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직제학공파김약시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5 조회 : 216


지정일 | 2008년 12월 4일 소재지 | 곤지암읍 삼합리 산50-1
지정사항 | 광주시 유형문화유산 제3호

김약시(金若時, 1335~1406)의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음촌(陰村),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고려 말인 1382년(고려우왕 8)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대과에 급제하였으나 조선이 개국된 후 두문동(杜門쉓)에 들어갔다가 광주 금광동(현 성남시 금광동)에 은거하여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김약시 묘는 곤지암읍 삼합리와 여주시 산북면 송현리 경계 도로변 좌측의 국청개 마을 경모재(景慕齋)의 배후 산중턱에 남향하고 있다. 원래 성남시에 있었으나 1972년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묘표는 1727년(영조 3)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대제학 이재(李縡)가 짓고 글씨는 김약시의 방계 후손 김조택(金祖澤)이 썼다. 비석은 원수(圓首)형으로 자연석을 대강 다듬은 받침돌을 썼는데, 규모는 높이 149㎝, 최대폭 64.5㎝, 두께 20.5㎝이다. 이 비석은 전 왕조인 고려에 충절을 지킨 이들에 대
해재평가가이루어지는 16세기이후에건립된몇가지예의하나이다.
문인석(166㎝)은 관모와 관복을 착용한 복두공복( 頭公服) 양식으로 마모가 심한데 홀을 마주 잡은 양 손은 가늘고 작다. 그 옆의 석인(石人, 118㎝)은 복두공복 양식이 유행하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얼굴(39㎝)은 과장되어 전체 크기의 1/3을 차지하고, 눈·코·입을 우스꽝스럽게 배치하였다. 옆에서 본 모습은 분명 두건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앞쪽에는 그것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목을 표현하기 위해 깊은 홈을 내었다. 몸통은 사각기둥처럼 단순하게 표현되었는데, 양손을 가운데 모으고 64×9㎝의 긴
홀을 잡고 있다. 양손 모두 손가락 5개씩 표현하느라 사실보다 과장되어 있으며, 발은 매몰되어 보이지 않는다.
김췌(金萃, ?~1452)는 김약시의 아들로 15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1444년(세종 26) 세종의 명을 받아 청주 초수리(椒水쐮 : 수안보)에 가서 목욕하고 안질을 치료한 후‘안질이 조금 나았다’고 복명하여 세종이초수리에가서안질을치료하는데공을세웠다.
김췌 묘표는 하엽방부(화관형) 형태로 하엽과 비신을 하나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건립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15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비신에는 사주(四周)에 경계선을 치고 가운데에 두줄로“星州牧使뿠君諱萃妻令 人庇仁縣夫人뿠氏之墓”라고 하여 묘주(墓主)를 밝혔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녀를 구분하여 1줄씩 쓰는데 부인 쪽의 글자 수가 많아 계속 이어 쓴 점이 특이하다. 김췌는 품계가 4품에 머물러 당상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군이라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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