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리(祥林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3 조회 : 2161
마을 유래와 위치
상림리는도척면 소재지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2km 지점부터 시작하여 여러 마을이 복합하여이루어진 마을이다. 원래 '상림'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뽕나무가 많이 있는 동리라하여 '뽕나무 상'(桑)자를 써서 상림(桑林)이라고 하였던 것이 지금은상림(詳林)으로 표기(表記)하고 있다. 상림리는 시어골(상림1리)ㆍ상림(상림2리)그리고 사기소(상림3리)가 합하여 '상림리'로 부르고 있다.
실촌읍 곤지암리에서궁평리를 거쳐 도웅리 그리고 이곳 상림리를 지나 노곡리로 통하는 329번 지방도가있어 비교적 교통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면내(面內)에서 제일 큰 면적의마을이나, 산림(山林)을 제외하면 농경지(農耕地)의 면적은 얼마되지 않는다.정광산(正光山)이 마을 뒤에 있어 이 곳에서 시작하여 시어골을 거쳐 궁평천으로이어지는 상림천(詳林川)이 흐르고,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맑은 물, 푸른숲, 맑은 공기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이 곳에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연습림이 800정보나 있어 완전히 조림된 산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또한도척면은 광주에 천주교(天主敎)가 제일 먼저 들어온 발상지(發祥地)이기도 하다.상림리 석덕산에는 곡산 연씨(谷山 延氏)의 중시조(中始祖)인 애남공의 묘소가있으며, 그에 얽힌 전설이 전해 오고 있기도 하다. 1549년(명종4년)기유사화(己酉士禍)때에 연(延)씨 가문(家門)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는데,당시 7세된 애남공을 유모(乳母)에게 맡겨 후사(後嗣)를 이어나가게 해달라고당부하여, 야음(夜陰)을 틈타 유모(乳母)가 등에 업고 도달한 곳이 이곳이라고한다. 이 곳에서 승방(僧房)을 차리고 승려(僧侶)아닌 승려행세로피화(避禍)하였으며, 계속하여 여기에서 살면서 그 자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문화유적

조선백자도요지와 구석기시대 유적
상림리104번지 일대에서 1997년 단국대학교에서 지표조사를 하였던 유적으로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의 석기(石器)를 발굴하였다.
상림리의 사기소 마을과시어골 마을에서는 17~18세기에 조선백자를 굽던 가마터가 15개소나 발굴되었으며,3개소는 문화재청에 의하여 사적지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 곳에서는 철화백자항아리ㆍ대접ㆍ접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사기소 마을에서는1720년대에 백자를 굽던 도요지가 9개소나 발견되었다.

시어골마을
행정리로 분할되면서 지금은 상림1리가 되었다. 양달말ㆍ응달말로 그리고가운데 있는 것이 구청말이다.
'시어골'이라는 이름은 이 마을이 상림(詳林)마을로 부터 약 2km 산골짜기로 들어와 있어서, 산세(山勢)가 험하고맹수(猛獸)들이 많아서 여기서는 무서워서 살기가 싫다고 해서 '싫어골'로 불리다가'시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소지명(小地名)으로 승방터 · 절골· 분당골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절이 있었는데, 역시 맹수(猛獸)와 도적(盜賊)이심하여 살기가 힘들었던 곳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것은 옛말이고 지금은 오히려물 맑고 산이 좋아 별장지로 각광 받고 있어 전원주택이 날로 그 수를 더해가며건축되고 있고 하절기에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산이 높아일조(日照)량이 모자라서 곡식 농사는 결실(結實)이 부진하고 논이 별로 없어농사는 활성화되지 못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경주 김씨와 진주 강씨ㆍ안동 김씨등이 대성을 이루고 기타 성씨들과 함께 30여 호가 살고 있다.
정광산 깊은골짜기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시냇물은, 시어골을 지나 상림천을 이루는데,웬만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깨끗한 물이 항시 흐르는 오염되지 않고, 자연경관이수려한 마을이기도 하다.

승방터
예전에 승려들이 시주(施主)를 하여절로 돌아가다가 여기에서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승방터'라고 전해지고 있다.'시어골' 입구에 있다.

절골
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절골'이라고하나, 예전에 이 곳에 도적이 있어 승려들이 시주하여 오면 이를 강도질하여빼앗아서 승려들이 뺏기다 못해 페사(廢寺)가 되었다고 한다.

불당골
절골 근처에 불당(佛堂)을 지었던 곳이라서 '불당골'이라고 칭하여왔다.

정광산(正光山)
도척면 추곡리의 대화산 줄기에 있는 산으로'시어골'마을 뒷산이 되며 해발 562m의 명산(名山)이다.

벌덕산
산의형세가 편편하면서도 산이 뒤로 벌덕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하여 '벌덕산'이라고부르게 되었다. 해발 510m의 높은 산이다.

바로너미골
이 곳은 해와달이 넘어갈 때 이 곳으로 넘어가므로 이르기를 '바로너미골' 이라고 부르게되었다.

옥녀봉
시어골의 산봉우리가 대개 안개가 이 곳으로 모여들어,마치 옥녀가 머리를 풀고 앉아 있는 듯 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적낙봉
이 산봉우리는 용인 쪽에서 보기에는 곡식을 노적한 봉우리 같다하여쌓을 적(積)자를 써서 '적낙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말아가리골
골짜기로서 형세가 마치 말의 아가리 같고 골짜기가 깊다고 하여'말아가리골'이라 부르고 있다.

청노들
한 골짜기가 바위로 덮여 그길이가 1000m나 되는데 모두 바위로 깔려 있고 또한 바위옷으로 수놓은 듯 덮여있어, '푸를 청'(靑)자를 써서 '청노들' 이라고 칭하고 있다.

두멍골
산의 골짜기가 마치 두멍 항아리 같이 둥글게 생겼다고 하여'두멍골'이라고 부른다.

싸리골
예전부터 싸리나무가 골짜기 전체를꽉 차도록 많이 있어서 '싸리골' 이라고 부른다.

방아골
산의 골짜기형태가 위쪽은 일자로 내려오다가 마치 디딜방아 다리 모양으로 양 갈래로 뻗쳐서방아다리 같다고 하여 이름 지어 졌다.


상림 마을(상림2리)
이 마을뒷산의 형태가 마치 누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이 곳에는 뽕나무가 잘자라고 있어서 전에는 '상림'(桑林)이라 했는데 후에 '상림리'(詳林里)로 쓰게되었다. 동쪽은 사기소(砂器所)가 있고, 서쪽이 정광산(正光山) 북쪽은 도척면도웅리로서, 현재 행정리로는 상림2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사기소로부터 흐르는노곡천(老谷川)이 이 마을 노거수(老巨樹)인 느티나무 있는 곳에서 상림천과합수(合水)하여 궁평천(宮坪川)으로 흐르고 있다.

능안
옛날 능자리를정하려고 하였다가 능자리가 못된다고 하여 '능을 쓸 자리가 아니다'를 약해서'능안'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밤성골
산의 골짜기가깊고도 산세(山勢)가 험하여 성(城)과 같다고 하여 '밤성골'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영산골
신령(神靈)을 모신 골짜기라고 하며, 여기에는 평산 신씨(平山申氏)가 산신령께 제를 지냈다 하며, 그 후로 '영산골'이라고 부르게되었다.

당제골(堂祭谷)
옛날 이 산에 신당(神堂)을 짓고당고사(堂告祀)를 지내던 골짜기라 하여 지금도 '당제골' 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제당
산제(山祭)를 지내는 당집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대개 마을마다산제(山祭)를 매년 지내듯이 이곳 역시 산제당(山祭堂)이 있었던 곳이다.

병풍바위
큰 바위가 있는데, 마치 바위가 병풍을 펴 놓은 듯 둘러쳐저 있어서'병풍바위'라고 칭하고 있다.

매바위
이 바위는 매같이 생겼다고 하여'매바위'라고 부른다.

상거북바위(龜頂岩)
산의 능선(稜線)이 쭉내려빠진 끝에 검은 바위가 마치 거북이 같은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장선 처녀의 애틋한 애화(哀話)가 담긴 전설의 곳이기도한데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왕건이 한때 궁예에게 쫓겨 도망할 때,며칠을 굶고 산 속을 헤매며 기진맥진하여 찾은 곳이 이 곳인데, 그 당시 노인과꽃다운 손녀가 이 바위 근처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건은 사경(死境)에서살려준 노인과 처녀가 고마워 이 곳에서 한 달 이상을 묵게 되는데, 기력을 회복한왕건과 처녀는 마침내 사랑을 나누게 되고, 왕건은 다시 찾아오기로 굳게 약속하고떠났으나, 일 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자 장선 처녀는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매일구정암에서 왕건이 오기만을 기다렸건만 왕건은 오지 않았다.
왕건이 고려를개국하고 왕으로 등극한 후, 부장 한명만을 데리고 이 처녀를 찾아 왔으나, 이미그녀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는 애절한 사연의 전설이 전해오는 것이다.

사기소(砂器所)(상림3리)
이 마을은 행정리로는 상림3리에 해당된다.
이곳에서 사기그릇을 굽던 곳이라고 해서 '사기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마을의 동쪽은 도척면 노곡리, 서쪽은 상림2리이고 남쪽은 유정리이며 북쪽은도웅리이다. 천주교 공소가 있다. 마을 앞산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연습림으로잣나무를 잘 조림하여 놓았다. 이 마을은 전에 공동 우물로는 식수난을 겪게 되어,마을 중심에서 동북간 뒷산인 상능곡산 밑에 샘을 찾아 우물을 파서 식수는 물론,여러 모로 이용하였으며, 마을내 3개소의 우물에다 주민들이 '호포계'라는 계를조직하여 기금을 마련, 매년 음력 정월달에 길일을 택하여 돼지를 잡아정제사(井祭祀)를 지내고 있었으나, 1945년 8월15일 광복을 전후하여 계원들의 사망또는 다른 지역으로 전출하는 등의 이유로 '호포계'가 헤실바실 사라져서 정제사를지낼 수 없게 되자, 주민들이 다시 결의하여 정제사 기금을 다시 조성하여 성의껏다시 정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마을 51번지 일대는 1720년대에 사기를 굽던도요지(陶窯址)가 있는데, 지금도 1m 정도만 파면 사기 파편이 발굴되는 곳이다.마을의 성씨는 경주 최씨와 평창 이씨가 대성이며 40여 가구가 거주하고있다.

상능곡(上稜谷)
마을 산의 능선(稜線)이 길어서 이를 구별하여 맨위쪽에 속하는 능선을 '상능곡'이라고 부르며, 아래쪽을 '하능곡'이라고 부른다. 이일대에 바위가 많이 산재해 있으며 이 바위에는 화초 같은 바위이끼가 바위를 덮고있어 마치 화초같이 보인다 하여 '화초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용머리(龍頭)
예전부터 전해오는 전설로 노고바위가 있으며, 이 바위 아래하천물의 깊이가 노끈 뭉치 하나가 다 풀리어 들어갈 만큼 깊은 곳이었으며, 지금도이곳 보(洑)의 이름을 '노고바위보' 라고 하고, 보가 있는 곳이 용머리 같다고 하여붙여진 이름이다.

감투봉
이 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산으로 봉우리가마치 감투같이 생겼다고 하여 '감투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뒷고개
노곡리와 사기소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서, 사기소의 뒤에 있다고 하여붙여진 이름이다.

여우고개
사기소와 유정리(구름우물)간에 있는 산에,예전부터 전하기를 이 곳에는 여우가 자주 나타난다 하여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고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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