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영(具然英, 1864~1907)의 본관은 능성(綾城). 호는 춘경(春景). 1864년(고종 1) 6월 20일 부친 구철조(具哲祖)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대한제국 기에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투쟁에서 무력으로 항거하다가 힘의 열세를 직시하고 국력 배양을 중심으로 한 항일 투쟁으로 전환하여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의병장으로, 애국지사이자 민족의 선각자이다. 구연영의 호가 춘경(春景)이어서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는 구춘경(Ku Chun�Kyeng)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어릴 때의 성장 기록은 없으나 한문 수학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짐작되며, 18세 전에 변씨(후에 세례 받고 美禮란 이름을 얻음)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구연영은 한때 대한제국의 관리로 몸담았으나 부패한 조정에서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보고 통분을 금치 못하여 관직을 버리고 당시의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구 국 운동을 위해 헌신할 뜻을 품게 되었다. 20여 세 때 선향인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궁평리에 정착하여 10여 년간 가업에 종사하면서 당시 서울에 있던 김하락(�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泰元)∙신용 희(申�熙) 등을 비롯하여 이천(�川)에 있던 화포군(火砲軍) 도영장(都�長) 방춘식(方春植) 등과 친교를 맺었다. 훗날 경기도 의병은 이천이 중심이 되어 남한산성을 점거하고, 제천의 유인석 의병과 함께 중부 지역 의병 운동을 주장하였는데, 이천 의병의 주동 인물들이 구연 영∙김하락∙김태원∙조성학∙신용희 등이었으며, 무반가문 출신의 구연영이 중군장이 되어 핵심 부대를 지휘하였다. 1899년 3월 세례를 받은 후 3년 동안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책을 파는 매서인(賣書人) 기간을 거치면서‘의병장 구연영’은‘전도인 구연영’이 되었고, 척사 위정(斥邪爲正)을 신봉했던‘유생(儒生)’에서 민중구원을 선포하는‘기독교인’이 되었다. 그가 민족 운동의 한 방편으로 선택했던 기독교는 오히려 이제 그를 전도인으 로 선택하여 보다 철저한 봉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구연영은 전도사가 되어 이천읍 교회를 비롯한 19개 교회 1,302명의 교인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구연영이 맡은 지역은 그가 6년 전 을미의병 때 의병장으로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녔던 지역이다. 그는 이제 칼 대신 성경을 들고, 피의 복수대신 십자가의구원을 외치며 순회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구연영이 민족 운동과는 완전히 결별한 교회 전도사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기독교를 통해 오히려 승화된 형태의 민족 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는 무 엇보다 민중 자신이 민족 문제를 심각하게 이해할 때 민족 운동은 보다 강력한 힘을 얻어 추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교회들을 순회 하며 기독교 복음과 함께 민족의 현실을 계몽하는 강연을 하였다. 특히 1904년 일제의 괴뢰 단체로 설립된 일진회(一進會)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그의 단골 강연 주제였다. 일진회의 내막에 숨겨진 일제의 조선 침략 정책을 폭로하였으며, 우선 눈에 띄는 경제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 조직을 통해 국채 보상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아들 구정서와 함께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를 조직 하였는데, 이러한 민중 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인물로는 장춘명∙고시영∙안경진∙박종석∙김제안∙원용한∙한창섭∙함동의∙안석희∙정기영∙박성현 등이 있었다. 한편, 일진회는 대한제국기의 대표적인 친일 단체로 1904년 8월에 송병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은 1904년 4월 명목상 주한 일본군의 군사 통역 이지만 조선 안에 친일 단체를 설립하라는 일본의 비밀 지령을 받고 귀국했다. 이어 자신과 같은 임무를 띠고 조선에 머물고 있던 가무치[神鞭知常]의 자문을 받으며 친일 고위 관료들과 독립협회 출신 친일 인사들과 접촉하며 세력을 모았다. 그러나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가 집회 결사 엄금령을 내림으로써 한일 강제 병탄에 커다란 공을 세웠던 일진회마저도 그해 9월 12일 10여 개 단체와 함께 강제 해산되었다. 구연영은 잦은 일진회 규탄 강연으로 일본 측으로부터 주목을 받던 중에 서사(書士)로 있던 이용주의 밀고로 아들 구정서와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일 제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결국 이천 장터에서 미루나무에 묶인 채 아들과 함께 총살당하였다. 그때가 1907년 8월 24일(음력 7월 16일) 구연영의 나이 44세, 아들의 나이 25세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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