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리(嶺東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0 조회 : 2172
마을의 유래와 위치

이마을은 조선 초기에 광주목사가 이 곳을 지나면서 동쪽에 있는 고개너머에 있는마을이라 하여 '영동리'라고 불러왔다. 예로부터 거먹골ㆍ구룡동ㆍ석둔 등 3개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퇴촌면에서 88번 지방도를 따라 양평 방면으로가면서 영동고개(일명 염티고개)를 넘어가면 영동리에 이른다. 양평군 강하면왕창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충주 지씨(忠州 池氏)의세거지이기도 하다.

마을의 문화유적

신 흠(申 欽)의 묘
이마을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145호인 신 흠(申 欽) 선생의 묘가 있다. 신 흠은 조선인조대(仁祖代)의 문신(文臣)으로 본관(本貫)이 평산(平山)이고 호(號)는상촌(象村)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政)이다. 선조(宣祖)19년(1586) 문과(文科)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임진왜란 때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종사관으로 활약했고 이후 노서(老西)의 중심인물로 대사간(大司諫),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 하였고, 광해군(光海君) 때는 영창대군의 유배를 극력반대하다가 귀양을 갔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선조(宣祖)가 영창대군의보필을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다. 문장에 능하여 이정구(李廷龜),이 식(李 植), 장 유(張 維)와 함께 조선중기(朝鮮中期)의 한문학(漢文學) 4대가의한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묘(墓)와 장 유(張 維)가 찬한 신도비(神道碑)가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4년 2월의 문화인물로지정되었다.

거먹골(거북골)
이 마을의 중앙에 커다란 연못이 하나있었는데, 그 못 속에는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으면서 마을에 흉사가 생기면,모습을 나타내어 미리 방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북골'로 부르다가전해내려 오면서 '거먹골'로 변했다고 한다.

구룡동(九龍洞)
전해오는설화로 이 마을이 옛날 바다였다가 육지가 되었는데, 커다란 못이 하나 생겨 그곳에 용이 아홉 마리가 살았다고 한다. 한 번은 열흘동안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온마을이 물에 잠길 지경인데, 그때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구룡동'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석둔(石屯)
예전에 이마을이 싸움터가 된 적이 있는데, 그때 돌로 진을 쳐서 적을 크게 이긴 후부터'석진'(石陣)으로 불러 왔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석둔'이라고 변하게 되었다고한다. 또 일설에는 이 마을 뒷산에서 돌이 많이 나서 '석둔'이라는 이름이붙여졌다고 한다.

군두봉
영동리 서쪽에 있는 산봉우리를말한다.

염티고개-영동고개
'영동고개'라고도 하며, 퇴촌면 도수리에서영동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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