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우물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5 조회 : 2593

수백 년 전의 일이다. 남한산성 북문 안 마을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다. 효자의 이름은 정남이라고 하는데 아버지가 하루하루 품을 팔아 살아가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정남의 나이 열두 살 때 아버지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정남은 자기가 굶는 것은 괜찮지만 병드신 아버지가 굶게 되었으니 소년으로서 품을 팔수도 없고 장사를 할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정남은 쪽박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동냥을 청했다.

에구! 가엾어라. 어린 네가 고생이 많구나. 어린 것이 이렇게 효성이 지극하니 기특하기도 하지.”

마을 사람들은 어린 것이 구걸을 하며 아버지를 봉양하는 것이 보기 딱했지만 자신들도 하루하루 먹고살기 빠듯한 처지에 넉넉히 줄 것도 없어 늘 미안해했다. 그럼에도 동네 제일 어른이신 순돌이 할아버지는 오늘이 정남이 아버지 생신이라는 걸 알고 쌀 한 바가지를 챙겨주셨다.

그 귀한 쌀로 막 밥을 지으려고 할 때였다. 집 앞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걸음을 멈추고 시주를 바라며 서 있었다. 정남은 스님께 시주를 하면 생신이신 아버지께 따뜻한 밥을 못 지어 드린다고 사정을 말한 뒤 물이라도 한 잔 잡수시라고 권했다. 물을 얻어 마신 스님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정남이의 효성에 감복해 보은으로 아버지의 진맥을 봐주겠다고 했다.

얘야, 네 아버지의 병에는 다른 약이 필요 없다. 그저 큼직한 잉어를 구해다가 푹 고아드리면 깨끗하게 나을 것이다.”

그러더니 한참동안 정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입은 옷이 추레했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이며 어딘지 모를 고아함이 흐르고 있었다. 정남에게 뭔가 하려던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스님은 훌쩍 가버리고 말았다.

스님의 이런 심사를 알 바 없는 정남은 잉어가 좋다는 말에 잉어를 구하기 위해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생선 장사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 헤맸지만 때는 마침 겨울이라 생선 장사를 만나지도 못하고 잉어를 잡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아버지께 드릴 잉어를 어떻게 구할까 생각하며 며칠을 헤매던 어느 날이었다. 인가도 없는 산기슭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탈함에 마음은 슬프고 지친 다리도 쉴 겸 우물 옆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느님 제발 잉어 한 마리만 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스르르 잠이 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간절히 기도를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찬 바람소리에 놀라 깨니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고단한 몸을 일으켜 우물가를 지나려고 할 때였다. 우물 속에서 금비늘 찬란한 잉어 한 마리가 힘차게 헤엄치고 있는 것이었다. 정남은 꿈인지 생시인지 볼을 꼬집어보았다. 무진장 아팠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남이 힘들게 잡아 정성껏 고아드린 잉엇국을 먹은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몸이 완전히 나은 아버지가 일을 하려고 집을 막 나서려 할 때였다. 집 앞에 전에 오셨던 스님이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방안에 있던 정남이 뛰어나왔다.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스님이 알려 주신대로 잉어를 고아드리니 이렇게 아버지 병이 싹 나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아니다, 너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니 마음 쓰지 마라.”

집을 나오던 아버지도 큰절을 하며 스님께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스님이 아버지에게 조용히 다가가 무언가 심각하게 말을 건넸다. 듣고 있던 아버지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스님이 돌아가고 일하러 가려던 아버지는 정남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한참 머뭇거리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정남아, 그동안 너로 인해 우리 부부는 늘 행복했단다. 가난해서 끼니걱정으로 하루하루 살아도 너만 생각하면 모든 설움과 근심 걱정은 다 잊을 수 있었단다.”

아버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영문을 모르는 정남이 어리둥절해서 따지듯 물었다.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는데, 아니 사실은 절대로 이런 날이 오지 않길 바랬는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구나. 네 엄마와 나는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단다. 절에 가서 백일기도 하고 삼신할머니께 밤마다 치성을 드렸지만 도무지 아이는 생기지 않아 팔자려니 하고 포기하면 할수록 아이에 대한 미련은 커져가기만 했지.

유난히 추운 어느 겨울 눈발이 날리는 산길을 따라 네 엄마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내려오고 있었어. 조심해서 천천히 내려왔지만 그만 미끄러진 몸이 한참 아래 우물가에까지 데굴데굴 굴러버렸단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에 무언가 꿈틀하고 밟히는 것이 느껴져 내려보니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토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단다. 네 엄마는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토끼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얼른 몸을 피하던 토끼가 그러나 도망가지도 않고 가만히 버티고 있더라는 거야. 자세히 보니 토끼의 품에 하얀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가 있었단다. 펼쳐보니 그 안에는 갓난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었어. 엄마는 자신이 방금 낳은 것처럼 아기를 가슴에 안고 따스한 온기를 나눴단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고 방금까지 엄마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던 토끼도 사라져 버렸어. 어찌할까 고민하던 엄마는 분명 삼신할미가 우리에게 보내주신 아이라 여기며 아기를 품에 안고 다친 몸을 끌다시피 하여 집으로 데려와 키운 것이 바로 지금의 너란다. 가난하지만 애지중지하며 키우다 네 엄마는 네가 다섯 살 무렵에 저 세상으로 가고 애비마저 병이 들어 지금까지 네가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아왔구나.”

혹시 저를 얻었던 그 우물이 제가 잉어를 잡았던 그 우물인가요, 아버지?”

우연인지 그렇구나. 이제 곧 너의 친부모가 너를 찾아올 것이야. 본디 너는 이렇게 초라한 집에 있을 아이가 아니었구나. 양반가문에 태어났으나 열두 살까지 남의 집에서 자라야 목숨을 부지하고 출세할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나 그동안 우리 아이로 살 수 있었던 거란다. 그동안 사실을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 우리도 백일기도로 너를 얻어 설마 이렇게 친부모가 찾을 줄 몰랐구나. 부모 자식의 인연을 하루아침에 끊을 수야 없지만 너의 장래를 위해서도 당장 너를 보내야겠구나.”

며칠 후 정남의 친부모가 왔다. 정남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홀로 계신 아버지를 두고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제 운명이 어떠하든 그동안 저를 친자식으로 생각하고 키워 오신 아버지와 헤어지자니 눈앞이 캄캄합니다. 제발 아버지와 함께 데려가 주세요, 그러면 저도 함께 떠나겠습니다.”

정남이 이렇게 눈물로 간청하였다. 친부모는 비록 신분의 차이는 있으나 길러준 아버지를 버리지 못하는 정남이 기특하기도 하고 정남을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는 것 또한 자신들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남은 친부모집에서 길러주신 아버지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지극한 정남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이야기가 차츰 근처 마을에 퍼졌으며 그 이후 이름 없던 그 산 기슭의 우물을 효자 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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