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유래와위치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지음리(知音里-징골). 야포동(冶浦洞-풀무께),국정포동(國井浦洞-국정개) 등 3개 마을이었으나,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통폐합하면서 세 마을을 합쳐 삼합리(三合里)라고 하였다. 실촌읍과 여주군산북면(山北面) 경계에 있는 마을로, 실촌읍 만선리(晩仙里)에서 유사리(柳寺里)를거쳐 지나가면 삼합리이다. 삼합리에서 갈고개를 넘으면 여주군 산북면 송현리가나온다.
이 마을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시대 공민왕(恭愍王)이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안동(安東)으로 가던 도중, 경안역(慶安驛)을 거쳐 이마을에서 잠시 주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공민왕이 파서 먹었던 우물이있다하여 국정포(國井浦-국정개)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게 되었고, 병사들이병기(兵器)를 만들던 곳을 야포동(冶浦洞), 그리고 불경(佛經)을 읽으며 기도 하던곳을 지음(知音)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국정개의 뒷산을 '공민산' 또는'공민봉'(恭愍峯)이라고 부르고 있다.
문화유적
고려충신 김약시의묘 고려 충신 김약시(金若時)의 묘가 이 마을 공민봉(公愍峯) 밑에있다. 김약시(金若時)는 고려 유신(遺臣)이다. 호(號)는 음촌(陰村),시호(諡號)는 충정(忠定)이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우왕(禑王)9년(1383)대과(大科)에 급제한 후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그는 조선태조(朝鮮太祖) 이성계(李成桂)와 동갑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교분이두터웠다. 그의 형 약채(若采), 약항(若恒)은 조선이 개국하고 이성계가 왕위에오르자, 조선 조정에 나아가 계속 벼슬길에 섰으나, 김약시는 부인과 함께 걸어서광주(廣州) 금광리 산골짜기에 이르러 초막(草幕)을 짓고 은거하였다. 태조는어서(御書)를 보내 관직(官職)을 수여하고 출사(出仕)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으나끝내 불응하였다. 조선 순조(純祖) 때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증직(贈職) 되었고, 시호(諡號)를 받았다.
국정개(國井浦) 삼합리의중심마을이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가다가 이 곳에 머물 때새로 우물을 파서 먹었던 유래가 있어 나라 임금이 먹던 우물이 있다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지음(智音)(징골) 국정개 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흙이 질어서 진골이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으나, 이곳에 피신하였던 공민왕이나라의 안녕을 빌면서 불사(佛事)를 매일 같이 열어 징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하여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야포(풀무깨) 공민왕이 피난을 가면서도호위하는 군사들의 무기는 계속 만들거나 수리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 마을에 풀무를차려 놓고 무기를 제조하였다고 한다. 매일 풀무질을 하면서 무기를 생산하거나수리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갈고개 삼합리에서 여주군 산북면송현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날기터골 삼합리에 있는 골짜기이름이다. 만선리에서 유사리를 지나 여주군 송현리로 넘어가는 좌측에 있는데,원래는 나가대곡(羅家垈谷)이라 하여 예전에 나씨가 살던 집터라 하여 붙여진이름인데, 변하여 '날기터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전원주택지로변했다.
넘말(국정개 너머) 국정개 마을 너머에 있는 작은마을이다.
독박골 국정개 마을 서북간에 있는 골짜기에 큰 독과 같이생긴 바위가 있어 독바위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독박골'이라부른다.
망재(고개) 국정개마을 동북간에 있는 고개를말한다.
바깥말(빈지골) 국정개 마을의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이름이다.
소시랑봉 삼합리의 남쪽에 있는 큰 산봉우리를'소시랑봉'이라고 부른다.
지원향개 국정개 동편 골짜기인데, 예전에지(池)씨가 살던 곳이어서 생긴 지명이고, 지금은 전원주택지가되었다.
참사골 지음동 마을 동편 위에 있는 산골짜기를말한다.
큰골 소시랑봉 아래에 있는 큰 골짜기를말한다.
공민봉(恭愍峯) 고려유신(高麗遺臣) 김약시(金若時)의 묘가 있는산의 봉우리를 말한다.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난(亂) 때에안동(安東)으로 피난 가던 도중 이 마을에 묵게 되면서 '공민봉'이라고 부르게되었다. 여주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소넘이골 독박골 옆의 골짜기를말하는데, '소노골' 이라고도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