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 공민왕과 국정포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2 조회 : 1238

홍건적이 쳐 들어왔다.”

그 오랑캐 놈들은 성질이 포악해서 사람을 개돼지처럼 죽인다면서?”

나라왕도 그놈들을 피해 멀리 도망을 갔다네.”

어서 우리도 피난을 가던지 투항이라도 해서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된다고 하더라.”

달리는 말위에서 왕은 백성들의 민심을 보았다. 고려가 신흥세력 집단인 홍건적으로 인하여 급기야는 공민왕도 군신과 왕족들을 이끌고 군사들과 더불어 먼 피난길에 든 지 벌써 열흘째 왕이 머무는 곳마다 민심은 불안에 떨며 왕의 피난길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 이대로 나라를 오랑캐 놈들이 짓밟게 할 수는 없어, 꼭 저 놈들을 고려에서 몰아내고 선조들이 물려준 왕조를 굳건히 할테야

이를 갈며 분해할수록 궁중대신들이 원나라와의 화친을 계기로 제 권력유지를 위해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환궁하면 대대로 물려오는 권신들의 세력을 끊을 제도를 마련하리라온갖 구상을 하는 왕은 고려 충숙왕의 아들로 충민왕이 폐위된 후 31대 왕으로 왕위에 오른 공민왕이었다.

고려와 원나라의 화친 정책으로 인해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조국을 떠나 어려서부터 이국에서 성장한 왕에게 원의 사사건건 지속되는 외교 간섭은 고려의 자주적인 힘을 무시하는 간섭이었다.

공민왕은 누구보다 영민했다. 원나라의 속국으로 나라를 끌어가기는 젊고 혈기왕성한 그의 기개가 참을 수 없었다. 왕은 원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는 왕비가 원나라의 황족인 노국대장공주였다. 그곳에 정략적으로 끌려가 맺어진 결혼이었지만 왕은 아름다운 노국공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영리한 왕비가 공민왕의 골수에 가득찬 복수와 애국심을 모를 리 없었다. 오히려 걸림돌은 원나라의 속국으로 자처하며 세력기반을 넓힌 고려의 토호세력들이었다. 개혁정책을 펴는 공민왕이 언제든지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들로 가득 찬 조정의 신하들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하는 원나라왕실을 바로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원나라의 폭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거칠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죽기 살기로 원나라 조정과 지배층을 공격하며 만주에 새로운 나라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했다. 붉은 띠를 두른 그들은 사납기 짝이 없어서 홍건적으로 불렸다. 그 홍건적들이 쫒기면서 고려를 침략한건 고려보다도 원나라를 떠받드는 조정대신들의 타락한 정치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대신들은 왕의 피난길을 재촉했다. 멀리 안동으로 갈 생각이었다. 경안을 거쳐 험준한 산들이 둘러싼 이곳까지 온 길이다. 왕도 신하도 말도 좇기는 길은 피곤했다. 이런 저런 서글픈 생각에 잠겨있던 왕이 말머리를 멈췄다.

이곳이 어디냐?”

전하, 잠시 쉬어 가십시오. 이곳은 광주의 원적산 아래 마을입니다. 산이 높고 길이 험해 홍건적도 이곳까지는 오지 못할 것입니다.”

곁의 신하가 왕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따르는 일행에게 신호를 보냈다. 왕도 신하도 홍건적이 어디까지 쳐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목적지인 안동을 향해 가는 피난행렬이 첩첩산골로 접어들었다. 힘들고 괴로운 피난길을 단 하루라도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왕이 말에서 내렸다.

전하 바라보이는 저 높은 산 넘어가 이천 땅 이옵니다. 적들이 이곳은 쉽사리 찾지 못할 곳이옵니다. 여기서 쉬어갈까 합니다.”

그대들이 알아서 하시오.”

, 전하

왕의 대답을 들은 군사와 대신들은 깊고 깊은 산골마을에 피난 짐을 내렸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마을을 지나 좀 더 깊은 산골로 들어온 것도 개경을 떠나 오백여리 피난길을 내려오면서 지친 심신을 며칠이라도 쉬어갈 의도로 택한 결정이었다.

태후와 왕비도 왕의 행렬이 동참하고 있던 터라 피난길은 더디고 느렸다. 그래도 적들을 피해 무사히 목적지인 안동 땅 까지만 가기만 하면 풍전등화와 같은 고려의 운명이 적들에게 유린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물을 좀 떠오너라. 목이 마르구나,”

, 전하

군사 하나가 언덕 아래 버드나무가 늘어진 우물가에서 한 바가지 떠온 물을 올렸다. 벌컥벌컥 마시는 차가운 냉수가 왕의 온몸으로 흘러들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달고 시원한 샘물이었다. 새로운 기운을 샘솟게 하듯 뼈 속부터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 물이 감로수처럼 시원하고 달고나!”

왕의 감탄에 공주와 태후도 냉수를 마셨다. 목이 말랐던 신하들과 군사들도 모두 바가지에 떠온 물로 목을 축였다. 군사들도 시원한 물이 온 몸의 피로를 가시게 하는지 새로운 기운들이 역력했다.

왕비, 이렇게 시원한 물은 처음 먹어 보는구려 온몸의 피로가 싹 가시는 샘물이오, 이 나라 산천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푸른데 내가 힘이 없어서 선왕들이 물려준 내 나라를 홍건적들이 짓밟는 구려.”

전하, 크게 상심 마옵소서.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 버티고 있는 한 곧 개경으로 환도하실 겁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아서 괴롭기 한이 없소.”

전하, 힘을 내셔야 합니다. 이 나라는 전하의 나라이며 만백성의 나라입니다. 당분간 이곳에서 쉬시면서 대책을 세우십시오.”

고맙소. 왕비, 그대가 곁에 있는 한 무엇이 두렵겠소.”

전하는 지금 수많은 백성들의 어버이 이십니다. 오직 주군의 길을 가셔야 합니다. 죄 없는 백성들이 전하만 믿고 의지하고 있사옵니다.”

내 어찌 선대의 종묘사직에 한을 남기리오. 나를 위해 백성들을 위해 힘을 내리다. 이 마을에서 잠시 쉬면서 다시 개경으로 환도할 힘을 길러야겠소.”

왕의 용안에 결연한 각오가 새롭게 일렁였다. 사랑하는 왕비 노국공주는 원나라의 공주이지만 고려의 왕비였다. 친정인 원나라를 떠나서 고려국의 왕비로 궁궐에서는 수많은 시녀들의 보호를 받았으나 피난길에서 많이 수척했다. 그러나 항상 따듯하고 품위 있는 행동으로 늘 왕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다.

이곳에서 당분간 머물도록 하라, 우리가 머무는 이 마을에는 되도록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

왕이 명령을 내렸다.

전하의 분부대로 이곳에서 쉬어 갈 것이니 호위 군사들은 주변을 정리하고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선두에서 지휘하는 장수의 말에 수백 명의 군사들이 임시로 거처할 장소를 다듬었다. 장막을 치고 허기진 말에게 풀을 먹이며 가마솥을 걸었다.

이 마을 가난한 산골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짓던 마을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왕 앞에 엎드렸다. 그들은 만백성의 어버이라고 우러러 받드는 왕과 왕비를 차마 노숙하도록 둘 수가 없었다. 제법 넓은 민가로 받들어 모셨다. 수척한 공주의 얼굴이 환해졌다. ‘반드시 이 마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수 있는 힘을 왕에게 북돋아 주리라굳게 마음먹었다.

전하, 곤드레 나물로 쑨 죽 이온데 드셔보소서.”

오냐, 군사들과 말들에게도 넉넉히 먹이도록 하여라.”

시녀가 쑤어온 달큼한 나물죽이 왕과 왕비의 입맛을 돋웠다.

그날 이후 왕 일행이 묶고 있는 마을에서 끼니 때가되면 불을 때는 연기가 산을 넘어 이웃 마을까지 보였다. 주변의 마을에서 농민들이 좁쌀이며 보리쌀 감자 등을 가져왔다. 수리취, 고비, 삽취, 두릅이며 아낙들이 뜯어온 나물도 군막에 수북하게 쌓였다. 큰 가마솥에 끓이는 나물죽일망정 모든 군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이곳을 피난처로 삼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병풍처럼 둘러친 원적산의 깎아지른 듯 높고 험준한 산세, 기암절벽으로 이어진 능선과 수십 갈래로 뻗어나간 산골짜기는 나물도 많았고 산 짐승들이 우글거렸다. 군사들은 정상에 축대를 쌓아 망을 보며 천혜의 요새로 손색이 없는 산기슭에서 덫을 놓아 산토끼를 잡거나 함정을 파고 더러 산돼지를 잡아오는 날도 있었다. 피난 터로 더없이 좋은 곳이었지만 어서 개경으로 환도해야 할 국가의 존망이 걸린 나날이 속절없이 흘렀다.

왕은 공주와 산골짜기에 있는 암자를 찾았다. 불교를 국교로 믿는 나라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면 사찰을 찾아 불공을 드리고 치성을 올리는 일이 왕족을 비롯하여 일반 백성들에게도 다반사였다. 왕이 부처님 앞에 엎드려 불공을 드렸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저를 가엾이 여기시고 고려의 국운을 융성하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의 불력으로 이 나라가 부강하고 힘센 나라가 되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왕과 공주가 올리는 간절한 바람처럼 홍건적이 물러가고 개경으로 환궁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불사였다. 그 염원이 둥, , , , 북소리를 타고 메아리처럼 원적산을 넘어갔다.

왕의 피난길이 지체되면서 한편에서는 무기를 만들었다. 마을은 천연적인 요새처럼 들어앉아 적병도 쉽사리 침범을 할 수없는 심심산골이었다. 집집마다 장작이며 쇠붙이를 내오거나 거둬들였다.

오랑캐 놈들이 개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지요?”

어디 개경뿐이겠어요 그놈들은 남자를 붙잡으면 사지를 찢어죽이고 아이들은 삶아먹고 여자들은 무조건 겁탈한답니다.”

우리라고 당 하고 살수만은 없지요 그래도 왕이 이곳에 계시니 이천이나 경안까지 가서라도 쇠붙이를 모아와야지요.”

순박한 농민들이었지만 나라를 잃는 슬픔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지게를 지고 이웃마을이나 멀리 장터까지 다니며 쇠붙이를 구해왔다. 화덕을 세우고 무기를 만들었다. 쇠붙이를 녹이는 화덕에 풀무질을 하는 군사가 있으면 대장장이가 쇠를 두드렸다. 창을 만들고 칼을 벼렸다. 군사들과 백성들이 나라를 위한 한마음으로 뭉쳤다.

전하, 이제 어느 정도 군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어서 회군을 하셔서 나라 일을 돌보심이 가한 줄 아뢰옵니다.”

오냐, 국가의 존망이 내 손에 달렸다. 내일이라도 회군할 차비를 갖춰라.”

공민왕이 마을을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백성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엎드려 울면서 왕의 발길이 어서 나라를 구하기를 빌었다.

내가 우연히 들렀던 이 마을에서 큰 힘을 얻었다. 개경을 수복하고 꼭 다시 찾아오리라.”

원적산을 뒤로하고 묘약처럼 발길을 묶었던 신비한 우물을 두고 마침내 기력을 회복한 군사들과 신하들을 이끌고 왕은 마을을 떠났다.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한 왕의 발길은 원적산이 멀어질수록 흔들렸다. 왕이 가는 곳마다 홍건적의 횡포를 풍문으로 듣거나 체험한 백성들의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았다. ‘오냐, 꼭 이 원수를 갚을 날이 올 것이다.’ 나라가 없으면 군왕도 존재할 수가 없는 법이다. 왕은 군신 중에 정세운을 총대장으로 세운 후 오랑캐를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의 명령을 따르라, 모조리 적병을 베어 없애고 빼앗긴 땅을 되찾아야 한다. 명령을 배반하는 자는 가차 없이 목을 벨 것이다!”

불호령을 내리는 대장의 뒤를 수많은 군사들이 따랐다. 나라를 홍건적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장수들이 선봉장으로 나서서 적들을 무찔렀다. 개경이 수복되고 홍건적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쫓겨 갔다.

 

그 뒤 왕 일행이 떠난 후에도 오래도록 원적산 아래 암자에서는 인근백성들이 나라와 왕의 안위를 위한 징소리 북소리가 끝이질 않았다.

왕이 피난길에서 마시던 우물을 온 마을 사람들이 황송해하며 퍼다 먹었다. 임금의 우물이라고 국정포 어정(國井浦 御井)으로 부르며 받들었다.

공민왕이 다시 찾아오겠다며 오르던 산봉우리를 공민봉 이라고 부르며 기다리는 세월이 흘렀다. 공민왕의 애환이 깃든 터 마다 풀무개, 능골, 어정, 등 어울리는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왕은 돌아올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던 노국공주가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절망에 빠진 왕은 국가의 모든 일을 산돈에게 맡겼다. 신돈은 왕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며 고려를 서서히 파멸의 길로 끌고 갔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환영 때문에 해괴한 병에 걸린 것이다. 국가의 대부로 추앙하며 믿었던 신돈의 배신과 타락하는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없었다. 왕은 끝내 대신들의 자제들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다. 공민왕 재위 23년 이였다. 오백년 고려의 왕조가 서서히 몰락해 가는 국운을 견딜힘도 새 국가를 세우려는 야심에 찬 이성계를 견제할 어떤 인물도 없었다.

 

이 마을에 고려의 충신 한사람이 묻혀있다. 저물어가는 고려의 국운을 쥔 이성계가 고려를 없애고 새 나라 조선의 태조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때 광주 깊은 산골짝으로 다 헤진 누더기 옷을 걸친 부부가 찾아들었다. 첩첩 산중이었다. 그 사람은 고려 말 공민왕 밑에서 직제학까지 벼슬을 한 김약시라는 사람이었다. 겨우 몸을 가릴 초막을 짓고 은거에 들어갔다.

그 사람의 형제들은 이미 새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정의 신하가 된 후였다. 새 임금인 이성계가 그의 인물됨을 아까워해 친히 어서를 띄웠다. 관직을 수여하고 벼슬을 내리니 조정에 나와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내용이었다.

한 하늘아래 어찌 두 임금을 섬기리오. 이곳에서 땅이나 파고 죽는 날까지 살겠소. 나는 고려의 신하며 백성이오. 어서 돌아가시오.”

김약시는 조선임금의 친서를 들고 온 사람을 돌려보냈다. 그 후 태조인 이성계는 몇 번이고 강력하게 그를 불렀으나 그는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내가 죽거든 저 공민봉아래 묻어주시오

그의 유언처럼 그는 죽어서 공민봉아래 묻혔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조선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이조판서라는 벼슬을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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