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청사 우물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5 조회 : 1349

남한산성 산골마을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이집이라 하는데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면서 나이 스물이 되도록 장가를 못가고 있었다. 그의 좋은 품성을 어릴 적부터 보아온 마을 어른들이 이집을 사위 삼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홀로 계신 아버지의 병수발을 떠맡아야하기 때문에 누구도 선뜻 딸을 시집보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어스름한 저녁 무렵 이집은 산에서 해온 나뭇단을 담벼락에 쌓아놓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나이 되도록 장가 못간 설움보다 더 큰 아버지의 병환이 가슴 아파서였다. 별의 별 약을 다 써보아도 효험이 없는지라 근심은 날로 더해만 가고 있었다. 아픈 몸으로 자신을 키워 오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착한 아내를 맞아 아버지 병구완도 해드리고 귀여운 손주 재롱도 보여드리면 좋으련만. 이런 속내를 아는지 아버지는 반찬도 없이 아들이 차려준 밥을 맛있게 먹은 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숲 속의 나무와 새들 이야기를 들려주자 이내 잠들었고 곁에서 아들도 스르르 눈이 감겨 단잠에 들었다.

한참을 단잠에 취해 꼼짝않던 이집은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몸을 일으켰다. 하얀 솜구름을 타고 꼬부라진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신선이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얘야! 내일부터 목욕재계하고 국청사라는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려라. 그러면 반드시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니 그리 알아라.”

그 한마디를 남긴 채 뭐라 답할 시간도 없이 신선은 홀연히 사라졌다. 믿어지진 않지만 예사 꿈이 아닌 것 같아 이집은 신선이 시키는 대로 국청사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렸다.

간절한 바람으로 기도를 드린 지 오십여 일이 지난 어느 날, 바닥이 보이는 쌀독에 한숨만 들어부으며 몇 알의 쌀로 죽을 쑤어 아버지의 아침상을 차려드렸다. 그리고 밭일을 나가려할 때 마을 김진사 댁 머슴인 한돌이가 먼 발치에서 아는 체를 했다.

아침부터 이 산골엔 웬일인가?”

김진사 댁에 잔치나 큰일 있을 때마다 일을 해주고 품삯으로 쌀 몇 되, 고기 한 덩이 받아오는 날은 아버지 보신해 드리는 날이니 오늘이 그날인가보다 싶어 이집은 내심 반가웠다.

어르신이 자네 좀 보자고 하네, 어여 가세.”

이집은 속으로 크게 기뻤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마치 중요한 일을 미루고 가주는 것처럼 느릿느릿 한돌이를 따라나섰다. 한나절을 걸어 도착하니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아침밥도 못 먹은 사정을 아는지 일을 하기도 전에 먼저 밥부터 주시는데 진수성찬이다. 윤기 흐르는 흰 쌀밥에 고기며 생선이며, 이집은 체면이고 부끄러움이고 다 잊어버렸다. 맛도 맛이지만 이리 배불리 먹어보긴 또 얼마만인가 싶어 정신없이 먹어버린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내 일생동안 이렇게 융숭한 대접은 처음인데.’

영문도 모르고 일단 밥부터 먹긴 했지만 배부르고 정신을 차리니 평소와 다른 대접에 은근히 걱정이 될 무렵 드디어 김진사가 입을 떼었다.

자네가 어린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병든 아버지를 모시며 착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내 잘 알고 있네. 그래 아버지 병은 좀 어떠신가?”

,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이사람 저사람 좋다고 하는 약도 다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읍죠, 아주 낫지는 않더라도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받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요.”

아니 그런데 어쩌다가 그 지경이 되었느냐?”

제가 서너 살 무렵인데 아버지가 산에서 칡을 캐고 와서 등이 몹시 가려워 긁었더니 좁쌀만한 뾰루지가 생겼더랍니다. 금방 낫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하루 이틀 지나도 가라앉지 않고 등에 여러 개 더 생기더니 점점 커지더라는 겁니다. 그제서야 어머니가 종기에 좋다는 약을 다 써 보고 의원도 찾아가 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점점 일하기가 힘들어져 어머니가 병간호는 물론 어린 저를 키우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 어머니의 고통은 또 얼마나 컸겠습니까? 어머니는 과로와 굶주림에 병이 나 먼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는 떠나면서 아버지에게는 어린 아들을 잘 키워 달라 하고 어린 아들에게는 아버지 병을 꼭 낫게 해드려야 한다고 다짐을 하며 차마 눈을 감지 못하셨습니다.

아픈 몸으로 아버지는 정성껏 저를 키우셨어요. 어머니를 대신해 저를 키우다 보니 제가 성장하는 만큼 종기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도 느낄 시간이 없었어요. 이제 아버지의 종기는 너무 커져 걷지도 못하고 똑바로 누워있을 수도 없어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모로 누워만 있어야 합니다.”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이집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자 김진사는 마치 친 자식인양 가여운 마음에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

그동안 우리 집 큰일 있을 때마다 성심으로 일하는 것을 유심히 보아왔느니라. 성실하고 착하게 살면서 아버지 병간호 또한 극진히 하고 있다고 들었구나. 이제 너도 아내를 맞아 가정을 꾸려야 할텐데 가난하고 병든 아버지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걸 잘 안다. 내게 과년한 여식이 하나 있다. 너라면 내 여식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이리 어렵게 청하게 되었구나.”

이집은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김진사 댁 아씨와 혼인하라는 얘기임을 알자 정색을 했다.

어르신 가당치도 않는 말씀이옵니다. 저는 가문도 없는 집에서 태어나 배우지도 못하고 철마다 끼니 걱정에 병든 아버지까지 모시고 있는 처지에 귀하신 아씨와 감히 혼인이라니요?”

무엇보다 심성이 고와 내게는 어여쁘고 귀한 자식이나 몸이 좀 불편하여 어느 가문에도 반기질 않는구나. 너를 업신여겨서가 아니라 너의 고운 품성이라면 내 여식을 거두어 주리라 믿어 이리 부탁한다.”

등이 굽은 곱추에 얼굴은 곰보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아씨에게서 어릴 적부터 따뜻하고 고운 품성을 느껴왔지만 감히 욕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집은 자기에게 시집와 아버지와 함께 살겠다는 말에 혼인을 결정하였다. 김진사가 주려던 좋은 집과 값비싼 혼수를 굳이 사양하면서 동네사람들이 비웃거나 놀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난한 집에서 둘은 알콩달콩 살며 이른 새벽 백일기도를 함께 다녔다.

그리하여 어느덧 백일 무렵이 되었다. 그날도 새벽 찬이슬을 맞으며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부부가 무심히 어느 바위를 바라보니 바위틈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부인은 맑은 물을 보자 얼굴을 씻고 싶어 세수를 했다. 이집은 바위틈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려고 샘물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금붕어 한 마리가 있는 것이었다. 하도 신기해서 금붕어가 노는 모양을 한참 들여다보던 부부는 소중히 금붕어를 잡아다 집에서 기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잠이 깬 아버지가 목이 하도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했다. 곤히 자는 아들과 며느리를 깨우기는 미안하고 그렇다고 물을 뜨러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몸이어서 그저 꾹 참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지라 아버지는 금붕어가 들어있는 그릇의 물을 마셔 버렸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었다. 등에 난 종기가 확 터지면서 피고름이 콸콸 쏟아지고 시원해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엉겁결에 아들을 깨웠다.

얘야! 내 등 좀 봐다오. 고름이 흐르는 것 같더니 아픈 것이 싹 가셔 버리는구나.”

어떻게 하셨는데 그래요? 아버지

저 금붕어가 들어 있는 물을 마셨더니 그렇구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깬 며느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이집은 더욱 깜짝 놀랐다. 부인의 얼굴에 그 흉측한 곰보자국이 말끔히 없어져 뽀얗게 고운 얼굴로 변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등에 흐르는 고름을 닦으면서 이집은 생각에 잠겼다. 꿈속에 나타났던 신선의 말대로 백일기도를 한 까닭에 금붕어를 잡게 되었고 그 금붕어를 기른 까닭에 아버지의 병이 낫게 된 것이다.

얘야, 저 그릇에 물이 없으니 집에 있는 물이라도 채워 주려무나

아참, 그래야 되겠군요.”

하고 이집이 부엌으로 나가서 독에 든 물을 떠다가 그릇에 넣으니 금붕어의 색깔이 검어지는 것이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로구나!”

모두는 다시 한번 놀랐다.

얘야 저 금붕어는 어디서 가져 왔느냐? 아마도 금붕어가 있던 물이 영험이 있나보다.”

절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샘에서 잡은 거예요.”

그러면 날이 밝는 대로 그 물을 떠 오너라.”

오랜만에 희색이 만면해진 가족들은 밤이 새도록 기쁨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동이 터오자 집을 나선 부부는 큰 그릇을 가지고 한달음에 샘으로 달려가서 물을 떠왔다. 곧 붕어가 들어있는 그릇을 비운 다음 새로 길어온 물을 채우니 이상하게도 붕어의 빛깔이 다시 황금색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샘물이 영험이 있는 약수로구나, 어디 내 등에 좀 발라봐라.”

이집은 샘물을 아버지의 상처에 발랐다. 그러자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 시원하구나. 어디 한 모금 마셔보자.”

이렇게 해서 이집의 아버지는 병이 완전히 나았다. 더욱 놀라운 일은 부인이 그 물을 마시자 굽었던 등이 꼿꼿하게 펴지는 것이었다.

그 후 이 소문이 꼬리를 물고 널리 퍼지자 각처에서 피부병 환자가 다 몰려들게 되었다. 착한 마음과 지극한 효성에 감복한 이 샘물은 남한산성의 서장대 아래쪽 국청사라는 절 근처에 있어 국청사 우물이라는 이름으로 남한산성의 영험한 우물 중 하나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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