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쌍령리(大雙嶺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3 조회 : 3156
마을의 유래와위치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큰 고개와 작은 고개가 이어져 있어 예로부터쌍령(雙嶺)이라고 불러왔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대쌍령(大雙嶺), 소쌍령(小雙嶺)이 표기된 것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붙여진이름이다. 큰 고개 바로 밑에 있는 동네라 하여 '대쌍령'(大雙嶺)이라고불러왔다.

광주시청에서 3번 국도를 따라 이천(利川) 방면으로 경안교를지나면 광주시 쌍령동(雙嶺洞)이고, 여기에서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개가대쌍령(大雙嶺)이라는 고개이다. 쌍령이란 고개가 쌍둥이 같이 두 개가 나란히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대쌍령이란 큰 고개를 말한다. 작은 고개는소쌍령(小雙嶺)이라고도 하는데, 이 고개는 대쌍령리에서 이천방면 3번 국도를 타고초월읍 쌍동리와 경계를 이루는 고개를 말한다.

이 마을은초월읍(草月邑)사무소 소재지이기도 하다. 초월농협(草月農協)과 초월파출소 및우체국 등이 있고 광주소방서가 이 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3번국도가 이 마을한복판으로 통과하여 교통이 좋으며, 이 마을 앞으로는 곤지암천(昆池岩川)이흐르고 있고, 마을 뒤로는 백마산(白馬山) 줄기가 뻗어내려배산임수형(背山臨水形)의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금은 아파트가들어서서 인구가 증가하여 4개의 행정리로 갈라지게 되었다. 즉 초월읍사무소가있는 큰 쌍령 마을을 3번 국도를 경계로 국도 남쪽이 1리이고, 북쪽이 2리이며,곤지암천을 건너 남촌 수영장이 있는 마을을 3리,
그리고 용수리로 들어가는도로 옆에 건설된 우림아파트 단지를 4리로 하고 있다.
이 마을은 광주이씨(廣州 李氏)의 세거지(世居地)로서 지금도 많은 후손들이 거주하고있다.


마을의 문화유적

병자호란과 대쌍령
조선(朝鮮)인조(仁祖)16년(1636) 청나라와 싸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벌어졌던 마을이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피신하여 고립되어 있는인조왕(仁祖王)을 구출하기 위하여,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허완(許 琓),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민 영(閔  ),안동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 등이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하여진군하던 중 이곳 쌍령에서 청군(淸軍)과 조우(遭遇)하게 되었는데, 우리 군사는엄동설한(嚴冬雪寒)에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서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오합지졸(烏合之卒)의 열악한 보병(步兵)으로 편성된 부대였고, 잘 훈련된 강력한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우게 되니, 적(敵)은 기마부대(騎馬部隊)가 주력이요,우리군사는 보병(步兵)으로서 상대가 되지 못 하였던 것이다. 결국은 우리 군사는거의 전멸하다시피 되었고, 허 완(許 完) 장군을 비롯한 민 영(閔  ), 선세강(宣世綱)장군도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죽주산성(竹州山城)에서 진을 치고 있던이의배(李義培) 장군도 추후 군사를 이끌고 투입되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돌마면(突馬面) 검천(儉川)에서 전멸 하고 말았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이곳에서 전사(戰死)한 장군들과 병졸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충절(忠節)을 기리기위하여 나라에서 치제(致祭)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조 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국제(國祭) 철폐령에 의해 제향(祭享)이 중단되었으므로, 이 마을에서 해마다 음력정월 초2일 저녁에 마을제사로 제향을 올리고 있었다.〈정충묘〉(精忠廟)는 이 마을어귀 3번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에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순절(殉節)한 장군(將軍)들의 위패(位牌)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오고있다.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유물
이 마을에서는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곤지암천의 선린교(善隣橋)를 건너선린촌마을이 1970년대부터 형성되었는데, 이 곳에서 석기(石器)가수습되었다.

정충묘(精忠廟)
3번 국도변 산기슭에 위치하며, 홍살문과묘각(廟閣)이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군(淸軍)과 맞서 싸우다가전사(戰死)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 완(許 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 영(閔 ), 안동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 공청도(公淸道) 병마절도사이의배(李義培)장군을 모신 사당(祠堂)으로 광주문화원이 주관하고 마을에서협력하여 매년 음력 초3일에 제향(祭享)을 올린다.

조선백자 도요지
이마을에서는 15-16세기경의 조선백자 도요지가 5개소 발견되어 그 중 1개소는문화재청에서 사적지로 지정하였다. 발굴된 것은 청화백자대발ㆍ접시ㆍ대접ㆍ항아리 등이다.

김태선(金台善) 효자비
이 비석은192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정충묘 경내에 있는데, 김태선은 본관이 안동으로 효성이지극하여 부친이 별세하자 묘소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하였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하였다. 이에 초월읍 주민들이감동하여 그의 효행(孝行)을 기리고자 효자비(孝子碑)를 건립하였다.

낙화암(落花岩)
병자호란 때 대쌍령 전투에서 아군이 크게 패하자 많은사람들이 낙화암 근처로 피난을 하게 되었는데, 청군이 여기까지 몰려오자진퇴양난에 빠진 수 백명의 피난민들, 특히 아녀자들이 결국 강물에 투신하게되었다. 그 모습이 마치 꽃잎이 떨어지듯 하여 후대 사람들이 이 곳을'낙화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평리(島坪里)로 들어가는진입로가 개설되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는 실정이며, 낙화암 앞으로 흐르던곤지암천의 물도 예전에는 몹시 깊었으나 현재는 수심(水深)이 많이얕아졌다.

큰쌍령이(대쌍령리)
대쌍령리의 중심 마을이다. 속칭'큰쌍령이'라고도 부른다.
광주 이씨(廣州 李氏)의 세거지(世居地)로 집성촌을이루고 있다.

선린촌(善隣村)
대쌍령리 앞 곤지암천을 건너 동북쪽으로있는 작은 마을인데, 1968년도에 하남시 천연동 동경주 마을에서 최문환 목사가협동으로 양계장을 만들어 사업을 하다가 이 곳으로 이주하여 양계업을 계속하여왔던 곳이다. 그런 연유로 '선린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고, 지금은 양계장은없어지고 중소기업체가 들어서 있다.

공작고개(孔雀峴)
대쌍령리에서백마산 줄기를 넘어 오포읍 양벌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공작이 날개를 펴고있는 형상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돼지골
공작고개로 올라가다가우측에 있는 작은 골짜기를 말한다.

마장터
대쌍령리에서 용수리로 가는초입 우측에 있는 밭들인데, 지금은 주택지가 되었지만, 예전에 우마(牛馬)를매매하던 장터가 있었다고 한다.

미터골
대쌍령리 초월읍사무소 뒤 남쪽골짜기인데, '미터골'이라고 불러왔다.

병풍바위
백마산으로 올라가는큰골에 있는 바위인데, 마치 병풍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삼바위
백마산으로 올라가다가 좌측에 있는 바위의이름이다.

새남터골
대쌍령리에서 경안동으로 가다가 3번 국도변 좌측에있는 골짜기인데, 6.25 한국전쟁을 치루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희생되었다.

진터골
대쌍령리에서 경안동으로 가면서 우측에 있는골짜기인데,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진을 쳤던 자리라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선바위
대쌍령리 앞을 흐르는 곤지암천 안에 있는 바위가 마치섬처럼 큰 것이 있어 '섬바위'라고 불렀는데, 섬바위가 변하여 '선바위'가 된 것같다.

소쌍고개
작은 쌍령이라고도 하는데, 대쌍령리에서 쌍동리소쌍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술막뒤들
대쌍령리 북쪽에 외딴주막이 있었다. 그래서 술막 뒤에 있는 들이라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시골
술막 뒤, 들 좌측에 있는 골짜기를말한다.

안세미골
백마산 올라가는 길옆 삼바위 좌측을말한다.

웃말
경안동으로 가는 3번 국도 좌측을 말한다. 이 곳에조선백자도요지가 있다.

진새골
공작고개로 올라가는 골짜기를말한다.

큰골
백마산으로 올라가는 큰 골짜기여서 붙여진이름이다.

회가나무골
백마산 올라가는 우측 계곡을말한다.

지개나무골
큰골의 초입을 말하는데, 이 곳에 있는 산소가호랑이 혈이어서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려고 가면, 병을 얻어 죽는 일이 생겨타인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무들이들
대쌍령리에서용수리 무들이 마을 앞쪽에 있는 논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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