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동(中垈洞)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09 조회 : 1927
마을의 유래와위치

본래는 광주군 광주읍 중대리(中垈里)였다. 조선시대에는 중리(中里)와대리(垈里)로 2개 행정리(行政里)였으나,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축소개편하면서 두 마을을 합쳐 ‘중대리’(中垈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리(垈里)를‘텃골’이라고 부르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덕곡(德谷)이라고 기록되기도하였다. 이 마을은 광주 안씨(廣州 安氏)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조선 초기에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을 역임한 조선조 최초의 청백리(淸白吏)인사간공(思簡公) 안 성(安 省)이 입향(入鄕)하여 600여 년간 세거하여 오고있다.

중리(中里)는 ‘중말’이라고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함안 이씨(咸安李氏)들이 조선중기 선조(宣祖)시대부터 세거(世居)하여 오고 있다.

3번국도를 따라 경안 IC에서 성남방면으로 약 4km 지점이면 닿는 마을이다. 동쪽으로장지동 ‘절골’ 마을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삼동과 연결되며, 남쪽에는홍중저수지가 있고, 태전동과 연해 있다. 광남초등학교가 있는 곳도행정구역상으로는 중대동이다.

텃골(垈里)
중대동의 중심마을이다.경안동에서 3번 국도를 따라 성남 방면으로 가다가 약 5km 지점에서 우측으로들어가면 이 마을이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뒷산은 영장산(靈長山) 줄기로 마치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아늑한 마을이 산 밑으로 형성되어 있다. 3번 국도변에 있어교통이 좋아져서 지금은 마을 안에 새로이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고, 농경지는거의 대부분이 공장과 물류창고가 들어서 있다. 광주가 낳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선생이 이 곳에 거주하면서 학문을 펼쳤고, 그가강학하던 이택재(邐宅齋)가 현존하고 있고, 묘소(墓所)도 이 마을에있다.

중말(中里)
홍중저수지(弘中貯水池)가 이 마을 앞에 있다. 3번국도가 개설되면서 이 마을 뒤로 산허리가 끊겼다. 이 마을은 장지동과 접해있으며, 389번 지방도가 마을 앞을 경유하여 삼동을 거쳐 갈마치고개를 넘어 성남시갈현동으로 이어진다. 오래전부터 함안 이씨(咸安 李氏)가 세거하여 오고 있으며,마을 뒤로는 3번 국도이고 마을 앞으로는 389번 지방도가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좋은 관계로 지금은 농경지가 모두 중소 공장과 물류창고 그리고 상가로 들어 차있다.

마을의 문화유적
텃골 마을은 광주 안씨(廣州 安氏)의세거지로서, 다음과 같은 선현(先賢)들의 묘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안성(安 省) :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고려 우왕(禑王) 6년(1380) 문과에 급제하여보문각(寶文閣) 직학사(直學士)를 거쳐,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었다. 조선이개국하자 고려의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기게 됨을 개탄하여 대궐 기둥에 머리를부딪치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청백리(淸白吏)가 되었고 관직은한성부윤(漢城府尹)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사간(思簡)이다.

안윤덕(安潤德) : 조선 중종(中宗)대의 문신(文臣)으로,성종(成宗)14년(1483)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중종대(中宗代)에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연산군대(燕山君代)에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전라도 김제로 귀양 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복귀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익혜(翼惠)이다.

안 황(安 滉) : 안윤덕의 증손이다. 선조대(宣祖代)의문신으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위이자 선조(宣祖)의 매부(妹夫)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여의주(義州)로 가던 중 평안도(平安道) 강서(江西)의 객관(客館)에서병사(病死)하였다. 사후 호종공신(扈從功臣)과 광양군(廣陽君)에봉해졌다.

안응형(安應亨) : 조선 효종대(孝宗代)의 문신으로, 광양군황(滉)의 아들이다. 선조(宣祖)39년(1606)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을 지냈으며, 외직(外職)으로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효종5년(1654)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에이르렀다.

안정복(安鼎福) : 조선 영(英)ㆍ정조(正祖)대의 실학자로서호(號)는 순암(順菴),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인이다.세자익위사위솔(世子翊衛司衛率)에 재직할 때 세손(世孫)(정조(正祖))을보도(輔導)하였으며, 외직(外職)으로 충청도 목천현감(木川縣監)에 나아가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고,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다. 성호 이익의수제자(首弟子)로 우리나라 실학(實學)의 태두이며, 성호의 학문을 이어받아조선후기(朝鮮後期) 3대 사찬(私撰) 역사서(歷史書)의 하나인『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광주가 낳은조선후기의 실학자로서 그의 학문은 지금도 빛나고 있다. 『동사강목』외에도『순암집』(順菴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겨 현대에도 그의 저서는 많은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고 있다.

충양사(忠陽祠) : 광양군 안 황의불천지위(不遷之位)를 모시는 사당(祠堂)이다.

이택재(麗澤齋) : 순암(順菴)안정복(安鼎福)이 후학을 양성하며 강학(講學)하던 곳으로, 대문(大門)인영장문(靈長門)과 본채인 이택재 그리고 사숙당(思肅堂)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지금도 실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방문하고 있다.

중말(中里)은 함안이씨(咸安 李氏)들의 세거지인데, 다음과 같은 선현(先賢)들의 묘가있다.

이세응(李世應) : 조선 중종(中宗)대의 문신(文臣)으로연산군(燕山君)7년(150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을 지내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라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지고, 이후 이조참판(吏曹參判)을거쳐, 평안도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양간(襄簡)이다.

이석형(李碩亨) : 조선 선조(宣祖)대의 문신(文臣)으로,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진(震)의 아들인데, 선조(宣祖)1년 진사시(進士試)에합격하고, 임진왜란 때 흡곡현령(歙谷縣令)으로서 관아(官衙)를 지키다가위험에 빠지자 큰아들 민(旻)과 둘째아들 승(昇)이 몸으로 아버지를 구하고왜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참극(慘劇)을 겪었다. 왜란(倭亂) 후 조정(朝廷)에서 두아들에게 증직(贈職)을 내리고, 정려를 세워 포상(褒賞)하였다. 정려문(旌閭門)은중말 함안 이씨 선산(先山)내에 있다.

영장산
텃골을 예전에는덕곡(德谷)이라고도 하였다. 이 마을의 뒷산이 영장산(靈長山)이다. 영장산은『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도 많이 언급되고, 『순암집』(順菴集)에서도 많이언급되는 산이다.

가줄고개
텃골에서 서북쪽으로 영장산 기슭을 타고삼동(三洞)의 안가지울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가줄’이란 ‘가지울’의준말이다.

감투나비(바위)
텃골의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선생의묘가 있는 곳 뒤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 모양이 마치 감투같이 생겼다고 하여붙여진 이름이다.

굴바골
텃골의 북쪽에 있는 광양군(廣陽君)안황(安滉)의 묘 뒤에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데, 영장산의중턱이다.

너머중말
중말에서 장지동(墻枝洞) 방향으로 389번 도로를따라 내려오면서 도로 좌우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동막골
텃골에서3번 국도를 따라 성남시 방면으로 가면서 우측에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데, 돌이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등너머
텃골 입구 좌측의 앞동산 너머를‘등너머’라고 한다.

비선골
텃골에서 동북쪽으로 익혜공(翼惠公)안윤덕(安潤悳)의 묘가 있는 곳을 말하는데, 이 곳에 안윤덕의 신도비(神道碑)가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도비를 텃골 입구로이전하였다.

산시나무골
굴바골 우측에 있는 골짜기를말한다.

석바탱이
중말에서 389번 도로를 따라 텃골로 오는 중간 지점에밭이 있는 들을 말한다.

절터골
산시나무골 우측 골짜기인데, 예전에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태쟁이골
순암 안정복 선생의 묘좌측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함박골
중말에서 북쪽으로 약500지점에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예전에 이 골짜기에 함박꽃(작약)이 많아서 붙여진이름이다.

회저골
중말 앞 389번 도로를 따라 텃골로 가다가 우측에 있는산골짜기를 말한다.

평전(平田)골
텃골에서 약500m 동쪽에 평평한 밭이많이 있어 ‘편전밭들’이라고도 한다.

용상골
영장산의 굴바골 좌측 상봉옆에 있는 골짜기인데, 용(龍)이 승천(昇天)한 골짜기라 하여 ‘용상골’이되었다.

홍중저수지(弘中貯水池)
중말 앞의 저수지를 말한다.광주지역에서 제일 큰 저수지여서 붙여진 이름이고, 면적은 약 43,000평이며,장지동ㆍ역동을 비롯하여 태전동ㆍ경안동지역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는저수지이다.

가루고개
중말에서 태전동의 땟골로 넘어가는 고개를말한다.

절안고개
중말에서 장지동의 절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는데,이 고개를 넘어가면, 절골의 ‘절안’이라는 곳으로 가기 때문에 붙여진이름이다.



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