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리(無愁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0 조회 : 2066
마을의 유래와 위치

이마을은 조선조 말 대한제국시대 까지는 초월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일제가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퇴촌면 관할구역으로 편입되었다.
옛날부터 광산김씨(光山 金氏)의 세거지(世居地)로서 이 곳이 물이 맑고 산수가 수려해 사람들이모두 장수(長壽)하고 근심 없이 신선(神仙)과 같이 살아 왔다고 하여'무수리'(無愁里)라고 불러왔다. 다른 이름으로 '무술'ㆍ'무시울'이라고도한다.

퇴촌면에서 가장 산골에 있는 마을로 외진 마을이다.
퇴촌면도마리에서 광동리로 향하여 가다가 우측으로 태허정 최 항 선생의 묘소가 있는곳을 지나 고개를 넘어가면 무수리가 나온다.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취락이형성되어 있다.

마을의 문화유적

김익훈(金益勳)의 묘

이마을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의 세거지(世居地)로서 그들의 선조(先祖)묘역(墓域)이 있다. 무수리 산4번지에는 김익훈(金益勳)의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그는 광산 김씨(光山 金氏)로서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의 대학자(大學者)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며, 조선 숙종(肅宗)대의 문신(文臣)으로 인조(仁祖)때에음직(蔭職)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현종(顯宗)때에 수원방어사(水原防禦使)를거쳐 광주부윤(廣州府尹) 숙종(肅宗)대에 총융사(摠戎使)와 어영대장(御營大將)을역임하였다. 서인(西人)의 맹장으로 숙종(肅宗)6년(1680)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南人)을 축출, 보사공신(保社功臣),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다. 숙종15년(1689)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정권을 장악하자 평안도 강계로 유배, 투옥되었다가 졸하였다. 사후(死後)에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시호(諡號)는충헌(忠獻)이다.

김상악(金相岳)의 묘

경종 4년(1724) 순조15년(1815).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광산. 자는 순자(舜咨), 호는위암(韋庵). 아버지는 성택(聖澤)이다.
친척이 왕실과 혼인하여 그 부귀를누리게 되자 이를 싫어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관악산에 숨어 살았다.

글을즐기되 특히 『주역』(周易)에 관심이 깊어 여러 학자들의 주해(註解)를 섭렵하여근세(近世)의 역학(易學)을 총망라한 10여 만자의 『산천역설』(山天易說)을편찬하였다.

정조(正祖)가 그의 현명함을 알고 홍릉참봉을 제수하였다. 이어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이르렀다.

저서로는 『위암시록』(韋庵詩錄)이 있다. 시호는문간(文簡)이다. 묘 앞에는 신도비가 있다.

그 외에 김익훈의 아들김만채(金萬埰)(병조참판), 손자 김진상(金鎭商)(영조(英祖)대대사헌(大司憲)ㆍ좌참찬(左參贊)) 등 많은 묘소가 있다.

새끼무술
퇴촌면도마리에서 무수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무술고개'라고 하는데, 고개를 넘기 전에있는 작은 마을로 지금도 3가구가 살고 있다. 이 곳을 '새끼무술'이라고 한다.

아래무술
원래는 경안천 변에 멍들마을이 있었는데, 을축년(乙丑年)(1925)대 홍수 때에 마을이 침몰되어 일부는 정지리(亭支里)로 갔고, 일부는 무수리의아래 골짜기로 와서 정착하면서 '아래무술'이라고 불러왔다. 지금은 이 마을이무수리의 중심마을이 되었다.

윗무술
광산 김씨(光山 金氏)들이 이 곳에묘를 쓰면서 세거(世居)하여 온 마을이다. 이 마을이 무수리의 중심마을이었으며,'윗무술'이라고 불러왔다.

절골
윗무술마을과 아래무술마을 중간 좌측에있는 골짜기인데, 예전에 절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무재골
절골밑에 있는 골짜기를 '무재골'이라고 한다.

무지개고개
무수리에서 중부면상번천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무지개고개'라고부른다.

원도박골
아래무술에 있는 골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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