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령과 낙매화터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2 조회 : 1477

  남한산성 곳곳은 아름답고 슬프고 기이한 전설들이 산재한 역사의 혼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 남한산성 서문을 나서서 서쪽 산등성이를 오르면 낙매화터 라고 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에는 기이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600여 년 전의 일이다.

 

한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조선의 도읍지로 과거를 보려는 선비부터 가난한 양반의 후손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 선비집안으로 일찍 부친이 죽고 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임()도령이라는 총각이 있었다.

얘야,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집에 남은 것이라고는 헌 책뿐이구나 네가 과거공부도 해야 하고 장가들 나이도 됐는데 이 어미가 못나서 너를 고생 시키는구나

당장 먹을 끼니가 없는 쌀독을 들여다보며 어머니가 한숨을 지었다. 장성한 아들이 과거공부보다도 끼니걱정까지 해야 한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겨우겨우 삯바느질과 패물 등을 팔아 연명하는 살림을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과거시험을 보더라도 어머니 끼니걱정은 하시지 않도록 하겠어요.”

걱정하는 어머니 앞에서 그런 장담을 했지만 임도령은 눈앞이 캄캄했다. 큰 벼슬은 못해도 양반이라는 체통을 지키고 서당훈장으로 그럭저럭 살아온 부친이 남겨놓은 것이 헌 책밖에 없다니 이럴 때 자신이 아무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처지였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네가 무슨 재주로 끼니를 잇는단 말이냐? 차라리 광주고을에 있는 외가댁엘 다녀오너라. 우리 처지를 잘 아는 외삼촌이 쌀가마나 보내주거든 그걸로 햇곡식이 날 때까지 지내자꾸나.”

어머니 그럼 제가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외가로 떠나겠어요. 이번에는 꼭 과거에 급제해서 어머니께 효도하겠어요.”

임도령은 그래도 이 판국에 양식을 얻으러갈 외가라도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겨울은 겨우 보냈지만 지금부터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어머니의 삯바느질은 더 줄어들 것이 뻔 했다.

이튿날 아침 임도령은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제가 부지런히 다녀올 테니 어머니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런데 어제 밤 꿈에 네 아버지가 나타나서 매화꽃 이 활짝 핀 나뭇가지를 주더라. 아마도 네가 장원급제라도 할양인지 아니면 조상이 보이면 불길하다는데 무슨 암시를 하는 건지 원...”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저도 이제 대장부인 걸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임도령은 부지런히 송파를 지나 광주 남한산 쪽으로 길을 들었다. 이른 봄날이어서 바람이 차가웠지만 도령의 발걸음은 오늘 안으로 남한산을 넘어 갈 요량으로 더욱 발길을 재촉했다. 새벽부터 떠난 길이지만 봄날의 해가 기울어서야 남한산성 서문을 겨우 지나게 되었다. 아침부터 굶고 길을 나선 때문인지 남한산으로 접어들면서 걸음이 더욱 느려지고 지칠 대로 지친 도령은 잠시 쉬어갈 생각으로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큰 산속의 어둠은 평지보다 빨라서 도령이 잠시 쉬는 사이에 금방 산속이 어두워졌다. 쌀쌀한 날씨에 눈앞을 가로 막는 것은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갑자기 먹구름이 일면서 비바람이 몰아쳤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광풍이었다.

이거 큰일 났구나! 어서 민가를 찾아야 할 텐데?”

도령은 당황해서 정신없이 산길을 헤매었다. 빗줄기는 사정없이 얼굴과 온몸을 흠뻑 적시며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퍼부었다. 어서 이 산속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길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헤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비바람 소리인지 여우우는 소리인지 모를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뒤를 쫓는 공포에 무섭고 두려운 나머지 멈춰 섰다.

이일을 어쩌지··· 산속에 집이 있을 리도 없고··· 그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정신을 차리고 쉴 곳을 찾아봐야지······.”

그때였다. 도령은 비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발견했다. 혹시 잘못본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눈을 비비고 다시보아도 반짝이는 불빛은 환각이 아니었다. ‘그래, 저 불빛은 분명 사람 사는 집일거야다급해진 도령은 어느새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혹시 산 도적이나 사는 집이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잠시 어느새 발길은 불빛이 보이는 집 앞에서 멎었다. 깊은 산속과는 어울리지 않는 환한 불빛이 왠지 수상하고 두려워서 도령은 가만히 집안 동정을 살폈다. 조용한 침묵에 쌓인 집, 도령은 무서움을 참고 어서 따듯한 방안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대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불렀다.

주인장 게십니까? 주인장 어른 게십니까?”

도령은 연거푸 주인을 찾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기척도 없이 대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삼단 같은 머리를 길게 땋아 늘이고 그림처럼 고운 얼굴에 미소를 띤 묘령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도령의 머리끝이 쭈뼛했다.

이 깊은 산중에 저런 처녀가 있다니, 혹시 천년 묵은 여우가 둔갑하거나 원한을 지닌 처녀귀신은 아닐까? 어서 도망가야지!’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귀신에 홀린 것처럼 한 발짝도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뉘신데 이 밤중에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한양에 사는 임도령 이라고 합니다. 산에서 길을 잃어서 하룻밤 신세를 질까하고 찾아왔습니다만 어찌 낭자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는 도령을 보고 처녀는 대문을 활짝 열었다.

도령님, 큰일 날 뻔 하셨습니다. 저는 이집에 사는 용녀라고 합니다. 오늘은 밤도 깊고 산속이라 사나운 짐승들도 많으니 저의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십시오. 내일 날이 밝으면 소녀가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처녀는 구슬 구르는 소리처럼 고운 목소리로 도령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기며 들어오기를 권했다. 이미 제 정신을 잃은 도령은 괴이한 마음을 누르며 처녀를 따라 등불이 환한 방안으로 들어섰다. 열두 폭 병풍을 친 방안에는 오색영롱한 자개를 놓은 가구가 그림처럼 놓여있어서 한눈에도 부잣집으로 보였다. 불빛에 비친 용녀는 아름다운 얼굴과 버들잎처럼 가는 허리를 지닌 미인이었다. 도령이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쓸수록 넋을 잃고 온통 용녀에게 쏠리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도령님, 어서 이리로 오십시오. 아무 걱정도 마시고 오늘 밤은 푹 쉬십시오.”

도령은 젖은 몸이 미안해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용녀가 수건을 건네며

비에 온 몸이 젖으셨군요. 제가 저녁상을 차려올 테니 잠시 기다리세요.”

가지런한 치아를 반짝이며 도톰한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말소리로 붉게 홍조 띤 얼굴이 그윽이 도령의 얼굴을 바라봤다. 말로만 듣던 절세가인이었다.

잠시 후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며 주안상을 곁들인 저녁상을 들고 용녀가 도령과 마주앉았다.

도령님, 이미 저와 도령님은 하늘의 옥황상제님의 뜻에 따라 정해진 인연입니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것도 다 이런 인연을 점지해 주신 상제님의 뜻이오니 오늘밤은 저와 이 집에서 함께 주무시고 내일 떠나십시오.”

아름다운 용녀의 옥구슬 같은 말소리에 도령의 긴장감과 고단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용녀는 주전자를 들고 술을 따랐다. 묘한 향기가 도는 술이었다. 용녀가 권하는 대로 몇 잔 마시고 나자 도령의 온몸이 피로가 싹 가시는 듯 가볍고 황홀한 느낌의 취기가 돌았다.

낭자, 고맙소. 남녀가 유별한데 길가는 나를 맞아주고 이런 환대까지 해주니 진정 하늘이 나를 도왔나 보오,”

도령님과 저는 오랜 전생에서는 부부의 연으로 묶인 사이입니다. 오늘밤 저를 만난 것도 전생의 업보로 인연을 잇기 위해서입니다. 어서 저와 함께 자리에 드십시오.”

용녀가 아랫목으로 도령을 끌었다. 그곳에는 비단이불과 원앙금침이 놓여있었다. 도령은 애틋한 분위기에 휩싸여 처녀의 어깨를 안았다. 짜릿한 향내가 온 전신을 감쌌다. 스르르 등불이 꺼지고 도령은 용녀의 옷을 벗기고 매끄러운 알몸을 껴안고 깊은 정을 나눴다. 그 밤이 부족하도록 남녀의 정이 깊어가는 봄날 이었다. 이튿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용녀가 도령이 길을 떠나기를 재촉했다.

낭자,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하였소. 내가 아직 미혼의 몸으로 이미 낭자와 부부의 정분을 나눴으니 이대로 갈수는 없소

아닙니다. 도령님 아직 우리는 부부의 연이 아닙니다. 어서 가시던 길을 가세요.”

낭자는 나에게 은인이며 정인이오. 낭자를 두고 간들 내가 마음이 좋을 리가 없소 내가 사내대장부로 낭자를 두고 이리도 매정하게 가다가는 상사병으로 앓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오. 다만 며칠이라도 묵어가리다.”

도령님 정히 그러시다면 하룻밤만 더 주무시고 사흘째 되는 날은 꼭 길을 떠나십시오. 그런데 낮 동안은 산성안의 암자에라도 가셔서 글공부를 하시던지 독경을 하시던지 이 집을 떠나계시다가 제가 모시러 가면 저하고 다시 오셔야 합니다. 그 약속을 지켜 주실 수 있다면 하루를 더 계시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그 약속을 지키지 못 하시겠으면 지금 길을 떠나십시오.”

내 그 약속을 지키리다. 하룻밤만 더 묵고 꼭 가던 길을 가겠소.”

도령은 용녀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산성에 있는 암자로 갔다. 하루해가 아직 서산 중턱에 걸린 오후 도령은 용녀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와 동시에 용녀가 신신당부하던 궁금증도 꼬리를 치밀었다. ‘무슨 비밀이 있기에 낮 동안을 나와 떨어지려고 하는 걸까? 내가 알면 안 되는 무슨 일이······.’ 이미 용녀에게 혼을 빼앗기다시피 한 도령이었지만 약속을 까맣게 잊고 발길을 돌린 도령은 큰 고개를 넘어 자신이 떠나온 것 같은 지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디에도 용녀가 사는 집은커녕 집터도 없었다. ‘이게 웬 일인가 내가 귀신에 홀렸나?’ 그 순간 갑자기 회오리구름과 함께 도령의 온 몸이 옥죄어들었다.

아악! 사람 살려!”

도령은 안간힘을 다해 소리쳤다. 한순간에 자신의 몸을 커다란 구렁이가 칭칭 감고 있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점점 턱밑까지 죄여오는 구렁이의 압력에 숨이 막혀 도령이 꼼짝없이 죽을 판이었다. 구렁이는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도령을 향해 큰 입을 벌렸다. 그때 어디선가 찬바람이 휙, 하고 불더니 또 다른 구렁이가 도령을 옥죄고 있는 구렁이를 향해 덤벼들었다. 도령을 휘감았던 힘이 풀리고 두 마리의 구렁이가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도령은 정신을 잃었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눈을 뜬 도령을 보며 용녀가 입을 열었다. 어느새 사방이 캄캄한 밤중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요 그런데 낭자의 얼굴이 왜 상처투성이요?”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날이 밝는 대로 떠나십시오. 저는 몸이 아파서 윗방에서 쉬겠습니다.”

서리가 내리듯 차가운 음성이었다. 낮 동안의 끔찍한 사실이 비몽사몽간의 일인 것처럼 도령도 혼곤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튿날 아침 아직 먼동이 트려면 먼 새벽인데 용녀가 도령을 깨웠다.

어서 저의 집을 떠나셔야 합니다. 도령님과 저는 비록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지만 각자 가는 길이 따로 있습니다. 도령님이 잘되셔서 큰 인물이 되도록 제가 이곳에서 빌어드리겠습니다. 다만 되돌아오시게 되면 다시는 저와의 인연이 다하는 줄 아시고 갈 길을 가십시오, 제 말을 꼭 명심하십시오.”

서릿발처럼 냉정하게 말을 마친 용녀는 도령이 무어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정녕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되는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다독이며 도령은 다시 길로 나섰다.

깊은 산속의 서릿발을 밟으며 얼마쯤 갔을까 도령은 다시 걸음을 돌렸다.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데 사내대장부가 정을 나눈 처녀와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머릿속은 이런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몽롱했다. 꿈이라면 분명 무언가에 홀렸을 게 분명했다.

몇 걸음을 옮기던 도령에게 뒤통수를 후려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산이 흔들리고 나무가 벌벌 떠는 큰 쇳소리였다.

임도령! 나는 이 산의 산신령이다. 너는 어찌 가던 길을 되돌리는 고! 네가 이틀 밤을 품고 잔 여인은 인간이 아니라 이 산의 오백년 묵은 암구렁이니라! 어서 뒤 돌아보지 말고 가던 길을 재촉하여라?”

비수로 찌르듯 날카롭게 정수리를 파고드는 쩡쩡한 소리에 놀란 도령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분간이 안 갔다. 그러자 비로소 이틀 밤의 낯선 광경들이 오싹하게 스쳐갔다. 어쩐지 자신의 불덩이처럼 달아 오른 몸과는 달리 용녀의 온 몸이 금방 목욕이라도 하고 나온 사람처럼 차디찼던 게 암구렁이어서 란 말인가 도령의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 한사코 자신을 떠나라고 등 떠민 것도 암자로 보낸 것도 아침 해가 떠오르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미리 내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이 깊은 산중에 집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데 용녀는 분명히 자신과의 연분은 옥황상제의 명에 따르는 인연이라고 하지 않았나?

용녀가 암구렁이라고?’

‘······.’

도령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비록 그렇다 치더라도 뜨겁게 정분을 나눈 용녀와 그 황홀했던 첫날밤이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어제 낮에 자신을 해치려는 구렁이로부터 목숨을 구해준 그 구렁이가 혹시 그 용녀?’ 도령은 용녀의 집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암구렁이 일지라도 자신에게는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초가집은 온 데 간 데 없고 무성한 초목만 그 자리에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넋을 잃고 두리번거리던 도령의 눈이 번쩍 띄었다. 괴괴한 한기가 도는 큰 고목나무 아래 서있는 처녀는 용녀가 분명했다. 머리를 풀어헤친 산발로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령은 아무래도 산신령이 헛소리를 했다고 느끼며 큰 소리로 낭자를 불렀다.

낭자, 내가 돌아 왔소, 아무래도 낭자를 두고 가기는 발걸음이 안······.”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처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령을 향해 돌아섰다.

도령님, 왜 오셨습니까? 산신령의 말대로 저는 오백년 묵은 암구렁이입니다. 옥황상제님의 계시로 제가 오백년이 되는 해에 인간과 인연을 맺으면 저는 허물을 벗고 용으로 승천해 하늘을 오르게 되어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제가 인연을 맺은 도령님과 내세에서는 부부의 연분을 맺는다고 합니다. 저는 용으로 승천하고 내세에서 인간으로 환생하기 위해 이 지상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인간에게 고통을 준 적이 없습니다. 허지만 도령님이 저로 인해 마음의 고통을 받는다면 제가 다시는 인간으로 더구나 도령과의 연분이 이루어 질수 없는 까닭에 도령님께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처녀는 한쪽 눈에서 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도령을 흘겨보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이제 승천을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도령님은 저와의 약속을 어기고 어제는 대낮에 저를 보러 오셨습니다. 그 자리는 원래 제 집이었지만 삼백년을 묵은 숫 구렁이가 저를 탐내고 제 기도를 자신의 승천을 위해 쓰려고 했습니다. 저도 어제의 싸움으로 한쪽 눈이 멀었지만 도령님의 목숨을 구 할 수 있었기에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인간으로 여기고 인연을 맺어준 도령님께 보답을 하겠습니다. 제가 승천하고 난 후에 이곳에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입니다. 후에 그 자리에 꼭 도령님의 묘를 쓰십시오. 먼 훗날 자손 중에서 유명한 장수가 태어날 것입니다. 그 자손은 후대에 이름을 날리는 명장입니다. 다만 어제 죽은 구렁이의 원한이 훗날 어떤 보복을 할지는 저도 모릅니다. 도령님이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용녀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마치자 순식간에 구름이 회오리치며 모여들었다. 용녀는 뒤도 안돌아보고 구름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용녀가 벗어 던진 구렁이 허물도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광채를 띄며 흩어지더니 산토끼도 되고 개구리도 되어서 달아났다.

망연자실 넋을 잃고 하늘을 쳐다보는 도령눈앞이 손가락 같은 용 비늘 세 개가 떨어졌다. 비늘은 땅으로 떨어지자마자 흰 매화꽃을 피운 매화나무로 변하였다.

도령은 기가 막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이 아득했다. 하룻밤 꿈에 홀려서 이승인지 저승인지 분간도 못할 무릉도원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꿈이라면 저 나무는 어떻게······.’ 용녀와의 인연이 한바탕 아름다운 꿈이라고 믿었다. 가난한 자신의 형편을 아는 용녀가 암구렁이의 헌신으로 승천을 해서 복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도령은 그길로 다시 한양을 향해 되돌아섰다.

양식을 구하러간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실 줄 알았던 어머니는 대궐의 궁녀들 옷을 짓는 침방으로 불려가 쌀뒤주에는 오히려 쌀이 넘치는 걸 본 도령은 모든 게 암구렁이 용녀의 은공 같았다. 장가도 들고 어머니를 모시고 오래도록 살면서도 때때로 광주남한산줄기를 바라보며 용녀를 그리워하고 그녀와의 내세에서의 인연을 빌었다.

후에 자신이 죽으면 꼭 남한산의 매화나무 터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가족들은 그 유언대로 임도령의 묘를 남한산 줄기 세 그루의 매화나무가 하늘을 향해 몸을 비틀며 승천하는 모양으로 올라간 자리에 모셨는데 자손 중에서 유명한 장수가 나왔으니 그가 바로 임경업(林慶業)장군이라고 한다.

 

임경업은 숱한 전쟁을 치러낸 영웅이면서도 그를 두려워하는 조선의 군신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시기하고 중상모략 하는 조선조정에 있을 자리가 없었다. 급기야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명나라에 망명 도중에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인조임금의 친국을 받다가 간신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옥졸이 수차례 내리치는 매에 못 이겨 살해되었다. 장군이 죽자 임금은 어찌 그토록 담대한 장수가 죽을 수 있느냐며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역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씌워 장군을 죽인 김자점은 정말로 아들과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삼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후에 임경업 장군은 명장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충주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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