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흔남과 곤룡포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2 조회 : 1355

  병자년,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춥고 길었다. 바람이 찬 공기를 뒤집어쓰고 울부짖었고, 하늘은 여드레 굶은 시어미 상을 하고 주창 심술을 부렸다. 날씨만큼이나 맹렬하게 청병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청천강을 건너자 인조 대왕은 강화를 향하여 피난길에 올랐다. 보따리를 들고 뒤를 따르던 백성들의 발등 위로 눈이 덮히기 시작했다. 신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누더기 쌈이라 할 만큼 겹겹 싸맨 발은 걸을 때마다 눈을 보태 다리를 더없이 무겁게 했다. 갈기를 세운 바람은 행렬을 향해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그때 기수들을 헤치고 신하가 급히 비보를 전해왔다.

전하, 적장의 선봉들이 이미 양천 강을 건너 강화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신하의 전갈에 임금의 얼굴은 금세 창백해졌다. 얼굴은 눈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기로 젖어 있었다. 임금은 아무 말이 없었다.

경각을 다투는 일이옵니다. 전하, 속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셔야 할 듯 하옵니다.”

임금의 명도 떨어지기 전에 이미 신하들은 방향을 틀고 있었다. 어가를 책임질 일부 대원들만 남기고 선발대는 먼저 가서 임금을 맞을 채비를 하기 위해 앞서 말을 달렸다. 뒤를 따르던 백성들은 강화가 아닌, 남한산성이라는 말에 사태가 심각해졌음을 직감했는지 각기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가 행렬이 남한산성으로 가기 위해 을지로 동편 수구문(, 광희문)을 빠져나갈 때쯤 대열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도성근처까지 적이 쳐들어 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자 일부 신하들은 충절이니 도리니 생각할 겨를 없이 어가를 그대로 두고 줄행랑을 쳤다. 기수들은 기를 던져버리고 달아났고, 말을 타던 신하는 말을 탄 채로 도주하기도 했다. 어가 행렬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임금 곁엔 단 몇 명의 신하들만 남게 되었다.

 

한강은 벌써 단단히 얼어 있었다. 수심의 차이에 따라 얼음의 두께가 달라 어느 길로 가야 안전할 지 알 수 없었다. 뚝섬 강가에는 나룻배 한 척만이 덩그마니 놓여 있을 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누구 없느냐?”

신하 한 사람이 다급한 듯 큰 목청으로 소릴 질렀다. 얼음길을 안내하는 사공이 있다고 들은 터라 소리쳐 불러 보았으나 신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강 위에서 허공만 맴돌다 이내 사라질 뿐이었다. 신하들은 하는 수 없이 임금을 모시고 얼음길을 건너기로 했다. 말을 타고 강을 건너려 하자 말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헛발질만 할 뿐 걸음을 떼지 못했다. 강으로 들어선 말도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지더니 일어서질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걸어서 강을 건너야만 했다.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지기를 수차례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 강 건너 송파나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송파에서 남한산성까지의 거리는 멀고 가파렀다.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려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하기만 했다. 언 강을 건너느라 긴장을 해서 다리는 휘청거렸고 힘을 다 써서인지 몸도 기진맥진했다. 송파를 지나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임금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비탄에 찬 모습은 그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아 보였다. 신하들도 비통해하며 뜨거운 눈물을 찍어 냈다. 청병은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가파른 서쪽으로는 보병으로, 물이 닿는 북동쪽으로는 기병으로 점점 좁혀 들어왔다. 사태는 너무나도 급박해지고 있었다.

전하, 제 등에 업히시옵소서.”

임금이 좀처럼 걸음을 진행시키지 못하자 신하가 등을 들이댔다. 임금이 둔하게 입을 열었다.

경들이 과인 때문에 고생이 많으오.”

임금의 표정은 더없이 침통했다. 임금은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앉기를 거듭했다. 서쪽으로 남한산성을 오르는 길은 너무도 험한데다 눈까지 내려 일행은 산에서 그만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어스름 속에서 바람만이 이들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듯 깊은 골을 휘돌아 흉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서흔남의 도끼날에 나무들은 쩍쩍 갈라지며 여지없이 제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내였지만 힘으로 하는 일 만큼은 근방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남한산을 오르내리며 잔뼈가 굵은 터라 산을 오르는 일이란 눈이 쌓인 길이라 할지라도 여반장이었다. 그날도 해가 중천에 뜰 무렵까지 장작을 패서 쌓아 놓고 나무 짐을 져 내리기 위해 산에 올랐다. 그간 여기저기 나무를 해서 묶음으로 쌓아두었던 것을 실어 나르는 일이었으므로 어둑해져서야 세 번 째 짐을 지고 내려올 수 있었다. 제 키보다 갑절이나 높은 나무 짐을 지고 내려오는데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 위에 지친 듯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춥고 어둔 시간에 웬 사람들이랴?”
범상치 않은 옷차림을 보고 흔남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뉘시우?”

나무 짐을 진 채로 서서 일행을 행해 물었다.

상감마마 행차시다.”

신하들이 힘없이 목소리를 깔았다. 흔남은 그 말이 얼른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상감마마라는 말도 낯선데다가 설령 그 말을 알아들었다 해도 이 저녁에 이런 곳에 상감마마가 계시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렇게 눈 쌓인 곳에서 뭣들 한대요?”

무엄하구나. 상감마마라고 하질 않더냐. 짐을 내려놓고 엎드리거라.”

신하가 애써 위엄을 갖추고 호통을 치자 그제야 나무 짐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한 발짝 성큼 다가서며

왜 여기들 계셔요?”

하고 다시 물었다. 기가 막힌 신하는 위엄을 갖추어 다시 말을 했다.

지금 국난을 당하시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시는 중이신데 귀한 옥체가 추위와 피로에 지치셔서 잠시 쉬는 중이시다.”

일루 가면 안 되는데……. 일루가면 길을 잃어버려요

흔남은 나라님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리고 어찌해야 하는지 멍하니 서 있다가 한 마디 건넸다.

거기까지 지가 업어다 드릴까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덥석 임금 앞에 등을 들이댔다. 신하들은 내심 반가우면서도 사내가 하는 짓이 하도 무례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당황하고 있었다.

이 까짓 건 식은 죽 먹기죠. 하루에 서너 번은 오르내리 거든요.”

일행을 향해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나막신을 거꾸로 신고 다짜고짜 임금을 업더니 성큼성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발을 옮길 때마다 곤룡포의 비단옷자락이 기분 좋게 바스락 거렸다.

왜 신을 거꾸로 신느냐? 불편하지 않느냐?”

적이 쳐들어 온다면서요. 그리 되면 우리가 올라간 걸 알거 아녀요?”

우둔한 사내인줄만 알던 왕 일행은 그의 지혜로운 행동에 내심 안심하게 되었다.

 

남한산성 서문 밖 널무니에서 태어난 사노(私奴)출신이었던 흔남은 기와 잇기와 대장장이로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나가는 입장이었는데 나무장사를 해서 식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밥만 많이 먹고 살면 팔자는 고만인 겨.”

입버릇처럼 되뇌는데다 부지런해서 겉보리일망정 크게 배곯는 일은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제 권속들 배곯지 않으면 그게 삶의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아주 순박한 사내였다. 나라가 어찌되든 별 관심이 없는지라 곧 청병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그 것이 어느 정도의 위기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우둔한 백성이기도 했다. 다만 산 속에서 길을 잃은 높으신 분들을 도와야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이 그로 하여금 산길을 오르게 한 것이다.

나리들도 힘드시죠? 하지만 제 몸이 하나니 어쩌겠어요. 그냥 따라와 보셔요. 근데 이쪽으로 가면 서문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그건 염려 말거라.”

신하들은 앞서서 서문 쪽으로 흔남을 안내했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친 신하들은 흔남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으므로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다.

산성에 도착했을 때 웬 남루한 차림의 사내 등에 엎여 올라오는 임금을 보자 먼저 도착한 신하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 곳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자신을 기다릴 권속들과 산 아래 두고 온 나무 짐이 걸려 흔남은 손살 같이 산을 내려왔다. 흔남의 쿵쿵거리는 발짝 소리에 놀라 눈 무더기들이 나무 가지에서 뭉청뭉청 떨어져 내렸다.

 

성벽의 아침은 어제와 사뭇 다르게 찬란히 깨어났다. 임금은 편전을 마련하고 흔남을 불러 들였다.

어서 오너라 그대가 아니었다면 과인이 큰 고생을 할 뻔했구나, 어두운데 잘 내려갔느냐?”

, 나리

그때 신하가 무례하다고 눈총을 주며 흔남을 쿡 찔렀다.

나리가 아니라 전하다, 전하라 아뢰어라.”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흔남은 고개를 조아리고 연신 굽실거리며

소인은 저 아래 산기슭 동네에 사는 서 흔남이굽쇼, 기와를 올리고, 장사도 하면서 먹고사는 나무꾼입니다요

임금이 편전에 앉아 흔남을 굽어 볼 때 아침햇살은 이 나라의 슬픔과는 무관하게 임금에게로 내리비쳐 곤룡포에 새겨진 금빛 문양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밤에 본 것과 다르게 말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져 흔남은 잔뜩 주눅이 들었다. 생전에 처음 본 의상인데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그대의 공이 커서 무엇인가 보답을 하고 싶은데, 그대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해 보거라.”

임금의 말에 흔남은 한참이나 눈을 끔뻑이며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나 그 맛을 안다고 부귀영화나 권력 같은 건 꿈도 못 꿔본 순박한 사내인지라 무엇을 원해야 할지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

쌀을 구할까? 옷을 구할까. 아니면 집을 구할까? 생각해보았지만 우둔한 머리는 순간 터질듯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때 임금이 입고 있는 곤룡포의 용들이 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승천이라도 하듯 휘황찬란한 게 눈에 띄었다. 흔남의 눈엔 그게 꽤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데

어려워하지 말고 네 소원을 말해 보거라 뭐 궁색한 것이 있더냐?”

, 저 다름이 아니옵고 나리님이 입고계시는 그 옷이 근사해보입니다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신하들이 흔남의 무례함에 깜짝 놀라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입을 쩍 벌리며 흔남과 임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런, 저런 무엄한 놈이 있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망극하옵니다. 전하

신하들은 놀란 듯이 대신 엎드려 흔남의 무례함을 빌었다.

놔 두거라. 순박함이 좋지 않느냐. 그래, 과인이 입은 이 옷이 입고 싶단 말이냐?”

임금은 곧 신하를 시켜 입던 곤룡포 한 벌을 가져오라고 해서 서흔남에게 하사하였다.

흔남은 생전처음 본 화려한 옷에 그만 황홀해 하며 그 옷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마을로 내려왔다. 집으로 내려온 그는 호사스러운 옷을 권속들 앞에 늘어놓고 한참 자랑을 늘어놓다가 혼자 입어보고 씩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소문은 근방 마을로 퍼져 곤룡포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흔남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시국은 어지러웠어도 청병이 아직은 이곳 남한산성까지 침입하지 않은지라 순박함을 지닌 백성들은 그럭저럭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글쎄 나라님이 입으시던 옷이랴. 엄청난걸, 흔남이는 좋겄어.”

! 그래도 저 옷 보담 벼슬자리가 낫지. 왜 베슬자리 하나 달라고 하지 그랬어. 나 같으면 이참에 베슬 한 번 해 볼 텐데…….”

알어야 면장을 하지, 벼슬은 아무나 하남?” 그나저나 난리가 나서 큰일이여.”

소문을 들은 마을사람들은 입방아를 찧으며 부러운 듯 시샘 속에 간간 흔남의 집을 드나들었다. 흔남은 자기 잣대로 사람을 평가해서 인심을 잃은 사람에게는 보여주지도 않았다.

아주 귀하게 무명보자기로 몇 겹을 싸서 반닫이 안쪽에다 깊이 넣어두고 아침마다 꺼내어 절을 하고야 일을 나갔다. 마을사람들은 바보 같다며 키득거렸지만 곤룡포를 섬기는 태도가 하도 진지하고 숙연해서 나중엔 마을 사람들도 예를 갖추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서흔남에게는 곤룡포가 나라님이자 곧 나라였다. 그 날 이후로 흔남은 임금이 있는 남한산성을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우매해보였지만 속으론 나름대로의 지혜도 있고, 또 뚝심으로 치자면 그를 따를 자가 없어 산성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겹겹이 포위당해 성 안팎의 소식을 밖으로 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청하여 한지로 쓴 왕의 유지를 노끈으로 꼬아 옷을 얽어매고 누더기를 걸치고 거지행세를 하면서 성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의 변장술은 나라를 위한 충성심에서 나온 나름대로의 지혜였다. 아무도 그를 적의 동태를 살피는 사람으로 여기지 못할 정도로 거지 행세를 훌륭히 해냈다. 삼남(三南)지방과 강원도 여러 장수들에게 전령을 전하거나 적의 동태를 탐지, 적정을 보고하여 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천인신분을 면제해 주었고, 병자호란이 수습단계에 이르자 그에게 정3품 가의대부(嘉義大夫) 품계를 내렸다. 하지만 그의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그 이상의 직책은 얻을 수가 없었다 한다.

 

세월이 살 같이 흘러 청에 대한 패배의 대가를 톡톡히 치루는 가운데 흔남도 어느새 노년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나이 들어 병이 들자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이 옷을 나와 함께 묻어 다우.”

평생 벼슬이라곤 꿈도 꿀 수 없었던 서흔남은 한 때 임금과의 인연으로 평생을 두고 나라님을 모시는 신하로서 충성을 바치다 병자호란이 끝난 30년 후 세상을 떠났다.

자식들은 그의 아비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체와 곤룡포를 함께 산성 서남쪽에 있는 검복리 병풍산에 묻었다. 그 후로 병풍산에 눈이 내릴 때면 바람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는 마치 업혀유. 업혀유.” 하는 것처럼 들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 후부터 대소 관료들이 그의 묘 앞을 지날 때에는 임금의 곤룡포를 존중하는 뜻에서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고 걸어서 그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그의 묘표와 공적 비에 의하면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자손들이 후에 화장을 해서 묘역은 사라지고 묘비만 남한산성 내 지수당 앞으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묘비의 위쪽은 깨어져 없어지고, 남은 묘비도 활자조차 자세히 알기 힘들 정도로 퇴색됐지만 사람 냄새 진하게 풍기다 간 그의 일화는 병자호란이라는 아픈 역사 속에서도 인간사의 아름다운 일면을 발견할 수 있는 귀한 자료로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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