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곡리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2 조회 : 1060
추곡리楸谷里는 광주시에서 방도2리와 더불어 가장 남단南端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척면 소재지인 노곡리로부터 약 5㎞ 떨어져 있는 산골 마을이다. 400여 년 전 화
전민이 처음 형성하였다고 한다. 태화산泰華山을 등에 지고 있고, 서쪽으로는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정수리와 경계하고 있다. 
‘추곡’이라는 마을 이름은 ‘가래실’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서 판서徐判書라는 사람이 당쟁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 와서 살면서 가래나무추목(楸木)를 많이 심어 ‘가래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훗날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가래나무 ‘추楸’를 써서 추곡리가 된 것이다.

■가래실마을
추곡리의 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이다. 옛날 서 판서가 피난 와서 살면서 집 주위와 마을 곳곳에 가래나무를 많이 심어 가래실[楸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거먹바위
가래실마을 북쪽 500m 지점의 태화산 중턱에 있는 바위다. 바위의 색깔이 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너말
가래실 건너편에 위치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예전에 조趙 선생이라는 훈장이 한학을 가르치던 서당
이 있었다고 한다.
■금성산
터골마을 앞산으로, 태화산의 줄기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광산과 연관이 있어서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금전구덩이
가래실마을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금을 캐던 광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뻔지마을
태화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다섯 집, 즉 댓 집이 살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대화약수大華藥水
태화산에 있는 약수이다. 이 약수는 암석 사이에서 흐르는데, 1325년고려 충숙왕 12경에 일연선사日蓮禪師가 발견했다고 한다. 이 약수를 장군수將軍水라고도 불렀는
데, 이는 약수 중 으뜸이라는 의미이다. 구전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이 약수를 사용했다고 하며, 그 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한
편 철종 때의 좌찬성 김병기金炳冀가 낙향하여 이 약수로 신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그리고 완쾌를 기념해 석벽石壁에 “대화수석大華水石”이라고 음각陰刻해 놓았으며,
대화약수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도독골
가래실마을 위쪽 작은 저수지 뒤에 있는 산을 말한다.
■되짝골
가래실마을 남쪽 500m 지점 광주시와 용인시의 경계에 있는 골짜기이다. 도척면의 유래처럼 ‘되 재고 되 잰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말치고개
추곡리와 용인시 양지면 정수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다. 생김새가 마치 말의 이빨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역골
가래실 동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옛날에 이 일대에 물이 많아서 미역을 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억지스
런 유래를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물이 많았기 때문에 멱을 감던 곳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더 합당할 것 같다.
■부엉이굴
가래실마을 동쪽 500m 지점에 있는 굴이다. 예전에 부엉이가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박골
가래실마을 서쪽에 있는 들판을 말한다.
■소무니고개
터골에서 용인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형세가 소무니여자의 항문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수청골
가래실 마을 북쪽 500m 지점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안터
가래실 안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양바우들
가래실마을 서남쪽에 있는 들판이다. 양쪽에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승백이
가래실의 입구이다. 예전에 장승과 성황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터골마을
예전부터 집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지만 한동안은 집이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들어 전원주택지로 개발되었다.
■호랑바위
거먹바위 옆에 있는 바위이다. 생김새가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습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흥진절 터
안덕선이라는 주지가 길몽을 꾸고 1970년대에 절을 지은 곳이다. 날이 갈수록 번창한다는 뜻에서 탄생한 이름이며, 지금은 10여 평 규모의 작은 암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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