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리(二石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0 조회 : 1222
마을의 유래와위치

이석리(二石里)의 地名은 큰 돌이 두개가 있어서 생긴 이름 같지만전혀 다른 뜻이다.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개편하기 전까지는석호동(石湖洞)과 석림동(石林洞)으로 2개 마을이 따로 법정리를 이루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두 마을을 합하여 석호동(石湖洞)의'석(石)'자와 석림동(石林洞)의 '석'(石)자를 따서 '석'자가 두 개라는 뜻으로'이석리'(二石里)라고 이름하였다.

이 마을은 원래 퇴촌면(退村面)에속하였으나, 팔당댐이 생기면서, 남종면의 면세(面勢)가 너무도 위축되어 1972년행정구역 개편 때에 남종면(南終面)으로 이속(移屬)하였다.

석림동은 일설에의하면 당초에는 성림(聖林)이었으나, 조선조 고종(高宗)의 호(號)가성림(聖林)이어서, 왕위에 오른 후 감히 왕의 호와 같은 마을 이름이외람(猥濫)되다고 하여 '돌 석'(石), '수풀 림'(林)으로 바꾸었다고한다.

이 마을은 43번국도 중부면 상번천리(上樊川里)에서 퇴촌면도마리(道馬里)를 지나 팔당댐 방면으로 가다가 하남시계(河南市界)와 닿은마을이다. 마을 앞은 팔당호이고 뒤로는 검단산(黔丹山)의 줄기가 뻗어내려용마산(龍馬山)이 마을 뒤에 있어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말하는배산임수형(背山臨水形)의 전형이다. 팔당호가 생기면서 대부분의 농경지는수몰되었고, 지금은 농경지는 아주 미미한 편이다.

마을의 연혁

이마을은 석림(石林)과 석호동(정지꾸미) 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는데, 예로부터한강에서 고기를 낚아 생활하면서,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어 비교적 풍요로운마을이었다. 그러나 팔당호가 생기면서 내수면어업(內水面漁業)도 안 되고, 농사도농경지가 별로 없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마을의문화유적

석호정(石湖亭)
석호동 마을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유명한 활터가 있었는데, 이 곳을 '석호정'이라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이정자(亭子)에 전해 내려오는 사연이 옛 문헌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남한지』에도유명한 광주의 루정편(樓亭偏)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활쏘기 대회를 하던곳으로 추측된다.

석림(石林)마을
이석리의 중심마을이다. 예전에성림(聖林)이라고 하기도 하였다는데, 그것보다 이 마을이 돌도 많고, 나무도 많아숲이 울창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광주시 보호수제37호인 수령 3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
보호수 제40호인 수령 270년 된은행나무가 있다.
이 마을 뒤 조리봉 밑에는 조선 숙종대의 문신(文臣)으로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한 용인 이씨(龍仁 李氏) 이하악(李河岳)의 묘가있다.

정지꾸미
예전에 길이 뚫리기 전에는 이 곳에서 배를 이용하여서울도 가고, 분원으로도 나가곤 하였는데, '정지꾸미'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확실히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임진왜란 때 충주 달천강에서 순절한신립장군(申砬將軍)이 이 곳을 지나며 며칠간 쉬어가면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도한다.
이 마을은 팔당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이어서 도시민들의 별장이있고, 지금은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예전 팔당호가 건설되기 전에는 이마을 사람들은 내수면 어업에 많이 종사하였다.

조리봉
산봉우리가 마치조리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봉우리의 높이는 230m정도이지만 그 밑에는 '지전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굴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방 한칸 정도의 넓이가 된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로는 예전에 이 곳에서 위조엽전(葉錢)을 만들었다고 한다.

뒷골
이 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를말한다.

용마산(龍馬山)
이 마을 뒤에 가장 높은 산으로 검단산(黔丹山)줄기이다. 용마산 정상에서 이 마을로 뻗어 내린 골짜기가 있는데, '장사골'이라고한다. 이 곳에 바위가 있는데, 예전에 어느 장사(壯士)가 바위를 주먹으로 내려쳐서그 바위에는 지금도 주먹 자국이 있다고 한다.

중 골
용마산에서왼쪽으로 내려오는 골짜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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