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큰별 해공 신익희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6 조회 : 1166
해공 신익희는 1894년 7월 11일 해시(亥時),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67번지, 사마루 마을 평산 신씨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평산 신씨 가문은 광주 일대에서 서향
세가(書香世家)라는 영예로운 별칭으로 불리는 명문가였다. 문벌이 화려한 집안은 아니나 대대로 관직과 문한(文翰)을 계승하여 내려온 선비 가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4~1956)는 광주가 낳은 위대한 지도자로 너른고을‘廣州(광주)’의 희망이며 자랑이고, 대한민국의 영원한 상징이며 우상이다. 그의 일생(一
生) 일대(一代)는 한국의 항일운동사요, 민족해방사이며, 건국운동사라고 할 수 있다. 신익희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기억되는 이유는 불의와 타협하
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자신의 신념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 받는 민중들과 호흡하고 개인적인 편안함 대신 조국과 민족
을 가슴깊이 새기는 일생을 살았다.
신익희는 열두 살 되던 봄에 당시 광주군청 소재지였던 남한산성의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면서 극난과 자존의 성지인 남한산(南漢山)의 특별한 기(氣)를 받으며
자랐다. 15세에 신학문을 배우면서 더 넓은 세계에서 청운의 뜻을 키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 그 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서 수학했다.1910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참판의 딸 이명희와 결혼한 뒤 딸 신정완(申貞婉)과 아들 신하균(申河均)을 낳았다. 1911년 9월,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배워야겠다는 신념에서 신혼의 단꿈을 떨치고 일본 동경유학을 결행해 다른 대학보다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특권의식이나 우월의식이 적은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여 총무∙평의회장(評議會長) 등 임원을 맡았으며, 기관지『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고 학생운동을 하며 견문을 넓혀갔다. 1917년 귀국 후에는 서울 중동학교와 보성전문대학에서 비교헌법, 국제공법 등을 가르치며 명 강의로 인기를 끌었다.

초기의독립운동(1919~1932)
1918년 11월말 신익희는 여러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그가 중국행을 결정한 것은 해외 단체와 동포들에게 국내에서의 독립선언 움직임을 알
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리의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작하더라도 결국에는 군사행동으로 결말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만주지역의 민족 운동가들을 만나본 다음 상해로 이동하였다. 한 달 반 정도 지난 후천린, 북경, 심양을 거쳐 환국하였다. 이듬해 3월 2일 해공은 일본 경찰의 검문을 면
하기 위해 상주(喪主)복장을 하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월 5일 서울역에서 시작된 제2차 만세시위에 깊이 가담했다. 이어 3월 14일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다시
중국 망명길에 올랐으며, 3월 19일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이때부터 오랜 해외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신익희는 상해에서 신규식, 한진교, 민충식, 박은식, 여운형, 조동호 등 먼저 도착한 선후배 독립지사들과 임시정부라는 독립운동의 통합적인 기구조직을 위해 의견을
모았다. 그러던 중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김도연, 백관수, 최근우, 이광수, 김마리아등 한국인 남녀 유학생들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이광수가
초안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는 신문을 보고 감격하였다. 이광수 등은 신익희와 막역한 동지이자 교우였다.
중기의독립운동(1932~1940)
11월 28일 제24회 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신익희는 이동녕, 김구와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출된다. 임시정부는 그 동안 상해 거주 단체의 도산(조직 의견 분열) 등으로 빚
어진 침체와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1932년에 결행한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직탄의거(直彈義擧)의 결과로 1932년부터 임시정부의 거처를 옮겨 다녀야 했다. 이런 와중
에서도 신익희는 중국 내 유수한 항일 독립운동단체와 함께 끈질긴 조국애로 항일 투쟁대열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
1938년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꾸이린 등지에서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중국 군대와 연계하여 공동 전선을 형성하며 독립 투
쟁을 하였다. 이동시기의 임시정부는 각 지역을 전전하는 힘겨운 시기를 겪었으나 치창에 이르러 그 독립 의지와 민족 대동단결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확고하게
추진해나갔다. 비록 임시정부의 터줏대감 이동녕(�東寧)이 서거하는 슬픔을 겪었으나 충칭(重京)에서의 공세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의 기틀이 되었다고 본다.
1940년 3월 13일 원로 독립투쟁가 이동녕을 국장으로 떠나보내고 1940년 9월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임시 수도로 체류하고 있던 충칭으로 들어갔다. 장개석 총통의 주
선으로 충칭시내 토쿄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였다. 정착과 안정을 찾게 된 임시정부는 1944년 6월 11일 한인교포의 보건생계사업비 식량 등을 지원하기 위해 한인생활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국내외 전시 체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40년 5월 충칭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한국광복군의 설립을 추진, 군대를 통한 자주
적인 조국 광복을 꾀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을 국제적으로 획득하기 위하여 보다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일∙대독 선전포고를 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선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3년 3월 1일에는 제24회 3∙1혁명기념식을 가지는 등 세계 각국에 결사 독립의지를 보이면서 5월 9일에는 중국 정부와
전쟁 후의 한국 독립문제에 대한 간담회를 갖는 등 독립운동의 전개가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신익희는 1944년 4월의 제36회 의정원에서 가결된 헌법 개정에 따라 5월 8일자로 국무위원 내무부장에 선임되면서 위상이 확고해진다. 이에 따라 충칭시기 5년중말
기에 가서 그는 내무업무를 주로 하며 우리 동포와 임시정부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에 더욱 열성을 기울일 수 있었다. 또한 공산당의 교란 책동을 억제하고 통일된 자주적
민주공화정부를 건설하려고 신명을 바쳤다. 한마디로 광복을 전후하여 운명하기까지 개인 소유의 거처도 마땅치 않아 풍찬노숙하며 오로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다가
환국한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순수한 나라 사랑의 집념을 보여주었으며, 민주공화제의 기초를 닦은 큰 동량으로서 온 국민의 기대와 선망과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해방의 감격과 해공의 환국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8월 초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파죽지세로 몰아붙였다. 마침내 일본의 침탈야욕에 종지부를 찍는 원폭(原爆)의 굉음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터지자마자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포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1945년 8월 15일이었다.
신익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긴 객지의 망명생활은 끝났다. 자, 이제 우리 중국옷을 벗고 한시바삐 서둘러 우리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자. 이제부터는 우리 손으로
가장 좋은 나라를 만들어 나가야하는 큰 문제가 시작되었구나.”하고 동지들을 붙잡고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3개월 여 지난 1945년 12월 1일 초저녁, 신
익희는 충칭(중경) 임시정부 요원 2진을 인솔하고 군산 옥구공항에 도착했다. 트랩을내려와 26년 만에 조국의 품에 안기는 극적인 순간에 복받치는 설움을 달랠 길이 없
어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해공은 비행장 활주로의 흙을 한 움큼 덥석 집어 입을 맞추었다. 함께 트랩을 내린 동지들도 땅에 엎드려 입 맞추며 소리 내어 울었다.
한편, 신익희가 고국에 돌아왔을 무렵 국내의 정세는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비록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나 광복의 날을 맞이했으나 또 다른 시련이 앞
에 가로놓여있었다. 민족해방의 감격 속에서 국토는 양단되고 사상은 좌우로 분열되었다. 부단한 개혁 의지의 노력을 해온 신익희는 현실을 감안하여 우선 남한만의 단
독정부라도 세워 혼란을 막고 민주화와 자유화에 신명을 바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에 취임하고 자주독립 수립은 반공 반탁으로 건국되
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신익희는 신생 대한민국을 세워 나감에 있어 교육사업과 언론기관의 필요성을 느끼며 우선 신생 조국의 건설과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많은 동량(棟樑)의 필요성을 절
감하고 1946년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언론의 기능이 정치적 활동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좌경화하는 자유신문사를 인수, 자
유민주국민으로서의 자질 향상, 계몽에 앞장섰다.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제1공화국이 탄생된다. 이승만을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으로, 신익희를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으로, 김병로를 대법원장으로 하는 제1공화국
이 수립된 것이다. 세계 만천하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어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에서는 46대 6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정식 승인하였다.
해방과 정부수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자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948년 9월 9일, 북한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
다. 이때만 해도 남북 각각의 정부 수립이 60년을 넘는 지금까지 분단으로 고착이 돼 갈라질 것을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체제에 의한 남북의 인위적 분단은 불과 2년 만에 6∙25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 초기 탱크를 앞세운 북한의 기습에 밀려 1951년 제32주년 3∙1절 기념식을 부산에서
맞이한 신익희는 통한을 금할 길 없어하면서신익희는 첫째는 민족중심주의, 둘째는 민주주의 실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민주주의의 핵심은‘여러 사람의 일을 여러 사람의 뜻대로 여러 사람이 결정하는 대로 한다’라는데 귀착했기 때문이었다.

-해공의 민주주의론
신익희의 정치사상은‘민족주의’, ‘평화주의’, ‘애민주의’에 근간을 두었다. 그는 민주주의란 우리 인류가 반드시 걸어가야 하는 큰 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
시대는 파시즘과 독재의 물결이 기승을 부릴 때인데, 민주주의를 대로(大路), 대도(大道)를 생각하며 정치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였음을 보여주
는 것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51년 3∙1절 기념사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신익희는‘사사오입’이라는 불법 부당한 방법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영구 집권을 획책하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대하여 강력한 투쟁을 선언하고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였다. 갖은 관권 탄압에도 불구하고 1956년 4월 서울 수송초등학교 3만 명의 인파와 대구 수성천 강연회 20만 명의 인파 앞에서“못살겠다, 갈아보자!”라고 포효
했다. 이어 5월 3일 서울 한강 백사장 유세에서 당시 서울 인구의 1/3에 육박하는 30만~40만 명이 참집한 그야말로 인산인해의 민심을 보고 국민들은 위대한 민권시대
의 개막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사를 불확실성과 애매함의 연속이라고 하듯 어느 누구도 예견할 수 없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5월 5일 새벽 5시 25분 호남선 열차를 타고 용안을 지나
함열로 가는 도중 열차 안에서 신익희는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쓰러져 유명을 달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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