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현동 장승제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6 조회 : 495

 마을개관
목현동은 원래 조선조 말기까지는 조현리(鳥峴里)ㆍ목감동(木甘洞) 두 마을이었으나, 1914년 일제(日帝) 강점기에 행정구역 축소 개편으로 목감(木甘)의 '목'(木)과 조현(鳥峴)의 '현'(峴)을 따서 '목현'(木峴)으로 마을 이름을 지었다.
이 마을은 행정동(行政洞)으로는 송정동(松亭洞) 구역에 속하여 있다. 광주시청에서 서북방향으로 지방도를 따라 성남시 상대원동(上大院洞) 방면으로 가다 보면, 먼저 조현(鳥峴 새오개)이라고 하는 마을이 나오고, 그 다음 목감(木甘 모개미) 마을에 닿는데, 바로 이배재고개(조선시대 지도에는 이현(梨峴) 또는 이보치(利保峙)라고 표기하였음)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배재고개를 넘어가면 성남시 상대원동이다. 북으로는 남한산성(南漢山城)과 이어져 있고, 동남쪽으로 광주시 회덕동(回德洞)과 접해 있다. 목감(모개미)마을 앞은 광주시 삼동(三洞)인데, 이 마을 바로 앞에 뉴서울 골프장이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중기 즉 인조(仁祖)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여 남한산성에서 인조(仁祖)가 패망하면서 산성(山城)의 성벽(城壁)을 더욱 튼튼히 개축하였다. 수도 서울 방어에 요충지로서, 해마다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경기도 일대의 병사들을 모아 수어청(守禦廳)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그 때마다 이배재(利保峙)고개를 제일 방어선으로 삼았고, 척후병(斥候兵)과 복병(伏兵)을 두어 남한산성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이곳에서 제일 먼저 격파하는 훈련을 하였다. 木甘(모개미) 마을에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모감원(暮甘院)이 있었고, 그 후에는 조선조(朝鮮朝) 말까지 나라에서 경영하는 주점(酒店)이 있었다. 鳥峴(새오개)에도 주점(酒店)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주점이라는 것은 주막(酒幕)과 달라서 조선시대에 관리들이 지방 출장 중에 숙식(宿食)을 제공 받는 일종의 관영(官營) 숙박시설(宿泊施設)이었다.
이 마을은 3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즉 목감(모개미)과 조현(새오개) 그리고 용생골(龍生谷)이다. 이 마을은 워낙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농경지는 별로 없고 산을 의지하여 살아오던 마을이었다. 남한산(南漢山)의 줄기가 이 마을로 뻗어내려 가파른 산세(山勢)여서 산성의 보장지(保障地)이며 군사적 요충지(要衝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성남시로 넘어가는 도로가 2차선 잘 포장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마을 길옆으로 식당가가 형성되어 있고, 전답(田畓)에는 중소 공장과 주택들이 거의 들어차 있다.
  
(2) 제의절차

① 장승의 제작과 형태

목현1통 장승은 마을 입구 도로를 기준으로 마주보고 서있다. 천하대장군 뒤로는 장승정이 위치하고 있고, 지하여장군 옆으로는 광주시에서 제작해서 세운 큰 장승이 세워져 있다. 지하여장군은 지금보다 뒤쪽에 위치했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장승은 제의 전날 산에서 베 온 오리나무로 만든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는 마을사람 5~6명이 참여하며, 나무를 자르기 전에 북어와 막걸리를 놓고 간단한 고사를 지낸다.
장승제작은 제의 당일 오전 7시에 시작해서 12시 경에 끝난다. 이때에는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한다. 장승의 얼굴 부분에는 흰색과 빨강색 라커로 색을 입히는데, 이것을 ‘장승 분장한다.’고 한다. 글씨는 먹으로 쓴다. 2002년 까지는 성남과 이천의 거리를 장승에 표기했으나 현재는 하고 있지 않다. 장승 제작이 끝나면 바로 장승을 세운다. 예전에는 목수를 불러서 장승을 제작하기도 한다

 

② 제의과정

목현1통 장승제는 짝수 년 단오에 행해진다. 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택일을 하는 과정은 없다. 제관 선정도 하지 않고 마을 임원들과 마을주민들이 제사를 진행한다.
제물은 제의 하루 이틀 전에 부녀회 회원들이 시내 농협에서 구입 한다. 제물은 팥시루떡, 돼지머리, 북어, 밤, 대추, 막걸리와 계절과일이 올라간다. 2008년에는 수박, 참외, 배가 올라갔다.
장승제작을 마치고 장승이 세워지면 제의가 시작된다. 제물을 진설하고 이장→새마을지도자→부녀회장→마을주민 순으로 절을 올린다. 마을 사람들이 절을 올리는 동안에 스님이 독경을 한다. 천운사 명공스님이 독경을 해 왔으나, 2008년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불광사 스님이 독경을 하였다. 모든 제사가 끝나면 오후 2시정도 된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쌀을 걷어 제비를 충당했으나, 요즘에는 돈을 걷는다. 이후 모자라는 경비는 마을 기금에서 충당한다. 
 결산은 제사가 끝나면 바로 하고 남은 음식은 마을 주민들이 나누어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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