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재상 구치관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6 조회 : 704
구치관(具治寬, 1406~1470)의 본관은 능성(�城). 자는 이율(而�)∙경율(景�). 시호는 충렬(忠烈)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조부 구성로(具成老)는 조선왕조 개국원종
공신으로 개성부윤과 강원도 도원수를 지냈으며, 할머니는 정경부인에 추증된 김해송씨(�海宋氏)로 고려조에서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송천봉(宋
天逢)의 따님이다. 아버지는 목사를 지낸 구양(具揚)으로,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助功臣) 의정부 영의정 능원부원군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정경부인에 추증
된 해평윤씨(海平尹氏)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윤사영(尹思永)의 따님이다. 곤지암읍 열미리 문중 묘역에는 구양을 비롯해 충의위(忠義衛) 구이연, 효자정문을 하사받
은 구척,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 구장손, 진사 구경∙구원지를 비롯한 크고 작은 벼슬을 한 인물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구치관의 형제로 중추부 동지사를 역임하고
호양(胡襄)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이 구치홍(具致洪)이며, 조선조 역사에 큰 획을 그은구사맹∙구굉∙구인후∙구인기 등이 그의 후손이다.
현대에 이르러 능성구씨 문중에서 호양공 후손의 유명한 인물로는 우리나라 경제계의 큰 동맥인 LG 그룹이 있다. LG 그룹의 연암 구자경 명예 회장은 가문의 명예를
신조처럼 지키며 기업 정신을 대대로 승계하는 대한민국 4대 재벌로 성장시켰다. 또한 현대 미술계 최초의 표현파 천재 화가로 불리는 구본웅(1906~1953)도 구치관의 후
손이다.
청백리 재상 구치관은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정치∙행정가이자 군사∙국방 문제 전문가로 문화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재상으로 광주가 낳은 위대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공의 탄신 600주년을 맞이하여 충렬공 기념사업회에서는 2006년 11월 광주문화원에서 충렬공에 대한 학술대
회를 개최하였다. 또한『청백리재상 충렬공 구치관전기』를 후손인 한학자 구자청이 펴낸 바 있다.

<업적과 시호>
구치관의 업적을 살펴보면 크게 몇 갈래로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나라의 녹봉만 축내는 쓸모없는 관료를 가려내어 파직시키
는 인사 행정의 개혁을 이뤄냈다. 관할 부서의 관사를 합할 것은 합하고 없앨 것은 혁파하는 의견을 올려 임금의 재가를 받고 시행한 것이다. 현실에 맞는 제도 혁신을 통
하여 관료의 실질적인 근무 상태를 평가하고 이에 맞는 제도를 수립하는 정책을 세웠다. 종친과 양반의 후손들이 특별히 임용되는 것을 폐지하도록 했으며 맡은 일에 책
임을 다하지 못하는 자는 하급직으로 강등시켰다.
이조 판서는 조정의 인사권을 쥔 최고의 자리였다. 관례대로 판서와 참판이 인사권을 전행해도 무방한 시대였지만 구치관은 이조에 소속된 모든 관리는 물론 임명할
부서의 여론까지 듣고서야 말단직이라도 임명하는 신중한 인사권을 행했다. 모든 관료들이 더 높은 고위직을 바라고 아부와 뇌물로 이조의 문턱을 드나들수록 그는 더
냉정하고 공정하게 인사를 진행해 그가 이조 판서로 재직하는 동안은 인사에 관한 상소나 구설수가 전혀 없었고 정부를 신임하게 되었다.
연이은 가뭄에 백성들의 기근이 심해지자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또한 군량에 해당되는 곡식을 심는 둔전(屯田)을 해당 관리가 바뀔 때면 사사로이 나눠주고 백성의 토
지를 강제로 빼앗던 폐단을 바로잡아 다시 환원하도록 했다. 당시는 직전(職田)과 과전(科田) 제도를 두고 벼슬하는 관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직전은 현직 관료
에게만 해당하는 반면, 과전은 퇴직자는 물론 사후에 후손에게 세습되는 등의 많은 문제점이 야기되어 공은 세조와 상의하여 직전제로 바꾸도록 제도를 마련했다.
조선은 학문과 법령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문치(文治) 위주의 국가였다. 끊임없이 외세에 시달리게 된 까닭도 전란에 대비한 무(武)에 능한 훌륭한 영웅이 부재했던 원
인도 있다. 즉 문(文)을 숭상하는 만큼 학문에 뛰어난 인재를 선호했고, 결국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켜내는 무인(武人) 영웅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국왕 중 세조는 문무의 균형을 갖춰 국방을 튼튼히 하고 무인도 조정에 고루 중용해 행정적으로도 통달한 신하를 둔 임금이었다. 그 중 대표적으로 문무를 겸비한 구치관
은 정승의 반열에 오른 후에도 평안도 도절제사, 함길도 도체찰사, 총리사, 진서대장군 등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북쪽 국경 문제의 전문가이자 장수로서 큰 활약을 하며
공을 세웠다.
구치관은 문화 분야에서도 큰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을 놓은 재상이다. 그는 세조 당시 조선 왕조의 법을 집대성한『경국대전(經國大典)』편찬에 신숙주∙한명회 등과
참여하여 초본을 완성하였다. 이에 교정청을 두어 교정관으로 임명된 후 면밀한 교정 후에 초간본을 발행하였다. 또한 당나라 시성 두보의 칠언율시『우주두율(虞主杜�)
』집을 영의정 시절 청주 목사에게 부탁하여 발간했다. 이 책은 현재 희귀본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문헌 정보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세조가 왕실에서 발간하는 전집과 불경의 간행을 보급하고자 설치한 간경도감(刊經都監)의 책임자가 되어 많은 도서를 보급하며 관장하는 일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
을 정도로 구치관은 다방면에 박식한 관료였다. 그는 경상∙전라∙충청도 부사로 있을 때 울산 유포에 설치된 성곽이 목책으로만 되어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석재로
다시 쌓도록 했다. 이렇게 축성된 것이 울산시 기념물로 지정된‘유포석보’이다. 또한 웅천읍성의 협소함을 건의해 새롭게 조성하였다. 이것이 경상남도 기념물 웅천읍
성이다.
한편, 세조는 자신이 죽고 나면 어린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아 제대로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금은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원로 정승인 구치관∙한명회∙신숙주를 원상(院相)으로 지목하였다. 원상은 항시 승정원에 출근하여 국정상의 모든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 하도록 하는
것으로 현직 의정부 대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무를 보도록 함으로써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이윽고 모든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세자(훗날의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튿날 세조가 승하하니 운명을 장악하여 역사를 바꾼 위인도 하늘의 부름은 거역할 수가 없는 사필귀정이었다. 1469년(예종 1) 예종은 즉위 1
년 만에 승하하였다. 이어 성종이 즉위하여 경연을 열어 구치관을 영경연사 겸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성종은 오래된 대신을 매우 공경하고 중하게 여겼다.
1470년(성종 1) 9월 구치관은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5세였다. 공의 별세가 보고되자 성종은 3일간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시장(市場)을 열지 않도록 하였
으며, 태상시(太常侍)에 명하여 충렬(忠烈)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임금이 생전의공을 기리어 어진 신하에게 내리는 시호에서 청렴하고 방정하고 공평하고 정직한 것
이‘충(忠)’이고, 공훈이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것이‘렬(烈)’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공은 별세한 지 3개월만인 11월에 곤지암읍 열미리 부모의 묘하에 안장되었
다. 신도비명은 조선 전기의 최고 문장가인 서거정이 지었으며, 비문의 글씨는 당시의 명필인 박효원이 썼다. 공이 운명한지 1년 후에 나라에서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으로 책록함으로써 그 영화로움이 사후에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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