠으나, 최근에는 마을에 인구가 줄어 한 주 전 주말을 이용해 세운다. 미리 세워둔 해에 문제가 있을 경우 그 다음 주말에 손을 본다. 제보자 강병학 과거에는 집집마다 나무를 한 짐(석 단)씩 해 와 모인 나무들로 해를 제작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설날 이후부터 마을 노인들이 근처 야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타기 좋게 말려 둔다. 해를 만드는데 가장 좋은 나무는 싸리나무인데 가벼워 세우기 좋고 잘 부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싸리나무가 많지 않아 진달래나무, 철쭉나무 등도 사용한다. 제보자 조남섭(남, ○○세,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광지원리, 전 청년회장, 동화제작 총괄), 2009년 2월 1일 조사.
해를 세울 자리에 간격을 맞춰 와이어, 새끼줄, 동아줄을 번갈아 놓는다. 이 때 와이어는 제작 중 해를 고정하는 역할을 하고, 동아줄은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놓아 둔 줄을 통해 해의 규모를 미리 가늠하기도 한다. 줄의 가로, 세로 길이를 통해 예년과 비슷한 규모의 해를 제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미리 모아둔 나무를 단으로 묶어 둔다. 해의 제작을 위한 기초 작업이 모두 끝나면 미리 놓아둔 줄 위로 나뭇단을 맞물리게 차곡차곡 쌓는다. 해의 아래 부분에서 윗부분으로 갈수록 나뭇단을 줄여 폭을 좁혀간다. 이렇게 지그재그로 총 4층의 나뭇단을 쌓는데, 여기에 대략 320단의 나무가 들어간다. 나뭇단을 다 쌓으면, 포클레인이 양 옆에서 나뭇단을 눌러 모양을 잡는다. 포클레인은 4년 전부터 사용했으며, 그 이전에는 모두 인력으로 해를 세웠다. 나뭇단의 모양이 잡히면 미리 나뭇단 아래 깔아 놓은 와이어를 양 옆에 위치한 포클레인들이 어긋나게 걸고 나뭇단을 조여 준다. 그런 상태에서 나뭇단 위에서 대기하던 두 사람이 새끼줄을 묶고, 동아줄을 묶어 나뭇단을 고정하면 와이어를 푼다. 이런 식으로 해를 아래부터 위까지 총 21개의 동아줄로 묶는다. 이 때 해를 21개의 동아줄로 묶는 이유는 제의가 시작될 당시 살았던 은씨 삼형제가 각각 7개로 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가 21개의 동아줄로 모두 묶이면 해의 중심에 통나무를 넣어 새끼줄로 고정시킨 후 거기에 와이어를 걸어 포클레인으로 해를 세운다. 동시에 마을 사람들도 해가 잘 세워지도록 통나무로 해를 지지한다. 이렇게 세워진 해는 쓰러지지 않도록 버팀목을 받치고 긴 밧줄을 엮어 인근의 고정 물에 묶어둔다. 이렇게 완성된 해의 높이는 약 13~15m정도이며 둘레는 7발이 된다. 한편, 각 가정에서는 ‘달님대’라고 불리는 홰를 제작한다. 이 홰는 15세 이하의 어린이가 달맞이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쑥대를 빗자루 모양으로 만들어 칡으로 나이만큼 묶었다가 해 앞에서 제사를 끝내고 나면 불을 붙이고, 이것이 타는 동안 “달님, 달님~”하면서 소원을 빈다. 그리고 홰가 다 타고 나면 그 홰를 바닥에 내려놓고 나이만큼 뛰어넘는데, 소원이 이루어지고 병에 걸리지 않으며 건강하게 자란다고 믿기 때문이다.
② 제의과정
이 마을에서 해동화놀이를 시작하게 된 유래는 약50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선조(宣祖) 37년(1604)에 이 마을에 돌림병이 돌기 시작하더니, 농사도 흉년이 들고, 온 마을에 근심이 가득하였다. 그러던 중 마을에 살고 있는 은씨 성을 가진 삼형제의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서 현몽(現夢)하기를, 집집마다 나무를 한 짐씩 내고 그것을 모아 섶을 만들어 정월대보름날 달이 뜰 때 불을 붙이고 정성으로 음식을 장만해 제를 올리면 모든 재앙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정월 대보름에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돌림병도 사라지고, 농사도 풍년이 들어 마을이 편안하게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시행하고 있다. 제주는 마을에서 덕망이 높고 신체 건강한 어른으로 초상이 없었고, 출산도 없었던 집에서 선발한다. 하지만 대상자가 여럿일 경우에는 육갑을 따져 정한다. 집사 또한 신체 건강한 자로서 모든 일에 앞장서서 열심히 하는 사람을 선발한다. ‘해’에 불을 붙이는 이는 신체건강하고 양친부모를 모두 모시고 있으며 전년도에 결혼을 하였거나 득남한 사람을 우선으로 선발한다. 20여 년 전엔 점화자가 직접 해의 꼭대기에 올라가 점화를 했으나, 2007년부터는 안전상의 이유로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 불을 붙인다. 제의 비용은 마을 기금과 광주시 지원금으로 충당한다. 하지만, 매년 많은 관광객이 마을을 찾아 음식과 술을 대접하기 위해 부득이 2005년부터는 식권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제물은 제의 하루 전에 이장과 부녀회장이 근처 시장에서 재료를 구입하고, 마을 부녀자들이 공동으로 제물을 마련한다. 포, 소고기 적, 두부, 돼지머리, 시루떡, 조기, 밤, 배, 바나나, 약과, 산자, 옥춘, 단감, 수박, 사과, 대추, 전, 동태전, 탕, 무나물, 막걸리를 올린다. 제주로 쓰이는 막걸리는 과거에는 마을에서 직접 빚었지만 최근에는 광주 막걸리를 구입하여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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