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증에 철저한 실학자, 안정복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6 조회 : 811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시호는 문숙(文肅). 충청도 제천현(堤川縣) 유원(兪院) 마을에서 안극(安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선대로부터 남인에 속하였고, 태어날 당시 조부 안서우(安瑞羽)가 남인 학자 권유(權愈)의 문인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있었다. 4살 때 서울 건천동 외가에, 6살 때 전라도 영광 월산에, 9살 때 다시 서울 남정동에 올라와 살았다. 14살 때 조부가 경상도 울산부사로 전임되자 가족이 모두 울산으로 이사하였고, 1년 뒤 조부가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 무주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함에 따라 안정복도 그 곳에서 10년가량 살았다.
1735년(영조 11) 24살 때 조부가 별세하자 이듬해 온 가족이 경기도 광주부 경안면 덕곡(현 광주시 중대동 텃골) 선영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덕곡에 이사한 안정복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주경야독하였다. 27살 때『임관정요(�官政要)』초고를, 29살 때『하학지남(下學指南)』과『정전설(井田說)』을, 30살 때『내범(內範)』을저술하였다. 33살 때에는 서울에서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馨遠)의 증손 유발(�發)을 만나 유형원이 저술한『반계수록(磻溪隧錄)』등을 접하면서 그의 실학을 익히게 되었다. 1746년 35살이 되던 해 안산(安山)의 성호(星湖) 이익(�瀷)을 찾아가 문하생으로 받아주기를 청하여 성호문인이 됨으로써, 그동안 독학으로 일관해 온 그의 학문에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되었다. 38살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을 거쳐 그해 만령전(萬�殿) 참봉을 제수받았다. 이어 40살 때 의영고(義盈庫) 봉사(奉事), 41살 때 정릉(靖陵) 직장(直長), 42살 때 귀후서(歸厚署) 별제(別提), 1754년 43살 때 사헌부 감찰(監察)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1754년 아버지 안극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덕곡 향리로 돌아와 이후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매진하였다. 이때 성호의 부탁으로 집필하던『이자수어
(�子粹語)』와『임관정요』를 완성하였으며, 1760년에는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역사서『동사강목(東史綱目)』초고를 집필했다. 2년 후인 51살 때 성호의 저서『성호사설(星湖僿說)』을『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選)』으로 다시 정리하였고, 56살 때에는 조선역사서『열조통기(�朝通紀)』를 저술하였다. 61살에 세자 교육기관인 익위사(翊衛司)익찬(翊贊)에 임명되어 서연(書筵)에 8차례 참여하였고, 65살에는 충청도 목천(木川)현감에 임명되어 2년 6개월 재임하는 동안 장빙고(藏氷庫)∙방역소(防役所)∙사마소
(司馬所)를 설치하는 등 여러 치적을 남겼다. 이어 1781년(정조 5) 70살 때 정조의 명에 따라『동사강목』을 조정에 올렸으며, 72살에 돈녕부(敦�府) 주부(主簿)에 나아갔
고, 같은 해 장릉령(長陵令)과 헌릉령(獻陵令)에 제수되어 수개월 근무하다가 사표를 내고 귀가하였다. 73살 때 의빈(儀賓) 도사(都事)와 익위사 익찬에 잠시 나아갔으나
이후에는 노령과 병환으로 조정의 부름이 있어도 나아가지 않거나, 나아가더라도 곧 사임하고 돌아왔다.
노년기의 안정복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성호학파를 이끌어가는 원로로서 당시 성호학파의 일부 젊은 학자들이 천주교에 심취함에 따라 안정복은 정부의
박해를 예견하고 이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안정복을 멀리함에 따라 성호학파가 분열되는 위기에 봉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780년대 노년기 안
정복은 천주교를 주된 대상으로 적극적인 벽위 노선을 걸었는데, 천주교를 비판하는 글「천학문답(天學問答)」도 이때 쓴 것이다. 일생을 자주 혼절하는 중병 때문에 세 번
의 유서를 남길 정도로 병고에 시달렸으며, 말년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성호학파 젊은 이들에 대한 설득 잡업도 포기해야 하면서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다.
1789년 78살 되던 해, 조정에서는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를 높여 주었고, 6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어 7월 다시 동지중추부사(同知
中樞府事) 광성군(廣成君)에 봉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91년 7월 20일,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801년(순조 1) 9월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 지의금 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議政府左參贊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광성군(廣成君)을 추증받고, 1871년(고종 8) 3월 문숙공(文肅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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