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장대 설화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2 조회 : 1596

   인조대왕은 아무래도 마음이 허했다. 전 임금 광해군을 몰아내고 등극한지 2년이 되었지만 언제 또 역심을 품고 이괄처럼 자신에게 칼날을 겨누는 신하가 나타날지 불안했다. 그보다도 호시탐탐 북방을 넘어와 괴롭히는 청나라군대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인다는 보고가 수시로 올라왔다. 신하들이 남한산성을 튼튼히 개축해야 한다고 한 말에 일리가 있었다.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 병사들을 막기 위해 성을 구축하고 난 후 남한산성은 매우 중요한 국난의 요새였다. 선조임금이 산성 여러 곳을 고쳤으나 드넓은 성곽을 튼튼하게 축조하자는 의견이 분분했다. 인조임금은 도성을 지키는 관문으로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두고 이서를 수어사로 임명했다.

그대들의 말처럼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유사시에 종묘사직을 보전하는 행궁 처로 삼을 것이다. 마땅한 적임자를 추천해 올려라

어전회의가 열렸고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들은 머리를 맞댔다.

전하, 청원군 심기원으로 산성의 개축을 총 지휘하는 책임을 맡기시는 게 마땅할 줄 압니다.”

심기원은 각 지역 절에 있는 승려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부모상을 당하여 성 개축하는 일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후임으로 여러 지방의 성을 보수한 경력이 있는 공조판서 이서(李曙)에게 남한산성 개축을 맡기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임금은 그를 총융사로 삼아 전란에 대비하는 튼튼한 성을 다시 쌓으라는 왕명을 내렸다. 16249월이었다. 이서에게 광주유수로 종2품관의 높은 벼슬이 주어졌다.

주어진 기한 내에 성을 쌓기 위해 북쪽은 벽암대사에게 맡기고 남쪽은 이서가 믿고 신뢰하는 부하 이회에게 맡겼다. 벽암대사는 전국의 사찰에서 승려들을 모집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기한 내에 성을 쌓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벽암은 날마다 공사장으로 나와 승려들을 독려를 했다. 주어진 3년 안에 백 여리를 잇는 성을 쌓으려면 궂은 날씨라도 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성은 주춧돌만 남아있는 곳이 허다했다. 밤낮없이 독려하고 재촉한 벽암이 임기 안에 성을 쌓는데 비해 이회가 맡은 남쪽 성곽은 일의 진척이 매우 느렸다.

하나하나 돌을 제대로 쌓아야 한다. 기초부터 튼튼히 해야 제대로 된 성을 쌓을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승려들에 비해 일반 백성들을 데리고 성을 쌓는 이회는 기일이 갈수록 험한 지형으로 인해 매우 느리게 일이 진행됐다. 벽암대사가 맡은 북쪽의 지형은 완만하고 산세가 평탄했지만 남쪽은 협곡이 많았다. 잘못 쌓았다가는 무너지는 돌더미에 사람이 깔려 죽을 수도 있으리만큼 깎아지른 절벽이 많았고 무거운 돌을 나르기에도 힘들었다. 쉬지 않고 열심히 해도 조심조심 기초를 다지며 쌓다보니 하루하루 날이 흘렀다.

오늘은 그만 하자 날이 저물고 추우니 내일 해가 뜨면 다시 이곳으로 나오너라.”

하지만 대장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장님께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이회의 지시에 부하 부장들이 우려하는 말을 했지만 어두운 날씨는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듯이 춥고 쌀쌀했다.

아니다 인명이 다치는 것보다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 일을 해야 옳을 것이다

이회라고 일의 진척을 모를 리가 없었다. 북쪽을 맡은 벽암이 순조롭게 성을 쌓으며 나가는 데는 각 지역의 사찰들이 모금한 쌀이며 돈이 큰 힘이 되어주었지만 자신과 함께 일을 하는 백성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해 허기와 추위에 떠는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많았다. 나라의 녹을 받는 군사들은 그런대로 견딘다고 해도 부역에 동원되어 성을 쌓는 백성들을 먹이는 일이 큰일이었다. 나라에서 지급된 물자는 오래전에 동이 났다. 이회의 집에서는 아내와 첩이 남편의 일이 무사히 기한 안에 끝나도록 하는데 보태려고 집을 팔고 가산을 정리해서 보내주었다.

날이 밝자 이회를 비롯한 군사들이며 일꾼들이 다시 일에 나섰다. 일꾼들은 돌을 나르고 제대로 된 돌을 골라 성을 튼튼히 쌓아올리는 일을 계속했다.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성 아래로 올라오는 적병을 쏘아 맞힐 수 있는 활 구멍과 성의 간격을 두고 마름모꼴로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폭을 두고 정성스럽게 쌓아 나갔다.

 

조정의 신하들은 임금께 남한산성의 개축이 늦어지는 것을 물으라는 상소를 올렸다. 북쪽을 맡은 벽암대사의 성곽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는데 남쪽의 성곽은 아직도 멀었으니 자연히 광주유수 이서를 헐뜯는 풍문이 돌았다. 임금이 이서를 불러들였다. 임금은 이서를 질책하며 공사가 늦어지는 이유를 파악해 만약 책임자가 태만히 한 것이 드러나면 엄히 다스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서는 자신이 큰 불충을 저지른 듯 한 심정으로 임금 앞에서 물러나왔다.

그는 해가 걸린 서쪽 산봉우리 서장대로 올랐다. 산성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세는 마치 물결치듯 크고 작은 구릉들이 겹겹 포개져서 누가 감히 이 산중에 이런 장대한 산성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할 정도로 유장한 산세였다.

백제 온조왕의 사당이 있고 신라, 고려를 거쳐 수 없이 많은 군왕들이 전란에 이곳으로 피신을 했던 호국의 성지이기도 했다. 푸른 소나무들이 낙락장송을 이루며 산세의 풍광을 아름다운 산수화로 그려내는 남성적인 산이 남한산이다.

멀리 한양이 보였다. 송파 강이며 드넓은 평지인 잠실과 삼전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양평과 양주 수원까지 남한산 어디를 올라도 볼 수 있는 땅이다. 적군 천군만마가 불시에 습격을 해 온다고 해도 금방 봉화를 올리고 전투태세를 갖출 정도로 산 아래 작은 움직임이 성첩의 구멍으로 죄다보였다. 굽이굽이 능선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쌓아올린 성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에 만감이 교차했다. ‘군왕이 유사시에 대피할 성으로는 이 남한산성만한 곳도 없을 터, 만대에 길이 남을 대 역사를 꼭 기한 안에 끝내리라다짐하며 대충 둘러본 결과 벽암대사가 맡은 지역은 거의 공사가 마무리 중이었다.

남쪽 성곽을 보고 오라고 한 부하가 그쪽은 아직도 성을 쌓는 일이 멀었다는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듣는 이서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노기가 서렸다. 그는 어서 이회를 불러오라는 명을 내렸다. 공사장에서 일꾼들을 감독하던 이회가 수어장대 뜰에 엎드렸다. 임금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은 이서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이서가 호통을 쳤다.

너 이놈! 내가 너를 신임하여 큰 대사를 맡겼거늘 어찌하여 공기 안에 일을 마치지 못하느냐?”

제가 맡은 남쪽은 너무나 험한 지형이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다 보니 늦어졌을 뿐 태만히 한 것은 아닙니다.”

이회가 당당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잘못을 구하기는커녕 변명을 한다고 생각한 이서가 다시 호통을 쳤다.

네가 스스로를 변명하고 있구나? 내 신의를 저버리고 나라의 녹을 받으면서 충실치 못한 죄를 묻겠다!”

장군님, 반드시 제가 맡은 곳을 살피시고 죄를 물으십시오. 너무 억울하옵니다.”

이미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으로 찍힌 터라 그 말이 이서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여봐라, 저 놈의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하겠다.”

추상같은 명령에 군졸이 칼을 뽑아 들자 이회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원통하옵니다. 저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것입니다. 제가 죽고 나면 한 마리 매가되어 억울한 죽음을 증명하겠습니다. 장군!”

비통한 말을 남기자 번쩍하는 칼날아래 이회의 목이 뒹굴었다. 그러자 붉은 피가 하늘로 뻗치는 그의 목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매는 억울한 죽음을 증명하듯 이회의 시체를 몇 번이고 감싸 돌더니 서장대 앞 큰 바위로 날아올랐다. 둘러섰던 사람들이 이 뜻밖의 광경에 놀라서 바위로 달려가자 매는 유유히 서장대 뜰을 날아 남쪽 성곽 쪽으로 사라졌다. 그 바위에는 방금 날아간 매 발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이회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던 무렵 그의 처 송씨와 첩은 가산을 정리해서 남편의 일을 돕는데 보탠 다음 길을 떠났다. 평소 자매간처럼 의좋게 남편을 모시던 여인들이었다.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의논 끝에 각 지방을 돌며 모금을 해서라도 식량과 물자를 대주기로 하고 두 여자는 전라도를 거쳐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돌았다. 갖은 수모와 고생을 겪으면서도 남편을 향한 정성으로 두 여인은 모금한 쌀과 쇠붙이를 광나루 터까지 옮겨왔다. 푸른 강물이 출렁거리는 여울목만 건너면 산성이 바라보이는 곳이었다.

아우님, 이제 이 강만 넘으면 우리가 애써 모아온 이 물자가 서방님께 전달 될 거예요 자네 고생이 커서 이만큼의 물자라도 얻어왔으니 다행이예요,”

주글주글한 얼굴에 흰머리가 늘어난 송씨가 둘째 부인을 돌아보며 다정하게 말을 나눴다.

형님, 고생이 더 많으셨지요, 모두 형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요

송씨보다 십여 세 아래인 첩은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이회의 인품에 반해 첩이라도 살겠다며 큰 부인 아래로 들어와 한 집에서 산지 여러 해가 됐다. 그러나 모시던 남편이 큰일을 맡아 집을 떠나고 없자 큰 부인을 재촉해 남편의 일을 돕고자 여러 지방을 다니며 문전걸식을 하고 모금을 하느라고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갈라터진 손으로 쌀 포대를 배로 옮기며 재회할 남편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강직하고 올곧은 남편은 매사에 빈틈이 없었다. 그가 쌓은 성곽은 나라를 지키는 튼튼한 요새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몇 달을 얻어 들인 곡식이 몇 가마가 됐다. 두 여인은 나루를 건너는 배에 쌀과 쇠붙이를 실었다. 배가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건너다보이는 송파나루로 향했다.

부인 대장께서는 어제 서장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뱃전에서 쌀자루를 내리던 군사가 송씨 부인에게 이회의 죽음을 알렸다.

뭣이라고요? 그럴 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기한 내에 맡은 구역을 다 못 쌓았다는 죄를 받으셨습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게지요

아 아니?··· 차마 이럴 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부인은 까무러치고 말았다. 잠시 후 깨어난 부인은 정신이 아득했다. 남편이 잘못도 없이 저승의 객이 되었다니, 온몸의 맥이 풀리며 가엾은 남편의 저승길을 동무해 가야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한순간에 첨벙 강물로 뛰어들었다.

형님! 이게 웬일 입니까? 저만 두고 어디를 가십니까?”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던 첩이 절규하듯 그 한마디를 남기고 송씨 부인이 뛰어내린 물속으로 풍덩 뛰어내렸다. 그러자 배가 기우뚱하며 실려 있던 쌀자루들이 강물로 풍덩풍덩 떨어져 내렸다. 강물은 금방 뿌연 쌀뜨물로 흐릿해졌다. 모든 고생이 한순간 헛수고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남편까지 참변을 당한 두 여인의 혼이 죽어서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는 소문이 돌았다.

깊은 밤 송씨 부인이 투신한 강나루에서는 여인네들의 통곡소리가 구성지게 들린다고 했다. 날이 흐리거나 비라도 흩뿌리는 날이면 그 통곡소리는 남한산성을 넘어오기도 했다. 또한 몇 달이 지나도록 쌀자루가 쏟아진 나루에서는 뿌연 쌀뜨물이 흘렀다. 사람들이 그 나루를 쌀뜨물나루로 불렀다.

남한산성 광주유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수어장대에 보초를 서는 군병의 말이 사실이라면 기막힌 일이었다. 괴괴한 적막을 타고 들려오는 여인네의 통곡소리에 군병들이 서로 보초서길 꺼린다는 것이다. 애절한 흐느낌 같기도 하고 한 맺힌 절규 같기도 한 울음소리라고 했다. 그 통곡소리는 수어장대 이회가 참수를 당한 지점에서 들려온다는 보고를 한 것이다. 성곽을 마무리한 벽암대사와 참수형에 처해진 이회의 억울함을 확인한 조정에서 서장대 맞은편에 제각을 짓고 벽암과 이회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올려주고 있었다. ‘그것 참 어쩐다? 그래 남편을 따라 억울하게 죽은 이회의 부인과 그 첩을 이회의 사당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올리면 원혼들도 더 이상 한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광주유수는 즉시 남한산 아래 기거하는 만신과 무당들을 불렀다.

그대들은 즉시 청량당에 모실 두 부인에 대한 치성을 올릴 굿 준비를 하고 매년 두 부인이 투신한 날을 기려 제사를 올리고 혼령이 편히 승천하도록 명복을 빌라

유수의 명을 받들어 수어장대 큰 향나무아래서 수십 명의 무당들이 굿판을 벌렸다. 징을 치고 제금을 울렸다. 오색 당목이 바람에 휘날리며 소지를 감아올렸다. 만신들은 정성을 다해 두 여인에 대한 제사를 모셨다. 두 부인의 명부가 사당에 오르고 비로소 강 나루터와 수어장대를 휘돌던 통곡소리가 그쳤다. 두 부인은 남편과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에 자신들도 모셔줄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무당들은 해마다 두 부인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굿을 하는데 영험한 효력을 내려준다고 굳게 믿고 있다. 또한 벽암대사가 쌓은 북쪽은 세월이 흐를수록 허물어지고 흔적도 없는 곳이 많았는데 이회가 쌓은 남쪽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한다.

 

천척(千尺)의 층대(層臺)는 아득한데

일찍이 백전(百戰)을 겪어왔네.

힘들고 위태함을 어찌 차마 말하랴

성 지킬 능력 아님이 부끄럽네.

넓고 너른 들판은 아득히 멀고

기나긴 강은 굽이굽이 도는구나.

쓸쓸히 외로운 검을 어루만지며

지는 해에 홀로 배회하는구나.

-김만기-

 

숙종임금의 장인으로 당시 문필로 이름을 떨치던 김만기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이 수어장대에 올라 읊은 시다. 서장대는 서쪽으로 이어진 성의 높은 곳에 위치한 곳으로 장수가 부하들을 통솔하고 지휘하거나 임금이 사열을 나오면 비바람을 막을만한 건물이 없던 곳이었다. 병자호란이 있은 뒤 150년 후 영조임금은 여주 세종대왕 능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 오르셨다. 선대인 인조대왕이 천추의 한을 품고 이곳에서 49일을 버티다가 끝내는 삼전도에 나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을 한 남한산성을 친히 둘러보고 선대가 겪었을 쓰라린 고통을 돌아보고자 하는데 뜻을 둔 행차였다.

인조임금은 여러 번 서장대로 올라 친히 군사들을 독려하고 항전했지만 끝내는 치욕적인 굴복을 하고 말았다. 청나라를 군신(君臣)의 예로 떠받들겠다는 각서에 조인을 했을 선대임금의 비통한 심정이 영조임금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성곽이었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누각은 다른 성의 누각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건물이었다. 허물어지고 낡은 곳을 즉시 보수할 것을 명했다. 아울러 남한산성의 수어사 이기진을 불러 서장대에 2층 누각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왕명을 받은 이기진이 목수들을 불러 누각을 세웠는데 40일이 걸렸다. 사방을 내려다보며 누각아래 군사들을 지휘하도록 하자는 뜻도 있었지만 영조임금의 속마음은 따로 있었다.

무망(無妄), 어느 한순간에도 조선의 역사에 남은 치욕적인 굴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였다. 효종임금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난후 왕자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던 시절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귀국한 후로도 쓰라린 그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 누워서는 머리에 창을 두고 앉으면 쓸개를 매달아 쓰디쓴 쓸개즙을 수시로 맛보며 원수를 갚고자 청나라를 칠 북벌의 꿈을 키우시던 분이셨다. 왕위에 오른 후 조정신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군비를 확충하며 청나라를 칠 전략을 짠 원대한 꿈을 펼치기도 전에 별안간 승하하셔서 그 계획이 무산되었지만 오랑캐가 조선을 짓이긴 그 원수를 어찌 한시인들 잊을 수 있으랴, 영조임금의 마음에도 분하고 서러운 의기를 무엇인가에 남기고 싶었다. 임금은 손수 현판에 글씨를 썼다. 그리고 청태종이 승전의 기념으로 세우게 한 삼전도비가 내려다보이는 서장대에 무망루(無妄樓)라고 쓴 현판을 달게 했다. 마음에 잊지 말고 원수를 갚고자하는 마음을 다지는 글로 이 성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당한 곤욕의 시절을 영원히 새겨두었다. 이기진은 그 뜻을 헤아려 수어장대 안에 무망루 현판을 걸고 밖에는 수어장대현판을 걸었다. 그리고 뒷날에 부임하는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오래되어도 그 무망(無妄)의 뜻이 희석되지 않는 다함으로 이어지길 원하는 기록을 남겼다.

지금의 무망루 현판은 1989년 따로 전각을 건립하고 전각 안에 현판을 설치해서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수어장대 동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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