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을 지킨 용장, 신립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6 조회 : 778
신립(申砬, 1546�1592)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입지(�之). 시호는 충장(忠壯)으로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가문인 평산신씨는 고려의 개국 공신 신숭겸(申崇
謙, ?~927)을 시조로 하며, 대대로 높은 관직을 역임했다.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11명, 대제학 5명, 판서 20명을 비롯하여, 문과 급제자만도 302명을 배출하는 등 대표적
인 문신 집안이면서 동시에 신립으로 대표되는‘무신 집안’이기도 하다. 파계는 20여개로 갈리는데 그 중 문희공파∙정언공파∙사간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며, 신립은 문희공파이다. 경기 광주 지역에서 평산신씨 세거가 확인되는 곳은 도척면 진우3리 부채골이 있으며, 곤지암읍 신대리에 신립 묘역을 포함한 평산신씨 세장지가 조성되어 있다.

<신립이 치른 주요 전투>

 -여진족 번호 니탕개의 난
조선시대 육진(�鎭)의 북쪽 두만강 건너편에 살던 여진족 중에는 조선과 무역을 하며 공물을 바치던 번호(藩胡)와 조선과 친하지 않아 때때로 침략을 하던 심처호(深
處胡)가 있었다. 번호는 심처호가 변방에 들어오려고 할 때면 즉시 조선에 보고하고 이들을 막거나 구원을 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 초기 때부터 그들을 후하게
대해 주었다. 니탕개는 이들 번호 중 세력이 가장 컸는데, 1583년(선조 16)에 일어난 번호들에 의한 일련의 반란을 니탕개의 난이라 한다.
6진 개척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변방의 방어가 차츰 소홀해졌다. 그 결과 조선의 장수들 중에 적임자는 줄었고, 반면 여진족 번호는 차츰 강
성해졌다. 그러던 차에 번호의 부락에 조금씩 피해를 끼치는 일이 생겼는데 이를 제대로 무마하지 못하면서 번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경원부 아산보 번호의 추장인 우
을지가“전 만호 최몽린이 번호를 침학한다.”고 소문을 내면서 부근에 격문을 보냈다. 이어 조선의 토병을 잡아서 심처호에게 보낸 후 밤에 보성을 습격하면서 마침내
난이 일어난 것이다. 1593년(선조 16) 여진족은 함경도의 각지를 수차례 공격했다. 이때 온성 부사 신립은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다른 진 병력과 함께 공격당하는 성을 후원해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六鎭)을 지켜냈다. 당시 6진의 하나인 온성진(穩城鎭)에는 직할 323명, 예하 진 포함 799명이 있었으며, 기병 숫자는 불분명하지만 평상시 철기 500여 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켰다고 한다. .

-안원보전투(1583년)
당시 여진족의 형세가 대단해 안원보 앞의 넓은 들판은 적군으로 가득 찼다. 반면 권관(權管) 이우춘(李遇春), 조전장(助戰將) 병사(兵使) 이제신(李濟臣), 그리고 군관
(軍官) 우림위(羽林衛) 김진경(�震經)은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키려는 뜻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토병 한 사람이 성을 넘어서 도망하였는데, 마침 신립이 아산보의 전투
를 돕기 위해 가는 길에 도망치던 토병을 붙잡았다. 신립은 그 토병의 목을 베고 장대에 매달아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킨 후, 군사들을 성 위에 벌려 세웠다. 이어 북을
은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다른 진 병력과 함께 공격당하는 성을 후원해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六鎭)을 지켜냈다. 당시 6진의 하나인 온성진(穩城鎭)에는 직할 323명, 예
하 진 포함 799명이 있었으며, 기병 숫자는 불분명하지만 평상시 철기 500여 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켰다고 한다.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
1590년(선조 23) 신립은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로 임명되었다. 선조는 신립이 싸움터
로 떠날 때 검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었고, 특별히 신립이 요청한 김여물(金汝杖)을 부하 장수로 데리고 가도록 해 주었다. 신립은 도중에 군사를 모집해 충주에 도착했
는데, 이때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하고 쫓겨 왔다. 신립은 그를 처형하려다 재주를 애석히 여겨 선봉에 나서 싸워 속죄하도록 용서해 주었다.
충주에 도착 후 김여물은 조령(鳥嶺)에 진지를 구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신립은“적은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서로 부딪치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우리 병정들은 아무 훈련도 받지 못한 장정들이니 사지(死地)에 갖다 놓기 전에는 용기를 내지 않을 것이다.”라며 탄금대 근처 달천(達川)을 뒤에 두고 배수의 진
을 쳤다. 이는 또한 신립이 기병전의 달인으로서 자신의 특기인 기병을 이용하여 왜구를 무찌름으로써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함이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적은 조령을 넘어왔는데, 그 위풍이 대단해 산과 들이 왜군으로 가득 찼다. 신립은 휘하의 여러 부대를 지휘하며 적진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진흙이 많아 말이 움직이는 데 불편하였고, 적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강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왜적은 우회 작전으로 아군의 우측에 진출하여 동서에서 압도
적인 세력으로 협공하였다.
전황이 매우 불리함을 안 신립은 김여물더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짓게 하여 그것을 부하에게 전달하고는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 10여 명을 죽이고, 함께 강
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신립 장군 묘(申砬將軍墓)는 경도 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되었으며 곤지암읍 신대리 산1-1에 부인 전주 최씨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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