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수에 얽힌 이야기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5 조회 : 2270

사람다운 길은 효성이 근본이요, 효자의 집에서만 충신이 난다.’

어릴 때부터 재주 좋은 신동으로 이름났던 소년은 <효경>을 배우다가 이 대목에 큰 감동을 받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아들로서 홀로 고생하시는 어머니에 대한 효도를 다짐하게 된다. 24녀 중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도 많이 받았지만 교육에만큼은 엄격했던 아버지, 살아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오늘따라 아버지가 몹시 그리워졌다.

사람은 공()에서나 사()에서나 거짓이 없이 정직해야 한다. 거짓을 하긴 쉽고 정직하긴 어렵다. 부모에게 거짓이 없으면 자연 효도가 되고, 임금에게 거짓이 없으면 자연 충신이 된다.”

라며 아들에게 충효를 가르쳐 주신 소년의 아버지는 고려 말 신흥사대부 가문으로 정 6품인 통례문부사를 지낸 분이다. 그러한 부친의 말씀을 새기며 아침부터 밤까지 모친의 옆을 떠나지 않고 공부를 했다. 그것은 모친의 잔심부름까지 때를 잃지 않고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넌 왜 어린애처럼 내 곁에만 붙어 있느냐? 모든 시간을 네 공부에 써도 모자랄텐데 내 시중드는 것이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느냐? 암만해도 내가 빨리 죽든지 머릴 깎고 중이라도 되어야지, 내가 집에 있다가는 네가 공부를 못하겠구나!”

모친은 너무 지극한 아들의 효성이 자칫 아들의 장래에 걸림돌이 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되어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

자식이란 부모에게 늙기까지 어린아이가 아닙니까, 어머니?”

하고 웃으며 안심시키고 모친의 손발이 되었다.

하지만 모친의 이러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의 공부는 천품과 노력의 공으로 날로 대성해 갔다.

고려 충정왕 3(1351)에 경상도 안동에서 출생해 청년 문장으로 자부하게 된 소년은 20세가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당시 성균관은 목은 이색이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등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업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후 공민왕 23(1374)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학문적 이념과 정치적 노선을 거의 같이하는 사우(師友)관계를 유지하였다. 상촌이 장원급제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한 이색은 마침 병상에 누워있어 제자의 집을 가지 못하는 대신 축하의 시를 한 수 지어주었다.

 

세상이 다 놀라는 이런 경사에

축하 못 가는 이 몸의 병이 한이로구나

인생의 모였다 헤졌다 함이

부평초와 물과 같듯이

즐겁고 고달픔을 그만 술잔에 맡기는 세상이어라

아아 내 몸이 언제 쾌차해서

그대와 함께 소요하리오

비바람 소리 쓸쓸한 집에 홀로 누워있네

 

이후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 등 ()과 사()에 거짓없이 정직하라는 부친의 유훈을 실행하며 관직을 역임하던 그가 우왕 초 사간원 정언(正言)의 벼슬에 있을 때의 일이다. 때마침 왕은 왜병과 싸워 이긴 조민수에게 상을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지 말고 받으라는 회교(回敎)의 칙명을 쓰라고 분부하였다. 그러나 상촌은 왕의 이 분부를 단연 거절하고 왕의 상벌에 대한 불명(不明)을 당당히 아뢰었다.

조민수는 경상도를 책임지는 병사로서 김해대전이라는 큰 전쟁에서 왜병에게 대패하여 많은 군사를 잃었으니 그에 대한 견책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밀양 전투에서 조그만 공을 세웠다고 그에 대한 큰 죄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도 염치가 없어서 사양하는데 다시 전하라는 분부의 회교는 신으로서는 쓸 수가 없습니다.”

직언으로 왕을 보필하지만 이로 인해 전라도 여수 돌산으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또 공양왕 때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세자좌보덕(世子左補德)이 되었을 때에도 미신을 장려하는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왕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는 왕의 정치가 간신들의 농간으로 흐려지지 않도록 충언을 아끼지 않던 충직한 신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정치적 소신은 성리학의 의리를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고자한 의지의 실현이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이색과 정몽주를 비롯한 당시 대석학들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을 것이다. 불교 폐단의 대안으로 떠오르던 주자학은 이색 등에 의해 성리학으로 정착되고 상촌 선생이 예기진호집설(禮記陣澔集說)30권을 역서하면서 학문적·사상적 결실이 맺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원나라 진호(陣澔)가 쓴 것을 한자(漢字)로 번역한 것으로, 인간행위의 준칙으로서 예경(禮敬)을 중시하여 개인은 물론 사회와 왕실조차도 예를 모르거나 문란해지면 질서와 조리를 잃고 그 존립기반마저 위태롭다고 생각, 성리학적 예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특히 예를 운영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경()에 기초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예는 왕과 귀족 관료 등 지배층부터 먼저 솔선수범해서 실천해야 하며, 동시에 군왕에게는 경으로써 예를 다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성리학의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당시 그와 교유한 선후배의 석학들도 그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였고, 또한 앞으로 유도를 일으킬 거목으로 보필하였다.

물론 성리학의 이념을 실현시키겠다는 그의 의지는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관직에서 돌아와 모친을 모신 집으로 오면 여전히 한낱 어린애로 돌아갔고 늙으신 모친이 잠들 때까지 옆에서 보살펴드렸다. 성균관에 머문 지 1년이 안되어 편찮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갔다. 병환 중 약시중 드는 일에 온 정성을 다하였지만 돌아가시게 되었고, 그러자 주자가례에 입각하여 장례를 치르고 묘소 곁에 움집을 짓고 시묘살이 3년을 하면서 예를 다했다. 그러는 동안 한번도 집에 간 일이 없으며, 된밥 한 번도 입에 대지 않고 멀건 죽 한 그릇씩을 겨우 조석으로 취할 뿐이었다. 날마다 묘 앞에 엎드려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니 지나가는 자와 나무꾼들도 이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의리와 명분을 평생토록 지켜온 그의 생활철학이었다. 그의 효행이 알려지자 왕이 이를 듣고 가상히 여기시어 효자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를 내리셨다. 또 화공에게 명하여 출거여도(出居廬圖 : 묘에서 여묘(廬墓)하는 모양을 화폭에 담은 그림)를 그리게 하고 이를 <동국상감행실록>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이후 그의 시묘살이를 생각하며 문익점은 다음과 같은인 시를 지어 위문하고 있다.

 

처음에 안동에서 악차에 있는 사람 보았는데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자득해 하더구만

눈 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함인데

거적자리 앞의 꿩이 내린 것은 효열의 열림이지.

 

그러나 당대 유교의 거목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충효의 도리로 실천해오던 상촌에게도 시대의 흐름을 뛰어넘을 방도는 없었다. 스승으로서 평생 삶의 좌표가 되었던 포은 정몽주의 죽음을 전해들은 것이다. 포은은 나이가 상촌보다 15세가 많아 사제지간이면서도 서로 벗으로 예우해 주는 사이였다. 높은 학덕과 정치외교가로서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이성계 일파의 세력들에 맞서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어지러웠던 고려말 정국 안정에 기여하다 문하시중(현 국무총리) 때인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에 항거했지만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는 도중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이는 고려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상촌은 좌상시와 형조판서에 재직하면서 그와 뜻을 같이하였지만 정몽주가 피살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하게 되었다.

상촌이 살았던 당시 고려말 사대부들은 조선왕조의 건국을 둘러싸고 고려의 충신이냐, 아니면 조선의 공신이냐의 전환기에서 그 행보가 갈라졌다. 정몽주 계열의 사람들은 고려 왕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개혁과 중흥을 도모하였고, 이성계 등 정도전 일파는 고려 왕조의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혁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포은의 죽음은 고려왕조를 지킨 충절의 대명사로 남게 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은 신하들은 경기도 개풍군의 두문동으로 들어가 동네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이른바 두문동 72현이라 하여 여기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말이 생기게 되었다. 상촌 선생 또한 그 중 한 분이었다.

고려의 충신들이 마지막 절의를 꺾지 않는 사이 고려는 공양왕을 끝으로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새 정부를 일으킨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 때의 중요한 정계의 인재를 널리 포섭해 자기의 새로운 정권에 협력시키려고 했다. 충청도 관찰사의 벼슬을 했지만 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고 있던 상촌에게도 역시 대사헌을 임명하고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상촌은 예 아닌 말은 듣기도 더러운데 무슨 대꾸를 하냐고 시종 묵살해 버리고 병을 핑계 삼아 자리에 누워 버렸다. 태조는 이러한 상촌의 태도에 크게 노했다.

만일 경이 나의 부름을 끝까지 거역하면 엄벌에 처할테니 다시 한번 생각하라!”

강경한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끝내 거절하였다.

혁성혁명으로 나라를 세운 조선왕조는 이른바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태조 아들간의 왕위 다툼으로 궁궐이 또 한번 피로 얼룩지는 환란을 겪게 된다. 형인 정조를 끌어내리고 태종으로 등극한 다섯째 아들 이방원 또한 상촌에 대한 도덕과 경륜을 인정하고 있었다. 형조판서의 직을 내려 다시 한번 새 왕조의 협력을 강요했다. 더는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상촌은 즉시 아들 근()을 불렀다.

내가 어명을 받았으니 떠나야 되겠다. 벼슬을 받으면 고려를 향한 충절을 저버리는 일이 되고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진퇴양난의 처지가 되었구나. 너는 어서 수의와 흉구(凶具: 장례식에 쓰는 물품)를 챙기거라.”

갑자기 웬 장례물품입니까?”

깜짝 놀란 아들이 되물었다.

내 평생에 충효에 뜻을 두고 스스로 격려하였거늘 지금 태종에게 굴복하면 이것은 의리가 아닌지라 지하에 가서 선왕과 부모를 어찌 대하겠느냐, 드디어 때가 왔구나.”

아들은 만류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의중을 잘 아는 바 눈물을 삼키며 묵묵히 그 뜻을 따라야 했다. 이윽고 상촌은 사당에 들어 조상에게 이별의 예를 올렸다.

이 세상 어디에도 편안히 쉴 곳이 없습니다. 불초 이 몸도 조상님의 뒤를 따르겠사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안동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멀기도 멀지만 다른 평탄한 길이 있음에도 상촌 부자는 굳이 험로인 광주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상촌은 멀리 송악산을 바라보며 한때 포은과 목은과 더불어 오르던 추억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봄바람에 말을 타고 산 구경을 왔건만

말도 느릿느릿 걸으며 숲속에서 졸으려고 하네

개울가의 깊은 숲엔 바위도 없이 그윽만 한데

저편 절벽에는 꽃이 져서 울리는구나

석잔 술에 흥분해서 세상사를 탄식하면

한 곡조 소나무 바람 소리가 옛날 거문고를 울리는구나

아아 아득한 역사가 어제 일과 같아서

충신 열사들이 슬픈 회포를 읊어 마지아니함이라

 

고려의 운명에 한탄하며 한없이 허망한 길을 걸어 광주 추령(秋嶺 : 지금의 태재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상촌은 고갯마루에 서서 산천을 둘러보았다. 더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아들에게 나즈막히 그러나 결연하게 당부하였다.

이 곳은 내가 죽을 땅이다. 여자도 불경이부 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어찌 두 왕을 섬길 수 있으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너는 나를 이곳에 묻되 비석은 세우지 말며 행적을 금석에 새기지도 말아라. 널리 알리게 되면 자손들까지 해를 미치게 되니 그저 초목과 함께 썩어 없어지도록 해야 한다. 내 뜻을 어기면 자손이 아니다.”

그리고는 준비해간 독약을 삼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때는 1413년 태종 13년 향년 63세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던 곳의 눈앞에는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 뒤로는 포은 정몽주의 묘가 있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저 산 너머에 포은(圃隱)의 묘가 있으니 나를 이곳에 묻어주면 지하에 가서 가까이 교의(交誼)하겠다.”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하고 절명시 한 수를 남겼다.

 

-절명사(絶命詞)-

平生忠孝意 평생토록 지킨 충효

(평생충효의)

今日有誰知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금일유수지)

一死吾休恨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만은

(일사오휴한)

九原應有知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구원응유지)

 

아들은 부친의 유언대로 추령에 묘를 쓰고 3년 시묘를 마친 후 비석은 세우지 않았으나 후에 7대손 적의 발의에 따라 신도비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김자수가 생전에 남긴 훈계가 지엄하였음을 반성하고 묘 아래쪽에 묻어두었다. 8대손 김홍욱은 땅에 묻힌 것을 1926년에 발굴하였는데 마모가 심해 채유후가 새로 찬하여 건립하게 되었다. 오포읍 신현리 산 120-1번지에 있는 김자수 선생 묘 아래에는 순절비각과 시비와 함께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땅에 묻었던 마모된 와비가 함께 누워있어 고려말 정치적 혼란기에 선생이 겪었던 안타까운 곡절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상촌이 절명할 당시 포은을 향한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광주 태재에서 영구를 운반하던 소의 발이 땅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소를 재촉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끌어도 보았지만 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한 남자가 영구 앞에서 눈을 감고 합장하며 고인의 넋을 보내주기를 빌며 간청하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 바람이 명정(銘旌: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을 낚아채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명정은 포은의 묘소를 한참 배회하다가 어느 한 곳에 떨어져 반듯하게 펼쳐졌다. 여기에 천광(穿壙 : 시체 묻을 구덩이를 팜)을 하니 그제야 소의 발이 떨어져 장례를 모시게 되었다. 그곳이 상촌 선생의 묘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안동에서 출발할 때부터 이미 자결을 각오한 상촌이 죽어서라도 정몽주와 함께 뜻을 같이하겠다는 의지를 잘 알려주는 일화로 전해온다.

 

김자수(金自<>, 1351~1413,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선생은 학문, 사상, 예론, 정교(政敎)면에서 고려말 성리학적 유교윤리를 확립하였다. 관료로서 기우는 국운을 유교적 개혁으로 붙들어 되돌리고 바로 세우기 위해 온건개혁론자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무엇보다 일관되게 효행을 실천하였으며 새 왕조의 끊임없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충신불사이군의 성리학적 의리를 끝까지 지켜왔다. 죽음으로 지킨 그의 절개는 눈앞의 이익에 쉽게 마음을 옮기는 오늘날 철새같은 이들에게는 깊이 되새겨볼 일이다. 광주의 땅 신현리 그의 묘역에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지조와 절의의 나무가 무성한 잎을 날리며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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