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 시대의 학자 운양 김윤식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6 조회 : 647
김윤식(�允植, 1835~1922)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또는 소천(蘇川)이라고도 한다. ‘운양’은 육구몽의 시「초인십영(樵人十詠)」중‘초자(樵子)’라는 시의“생자창애변(生自蒼崖邊) 능암백운양(能 白雲養)”에서가져온 것이고, ‘소천’은 광주(廣州) ‘귀천(歸川)’의 다른 이름이어서 자호(自號)한 것이다.
선생의 본관은 청풍김씨(淸風�氏)다. 1835년(현종 1) 을미년(乙未年) 음력 10월 3일4 두포(荳浦)의 집에서 아버지 좌찬성 김익태(金益泰)와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氏) 사이에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윤식의 9대조는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내면서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던 김육(�堉)이다.
선생은 구한말 격변기에 외교 업무를 맡아 동분서주하며 위국제생(爲國濟生)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열여섯 살 때 한양에 와서 유신환(兪莘煥)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다. 유신환은 당대의 거유(巨儒)로 조선말 성리학의 대가였다. 그는 전의 현감
(全儀縣監)일 때 가렴주구(苛斂誅求)의 민폐를 없애고 유학의 학풍을 일으키는 데 힘 썼으나, 관찰사의 모함으로 홍천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벼슬에 나가
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써 김윤식을 비롯하여 서응순(徐應淳)∙김락현(金洛鉉)∙윤치조(尹致祖)∙남정철(南廷哲) 등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민
씨 척족(戚族)인 민태호(閔台鎬)∙민규호(閔奎鎬)∙민영목(閔泳穆) 등을 비롯해 이조판서를 지낸 윤병정(尹秉鼎)과 대제학을 지낸 한장석(韓章錫) 등도 문생이었다. 김윤
식의 인맥과 학문, 환로(宦路)의 인맥은 여기서 만난 동학(同學)들과 형성되었다.
유신환 문하에서의 수학(修學)은 김윤식이 유학자로서의 정신을 확립하는 기간이 었다. 유신환이 죽은 후에는 박규수(朴珪壽) 문하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유신환 문하
의 문생들과 박규수 문생들은 평생 선생과 학문을 이끌어주고 교유하는 벗이 되었다.
선생은『운양집』5권에서 평생 사우(師友)로 열 사람을 꼽고 추모시(追慕詩)를 지었는데, 박규수∙유신환∙서응순∙이응진(�應�)∙이연익(�淵翼)∙김홍집(�弘集)∙어
윤중(魚允中)∙박선수(朴瑄壽)∙이건창(�建昌)27∙홍계훈(洪啓薰) 등이다. 김윤식은 이와 같이 학문에 정진하며 터득한 경세관(經世觀)을 1885년에 한양의 개항(開港)과 교역에 관한 사견(私見)을 문답식으로 적은「한성개잔사의(漢城開棧私議)」와 경세론을 적은「십육사의(十�私議)」라는 사론(私論)을 쓰게 된다. 「십육사의」
는 인재 추천에서부터 인재 양성, 양병(養兵), 상세(商稅), 혁진(革鎭) 등 총 16편으로되어 있는데, 그의 나이 장년(壯年)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경세철학을 문장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선생은 관리로서 뿐만 아니라 문장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귀천시사(歸川詩社)와 장동시사(壯洞詩社)를 결성해 당대의 명유(名儒), 명문장가(名文章家)들과 시회(詩會)
를 열고 교유(交遊)하였다. 귀천시사는 사촌형인 김만식(�晩植) 등과 함께 운영해 나간 시사였고, 장동시사는 민태호(閔台鎬)를 비롯해 이응진(�應辰) 등 유신환의 제자
20여 명과 만든 시사였는데 시인묵객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김윤식은 1865년 12월 말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음청사(陰晴史)』에는 1881년 9월 1일부터 1883년 8월 25일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고, 『속음청사(續陰晴史)』에는 1887년 5월 29일부터 1921년 12월 31일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또『추보음청사(追補陰晴史)』에는 누락된 일들을 보충하여 적었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성실한 선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거의 매일 빼먹지 않고 쓴 그의 일기는 개인사(個人史)이면서, 나라가 쇠망(衰亡)해 가는 격동기의 근세사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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