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미리 장승제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6 조회 : 527

마을개관
이 마을은 본래 대한제국 시절까지는 엄현(奄峴)과 미라동(尾羅洞)이 각각 다른 동리였으나,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축소 개편하면서 엄현의 '엄'(奄)과 미라의 '미'(尾)를 따서 '엄미리'(奄尾里)라고 마을이름을 짓고 1개리로 만들었다.
중부면사무소에서 43번 국도를 따라 하남시 방면으로 약 1.5km 지점에 마을 어귀가 나오며, 엄현을 속칭 '은고개'라고도 하는데, 은고개 마루턱에서 서쪽을 향하여 들어가면, 미라동(속칭 미라울)과 벽수골, 그리고 새말이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마을은 남한산성의 동쪽 밖에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이 마을은 미라울ㆍ벽수골ㆍ은고개ㆍ새말ㆍ안말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이 마을의 인구는 60여 호로 현재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토박이는 40여 호이다. 전주 이씨, 광주 이씨, 곡부 공씨, 안동 김씨, 문화 유씨 등이 살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농업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점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2) 제의절차

① 장승의 제작과 형태

엄미리에는 총 4군데에 장승이 세워져 있다. 먼저 은고개 초입해서 200m 가량 들어 온 새말 잣나무집이라는 식당을 기준으로 서쪽에 천하대장군, 동쪽에 지하여장군이 서있다. 그리고 새말에서 다시 200m 정도 올라가 미라울 령산계곡이란 식당의 동쪽으로 천하대장군, 서쪽으로 지하여장군이 서있다.

장승의 재료가 되는 오리나무는 제의 며칠 전에 마을 사람들이 같이 산에 올라 정한다. 장승에 적합한 나무는 한 아름쯤 되는 굵기에 한 나무에서 4개의 장승이 나올 수 있을 법한 키를 가진 나무이다.
올해 장승제작에 사용된 나무는 벌봉에서 제의 하루 전날 베어 마을 사람들이 트럭으로 실어 운반하였다. 오리나무를 자르기 전에는 나무 앞에 막걸리를 부어 놓고 절을 함으로써 간단한 고사를 지낸다.
제의 당일 오전부터 약 2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장승과 솟대를 깎는다. 장승을 깎기 위한 도구로는 전기톱, 끌, 정, 톱, 도끼, 낫 등이 사용된다.
베 온 나무를 4등분 하여 2, 3명이 각각 장승 하나씩을 담당한다. 이 때 나무 밑동부터 미라울 대장군, 여장군, 새말 대장군, 여장군이 된다. 먼저, 낫을 이용해 나무껍질을 벗기고, 사모와 입이 될 부분을 톱과 도끼를 이용하여 잘라낸다. 어느 정도 형체가 완성되면 대패 등을 이용해서 나무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눈 부분을 매직을 이용해서 스케치 한 후 끌과 정을 이용하여 타원형으로 둘레를 파낸다. 이 때 장승 눈은 무섭게 만든다. 드릴을 이용해서 콧구멍과 수염 부분에 5개의 구멍을 뚫는다. 눈을 매직으로 또렷하게 그린 후 동네 앞산에서 퍼 온 황토 흙을 개어 장승 얼굴에 바른다. 그런 다음 사모 바로 아래 부분에 구멍을 뚫고 사모 대를 끼운다. 그리고 사모와 사모대 부분에 먹과 매직으로 격자무늬를 그려 넣고, 글자를 넣을 부분에 손종규 중부면 조합장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는 글귀를 각각 먹과 붓을 이용해서 써 넣는다. 대장군의 아래 부분에는 서울 70리, 수원 70리, 이천 70리라는 거리도 적어 넣는다. 장승 글귀는 과거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담당하였지만 최근에는 한자를 잘 아는 분이 없어 필체가 좋은 중부면 조합장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그 다음 미리 베어 온 지매털풀을 수염자리에 꽂아 수염을 완성하는 것으로써 장승 제작이 끝난다.

 

한편 솟대는 전나무로 만드는데, 전나무가 곧게 뻗기 때문이다. 곧게 뻗은 전나무를 약 2m 정도 되게 잘라 대를 만들고, Y자로 갈라진 나무 가지를 이용해서 기러기를 만든다. 기러기를 만들 큰 Y자 나무 가지와 작은 V자 나무 가지를 낫으로 다듬는다. 그리고 큰 Y자 나무 가지의 갈라지는 부분에 작은 V자 가지를 꽂아 기러기의 목과 부리를 만들어 둘을 합쳐 기러기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러기는 전나무 대에 꽂아 솟대가 된다. 솟대는 총 4개를 만든다.

 

② 제의과정

엄미2리 장승제는 병자호란 당시 호군들이 남한산을 포위하고 있으면서 점령지 주민을 괴롭히고 전란이 끝난 직후부터 전염병이 창궐하여 부락의 안녕과 전염병 침투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마을 사람들이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워 수호토록 한데서 유래한다.
날은 음력 2월 초 닷새 안으로 잡아야 좋다고 생각한다. 마을에서 제일은 공재범씨가 좋은 날을 가려잡는다. 올해는 3월 2일이 가장 길한 날이지만, 젊은 사람들의 참여를 위해 일요일인 3월 1일이 제일로 정해졌다.

 과거에는 제관이 엄격한 금기를 지켰으나, 산제의 전승이 단절된 이후로는 특별한 금기를 지키지 않는다. 
 제관은 옥색 도포를 입는다. 
과거에는 제의 날짜가 정해지면 반장이 각 집에서 쌀을 한 되씩 걷어다 화주 집에 가져다주어 떡을 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마을 기금으로 제의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충당한다.
제물 준비에 사용되는 재료는 이장과 부녀회장이 장을 보고, 이장 부인이 제물을 마련한다. 이 마을에서는 백설기, 밤, 대추, 곶감, 두부, 막걸리를 제물로 사용한다. 새말과 미라울에서는 각각의 제물로 제의를 올린다.
이 마을에서는 네 곳에 장승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총 네 번의 장승제를 실시한다. 미리 깎아 둔 장승을 경운기에 싣고 각각의 장소에 세운 다음 곧바로 제의가 이루어진다. 제의 순서는 미라울 대장군→미라울 여장군→새말 대장군→새말 여장군의 순이다.
제물을 진설한 후 제관이 잔을 올리고 삼배한다. 집사가 장승 밑동에 술을 부으면 제관이 다시 삼배한다. 이후 마을 사람들과 면장, 중부면 조합장 등이 절을 올린다. 장승제 축문은 없다. 제의를 모두 마치면 통북어를 새로 세운 솟대에 창호지를 이용하여 묶어 단다. 제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음복한 후 철상한다.
 

③ 산신제

엄미2리에서는 본래 장승제와 함께 산신제를 지냈다. 하지만 현재는 산신제는 전승되지 않고 장승제만 전승되고 있는데, 과거 산신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월 초하루에 택일을 하는데 부정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보통 2일, 3일을 넘기지 않으며 이때 마을에 해산이나 초상이 나면 연기된다. 산부정은 3일, 죽은 부정은 7일 이상이 지나야 산신제를 지낼 수 있어 보름 경에 한 적도 있다고 한다. 택일을 할 때는 생기복덕을 가려 당주와 화주를 각각 1명씩 뽑는다. 역시 부정이 드는 것을 최대로 막기 위해 가능한 식구가 단출한 집의 가장을 뽑는다.
날짜가 확정되면 기독교인을 빼고 추렴을 하여 제삿날 새벽 화주가 장을 보아온다. 혹시 부정탈까봐 당주는 산신제 때까지 집밖을 못나오게 하므로 산신제 지낼 제물은 당주집으로 보내고 화주집은 장승제 지낼 제물과 장승, 기러기(솟대) 등을 만드는 동네사람들의 점심을 준비한다.
당은 특별한 표시가 없는 산 정상의 평평한 지역으로 미리 천막을 쳐놓았고 앞에는 큰불을 놓아 추위도 막고 온 마을에 산제사 지내는 시간을 알리기도 했다. 이불을 보고 각 집에서는 맞음 시루를 쪄서 개인적으로 정성을 들인다.
산제사에 참가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로 당주, 화주, 축관 그리고 집사 일을 볼 화주의 아들뿐이다. 당주의 부인이 제물과 제주를 운반해오면, 제주는 택일 후 담근 막걸리를 제사 직전에 걸러 주전자에 담는다.
천막 안에 산 정상을 향해 병풍을 치고 오른쪽에 시루, 상위에는 촛대 2, 메구 그릇, 튀각, 대구포, 육포, 무나물, 북어, 팔각두부, 탕국 그릇(어탕, 육탕, 소탕), 대추, 곶감, 밤, 식혜, 술잔 3개 등을 놓는다. 메에 숟가락을 꼽고 떡시루의 뚜껑을 벗긴 후 제사를 지낸다. 먼저 당주만 분향재배하고 헌작한 후 축관이 축을 읽는다. 축이 끝난 후 모든 제관들이 함께 재배한다. 산신제가 매우 엄숙하게 진행된다. 때문에 참석자 전원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이어서 마을주민들을 위한 소지를 올린다. 처음에는 부정소지를 올리고, 이어 산소지를 올린다. 내용은 극히 간략한데 예로 부정소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정소지올시다. 오늘 그저 임술년 초이튿날 산제사를 지내는데 진부정 마른부정 그저 다 젖혀주시고 산할아버지 산할머니 많이 흠향하시고 이 동네를 무사태평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당주와 당주부인, 화주와 화주부인을 위한 소지를 올린 후 산제사 비용을 낸 각 집의 명단을 놓고 개인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산신제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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