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미리(悅美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3 조회 : 1540
마을의 유래와위치

조선시대에는 상열미동(上悅美洞), 중열미동(中悅美洞),하열미동(下悅美洞)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914년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에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열미리(悅美里)로 하였다. 열미(悅美)는 연미(燕尾)가변하여 생긴 것인데, 이 마을에 있는 조선 세조대(世祖代)에 영의정(領議政)을역임한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의 묘소가 그 형국(形局)이 마치 제비꼬리같다고 하여 연미혈(燕尾穴)이라고 하는데, 연미리(燕尾里)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열미(悅美)가 되었다고 전한다.

상열미 마을에서 중열미 마을을 거쳐 하열미마을까지 흐르는 개천을 따라 취락(聚落)이 형성되어 있다. 이 개천은 하열미마을에서 곤지암천과 합수하게 되어, 하천주변으로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고,곤지암천에 보(洑)를 만들어 논농사를 지었는데, 황 모 씨가 개척한 보를'황씨보'라 하고, 구춘서씨가 개척한 보를 '춘서보' 라고 부르게되었다.

실촌읍 곤지암리에서 44번 도로를 따라 양평(楊平) 방면으로골짜기를 따라가면서 실촌읍의 여러 마을을 통과하게 된다. 처음 만나게 되는마을이 열미리이고 그 다음이 오향리(五香里)이며, 맨 끝에 건업리(建業里)가있는데, 이곳을 실촌읍에서는 '안거리'라고 부른다.

열미리의 뒷산은 6.25전쟁 격전지(激戰地)로 유명하다. 중공군(中共軍)과 유엔군간의 교전이 치열하였던곳으로, 이곳 전투에서 쌍방 수천 명의 군사가 희생 된 사실이 있다.

마을의문화유적

조선 초기(初期)의 문신(文臣)이며 세조대(世祖代)에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한 충렬공 구치관(具致寬)의 묘와 신도비(神道碑)가 있고,그를 제향(祭享) 하는 충열묘(忠烈廟)가 있다. 조선 현종(顯宗) 때에 효행으로정려문(旌閭門)을 하사 받은 구치관의 6대손 구 척(具 滌)의 묘가 있으며,중열미(中悅美)에서는 조선백자 도요지가 10개소 발굴되어, 이 중에서 4개소는문화재청에 의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구치관(具致寬)의묘
본관(本貫)은 능성(綾城), 자는 이율(而栗) 혹은 경율(景栗)이며, 아버지는목사(牧使) 구양(具揚)이다. 조선 전기(前期)의 문신(文臣)으로 세종(世宗)11년(1429)에 生員이 되고, 世宗 16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정자(正子)가 되었고, 뒤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를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 의정부검상 등을 역임하였다. 단종(端宗) 원년(1453)계유정란(癸酉靖難) 직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명을 받아 함길도(咸吉道)에 가서경성부사(鏡城府使) 이경유(李耕有)를 참살하고 보공대호군(保功大護軍)이되었으며, 뒤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세조(世祖)가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해졌고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世祖 8년(1462)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고, 뒤이어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세조(世祖) 12년(1466)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그 사이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신제대전』(新制大典)『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참여하여 초본(抄本)을 완성하였으며, 또 이 때건주위의 야인(野人)이 변경(邊境)을 침범하자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 되어 이를토평(討平)하였다. 예종(睿宗) 즉위년(1468)에 신숙주 한명회 등과 함께원상(院相)이 되어 왕을 보좌하여 서정을 의결하였고, 원상(院相)으로서호조판서(戶曹判書)를 겸하였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다시이조판서(吏曹判書)를 겸하였다. 성종(成宗)2년(1471)에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추록(追錄)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조선 초기에 세워진 구치관의신도비가 현존하고 있다. 비문은 서거정(徐巨正)이찬(撰)하였다

백인대(百 臺)(일명 육각정(六角亭)
열미리 앞곤지암천변에 있는 정자(亭子)인데,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충청도에서 상경할 때그의 문인(門人)들과 함께 반드시 이 곳에 들러 이 고장 출신 제자인구문찬(具文粲1636-1639)과 더불어 경학강론(經學講論)하고 시문화답(詩文和答)을나누던 곳이다.

구덕회(具德會) 효자비(孝子碑)
1930년에 그의 효행을기려 실촌면민의 이름으로 건립된 것이다.

광주시 보호수로 지정된느티나무가 수령 500년을 자랑하고 있기도하다.

상열미(上悅美)
열미리에서 맨 위쪽에 있는 자연부락이다. 하열미마을에서 4km 정도 산속으로 들어와 있는 산골부락이다. 이 마을에서 예전에는동막골고개를 넘어 초월면 학동리(鶴東里)로 넘어 다녔으며, 또 소미골고개를 넘어퇴촌면 우산리(牛山里)로 넘어 다녔다. 이 마을은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이루어놓은 마을이다. 상열미와 이중말, 뒷골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있다.

중열미(中悅美)
하열미 44번 국도변에서 상열미로 올라가다가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중열미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진주 강씨(晋州姜氏)의집성촌이다. 이 마을에서 조선백자 도요지가 5개소 발견되었다. 아랫말과 윗말로나누어 부른다.

하열미(下悅美)
열미리에서 가장 큰 중심마을이며,영의정을 지낸 충렬공 구치관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고 대대로 이어 살아오고있다. 양달말, '음달말, '아랫말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랫말을 '벌열미' 라고도부른다.
이 마을에 영의정 구치관의 묘가 있고, 50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가있으며 백인대도 이 마을에 있다.
이 마을에는 근세에 출중한 한학자(漢學者)구학서(具學書)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읊은 열미의 십육경가(十六景歌)가최근 발견되어 아래에 적어본다.

十六景歌 悅美里 德庵具學書 作

호덕청풍 불어오고 정봉위에 꽃이 피니
이때좋다 벗님네야 거주속객(擧酒屬客) 놀러가세
효대박이 돋는풀과망재봉에 우는새는
사람의 춘정춘흥(春情春興)을 한이없이개어내네
찬우물에 버들곱고 승주골에 잎이되어
천우교목꾀꼬리는 벗을불러 노래하고
연내개울 애내곡과 은담이뜰격양가는
우국원풍 불러오니 강구연월 이아니냐
터굴안에안개돌고 용봉위에 구름나니
일기조차 명랑하다 한번읊어갈러노라
장고개위 지는해와 옥계안에 이는연기
점은경치좋을시고 아니놀지 못하리라
백인고대 높이올라 예계단풍바라보니
형형색색 붉은잎은 가을경치 자랑하네
수래고개눈이희고 정문간에 달밝으니
이내심사 뉘알소냐 친구생각 뿐이로다.

어두메골
상열미 마을에 있는 골짜기로서 항상 그늘이 져서 이골짜기에는 낮에 들어서도 어두컴컴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중말
상열미 마을에 속한 부락으로 상열미에서 내려오면서 고댕이산 밑에형성된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조선백자 가마터가 한 곳발굴되었다.

뒷골
이중말의 뒤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동막골고개
상열미에서 초월읍 학동리 상동막 마을로 넘어가는고개이다.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않으나, 전에는 이 고개를 이용하여 학동리로다녔다.

가장골산
동막골 고개 밑에 있는 산이다.

큰가장골
이중말에서 중열미로 내려오면서 우측에 있는 골짜기를말한다. 첫 번째 골짜기를 '큰 가장골', 다음번 골짜기를 '작은 가장골'이라고한다.

고댕이산
이중말의 뒷산인데, 해발 386m의 제법 높은산이다.

큰 오향골, 작은 오향골
이중말에서 중열미로 내려오면서 왼쪽에있는 골짜기인데, 오향리쪽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더덕골
이 골짜기에서는 옛 부터 더덕이 많이 나온다 하여'더덕골'이라고 불러왔다.

앞산
이중말의 앞에 있는 산이라 앞산이라고부른다.

감투봉
중열미 앞에 있는 산이다. 산봉우리가 마치 감투모양으로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해발 350m이다.

국수봉
감투봉 밑에 있는산봉우리이다. 해발 319m이다.

참싸리골
중열미 마을 바로 앞에 있는골짜기이다. 이 곳에서 참싸리가 많이 났다고 한다.

다리미봉
해발314m의산봉우리인데, 중열미 앞에 있는 산이다. 다리미를 엎어놓은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복사나무골
중열미 '점들'에서 산 위로 뻗어있는 골짜기를말한다. 예전에는 복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점들
중열미에서 하열미로내려오면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들이다. 중열미에서 가장 큰들이다.

고사리골
중열미와 하열미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서, 이골짜기에는 고사리가 많아 봄이면 마을 사람들이 고사리를 꺾기 위해 모여든다고한다.

장고개
중열미에서 곤지암으로 넘어 다니는 고개인데, 지금은이용하지 않는 고개이다. 곤지암으로 장 보러 가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갱지벌들
고사리골 밑에 하천변에 있는 들이다. 하천 양편으로꽤 많은 농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중소 공장과 주택이 많이 들어서있다.

문앞들
하열미 양지말과 음달말 앞에 있는 들이다. 마을 앞에 있는들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들
하열미 44번 도로 건너 곤지암천변에형성되어 있는 논들이다. 곤지암천에 있는 보(洑)에서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논들이라 하여 보들이라고 하였다.

양달말
하열미의 자연부락으로 동편에있는 마을이라 양지바르므로 '양달말' 이라 하였다.

음달말
하열미의양지말과 마주하고 있는 부락인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아랫말-벌열미
하열미에서 가장 벌판 쪽으로 있는 마을이고 지금은도로변이다.

범덕골
하열미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 이 골짜기에 범이출몰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은대미들
하열미에서 곤지암방면으로 돌아서면서 왼편에 있는 논들이다. 곤지암천의 물을 이용하여 논농사가 잘되었고 열미리에서 가장 큰 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 농사가 잘되어 부자가된다는 뜻으로 은(銀) 더미를 만들 수 있다하여 '은덤이'가 변하여 '은대미'가되었다고 한다.

승지골산(해발280m)
하열미에서 열미교를 건너면은대미들을 지나 곤지암천을 건너면 백인대가 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승지골산이있다. 이곳에는 임꺽정의 전설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석굴(石窟)이 안으로들어가면 사람 6~7명이 누워서 잘 수 있는 면적에 구멍이 두개 뚫려 있어 굴속이환하다. 임꺽정이 도둑질 한 물건을 가지고 이 곳에 머물다가 간 곳이라고 전해온다.

노족골
승지골산 밑에 있는골짜기이다.

수리고개
곤지암리와 열미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를말한다

망재봉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 곳의 주민들이 숨어서 적병의침입 여부를 망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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