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암(龜頂巖)의 전설)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2 조회 : 1426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상림리에는 구정암
(龜頂巖)이라는 바위가 있다. 시냇가에 솟아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거북의 머리와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바위를 두고 고려 태조 왕건과 장선낭자에 얽힌 애달픈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왕건은 개성 출신으로 당시의 유력한 지방 호족 세력이던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무예가 출중하고 덕망이 높았던 왕건은 참가한 전투마다 궁예에게 승리를 안겨주며 후고구려의 주역으로 발돋움을 하였다. 하지만 그즈음 그가 모시던 궁예는 이미 예전의 궁예가 아니었다. 궁예는 자신을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며 바른 말을 고하는 충신들은 물론 처자식들을 때려죽이는 등 그의 오만하고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민심은 궁예의 폭정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오랜 전쟁에 지치고 궁예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백성들은 점차 덕망이 높던 왕건에게 희망을 찾으려 하였고 이는 백성들뿐만 아니라 궁예를 가까이서 모시던 다른 신하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에 신숭겸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은 왕건을 찾아가 새로운 왕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왕건은 궁예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그들을 달래어 돌려보내곤 하였다. 하지만 궁예는 그러한 왕건의 기대를 저버렸다. 오히려 백성들 사이에서 갈수록 신망이 높아만 가는 왕건을 시기하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불러 말하였다.

자네는 어젯밤 내게 무슨 잘못을 했는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왕건에게 궁예는 다시금 말하였다.

자네가 어젯밤 내게 반기를 들고자 역심을 품었던 것을 나는 다 꿰뚫고 있단 말이네!”

너무도 어이가 없는 궁예의 억측에 왕건이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려던 순간, 곁에 있던 다른 신하가 왕건에게 속삭였다.

그리하였다고 대답하소서. 그리 아니하시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제야 자신을 시험하여 죽이고자 하는 궁예의 의도를 알아챈 왕건은,

과연 미륵불이시옵니다. 실로 어제 역심을 지녔었으니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다행히 궁예는 자신의 트집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왕건이 마음에 들었던지,

과연 그대는 마음이 바른 신하로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고하고 용서를 구하니 나의 자비로 그대를 특별히 이번 한번은 용서토록 하노라.”

라며 왕건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후로도 궁예는 왕건을 시기하여 기회만 닿으면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왕건은 이러한 궁예의 움직임을 알아채고는 몸을 숨기게 되었다. 그러나 궁예가 보낸 자객과 군사들이 뒤를 쫓는 바람에 왕건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마침내 도착한 곳이 바로 광주시 도척면 상림리 구정암 부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진맥진 광주에 도착한 왕건은 날이 저물 무렵 인적이 드문 산턱에서 외따로 떨어진 인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적을 피해 여러 날을 도망치느라 며칠을 굶었던 왕건은 기력이 다 쇠진하여 겨우 주인을 부르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마당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날 왕건이 정신이 들어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노인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왕건이 노인에게 물으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방문이 열리며 소반에 미음대접을 들고 들어오는 어여쁜 낭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선녀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아니고서야 이런 첩첩산중에 이렇게 맑고 어여쁜 낭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참이나 비몽사몽 하다가 겨우 눈을 비비고 궁예의 병졸들에게 쫓기던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밤새도록 큰 신세를 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 집에는 어떤 사정으로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약초를 캐는 노인이 손녀인 장선낭자를 데리고 단 둘이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왕건은 노인과 손녀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점차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궁예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숨어들었던 왕건은 마땅히 갈 곳도 없었을 뿐 아니라 노인과 손녀가 몸이 회복된 후에 떠나시라며 극구 말렸기에 못이기는 척 몸을 의지하고자 머물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어느덧 왕건과 장선낭자는 애써 누르고 피하려 해도 인력으로는 다스릴 수 없는 연정을 서로에게 주게 되었다.

노인 또한 살아온 동안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인품과 풍모를 지닌 왕건이 걱정스러울 만큼 마음에 들어 그러한 그들의 애틋한 사랑을 흡족하게 지켜보며 내심 둘을 혼인 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궁예의 밑에서는 언제나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터에 내몰렸던 나날들이었기에 왕건 역시 이 세상에 태어나 이토록 여유롭고 달콤한 시절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평화로운 삶에 흠뻑 빠져 이대로 안주하는 삶을 살아갈까하는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허나 이 세상은 왕건이 그대로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갈수록 심해지는 궁예의 폭정에 온 나라는 백성들의 신음 소리로 가득하였고 그러한 사실들은 왕건의 마음 한편을 무겁게 짓눌렀다. 장선낭자도 자기가 사랑하는 왕건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과 아무리 원하지 않아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왕건과의 이별이란 것을 예감하고도 남았던 터라 그러한 왕건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등 이 때나 저 때나 마음이 몹시 불안하였다.

그러던 어는 날, 어스름 달빛에 갓 피어오른 목련조차 유난히도 슬퍼보이던 그런 밤이었다. 그날도 왕건은 나라와 백성들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그런 왕건의 모습을 본 장선낭자가 드디어 결심을 한 듯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가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며 말을 건넸다.

낭군님, 이제 이곳은 더 이상 낭군님이 계실 곳이 아니시지요?”

조용한 장선낭자의 뜻밖의 말에 놀란 왕건이,

낭자, 그게 무슨 말이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이오?”

라며 되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장선낭자의 대답은 왕건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

소녀, 비록 아녀자로 태어나 세상사에는 어둡사오나 이 세상이 낭군님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백성들의 믿음을 저버리실 낭군님이 아니시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소녀로 하여 때를 놓치거나 갈등하지 마시고, 이제 낭군님께 주어진 대업의 사명을 받아 떠나시어요.”

왕건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

비록 초야의 평화로움에 도취하여 지난 몇 달을 보내기는 하였으나 그의 마음속에서 나라와 백성들이 떠났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왕건은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하는 고민들이 깊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왕건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장선낭자와 할아버지였다. 그들의 극진한 보살핌에 대한 보답도 하지 못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비록 서로가 혼인을 약속한 사이는 아니었을지라도 차마 사랑스런 장선낭자를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장선낭자가 먼저 왕건의 그런 마음을 알고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 참으로 총명하고 슬기로운 여인이구나! 그저 곱고 연약하게만 보이는 이 연인의 어디에 이토록 남자의 마음을 뚫는 혜안과 저런 단호함이 깃들어 있단 말인가?! 내 속에 품은 뜻을 꺾지 않고자 여인으로서의 당연한 바람까지도 애써 누르는 사랑스러운 여인······.’

왕건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장선낭자를 끌어안으며 작은 소리로 힘을 주어 말하였다.

나는 그동안 이곳에서 낭자와 함께 보낸 날들이 너무나도 행복하였소. 하늘이 허락한다면 여기서 낭자와 백년가약을 맺고 한평생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였는지 모르오. 하지만 낭자의 말대로 나에겐 꼭 해내야 할 일이 있소. 대장부로 태어나 어찌 일신의 안위만을 위하여 하늘의 뜻을 거스르며 백성들의 믿음을 저버릴 수 있겠소? 어렵고 또 어려운 길이지만 이제는 거짓된 미륵불이 아닌 진정한 광명을 백성들에게 찾아주고 싶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이 어려운 결단을 먼저 헤아려주니 참으로 고맙소. 다만 낭자가 날 믿고 기다려만 준다면 대업을 완수한 후 내 반드시 낭자를 맞으러 오리다.”

이 말을 듣고 장선낭자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낭군님께서 그리 약속해 주시니 소녀는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낭군님께서 대업을 완수하시고 저를 다시 찾아주실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장선낭자는 왕건의 품에서 재빨리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눈에 가득 맺힌 눈물이 왕건의 앞길을 막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장선낭자는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로 밤을 새웠다. 과연 왕건이 살아서 다시 올 수나 있을지 행여 오늘밤이 마지막 밤이 되지나 않을지 앞뒤 가리지 말고 이대로 달려가 왕건의 품에 모든 것을 맡기고도 싶었으나 오히려 홀가분하게 떠날 수 없는 큰 부담을 왕건에게 주는 것이 아닐까를 먼저 염려하였다. 왕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여인,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여인, 이제까지의 여인들 같았다면 방문을 두드려서라도 낭자의 모든 것을 취하고 싶었겠으나 장선낭자에게서만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지켜주고 보호해 주고 싶은 아주 소중한 마음이 드는 그런 여인이었다. 장선낭자를 위해서라도 궁예를 물리치고 꼭 살아서 다시 오리라, 와서 떳떳하게 아내로 맞으리라 왕건은 주먹을 쥐고 마음속으로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세상을 살다보면 보지 않고도 보이는 것이 있고 알려주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있으며 몸을 부딪치지 않고도 한 몸일 수 있음이 분명히 있듯이 왕건과 장선낭자는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하여 고통스런 밤을 보냈다.

다음날, 왕건은 반드시 돌아오겠다며 다시 한번 장선낭자와 굳은 약속을 하고 근심스런 할아버지의 시선을 뒤로 한 채 길을 떠났다. 왕건은 그 길로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과 부하들의 힘을 모아 궁예를 축출하고 드디어 새로운 나라를 창건하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새롭게 세운 나라이기에 더욱 국력을 키우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온 힘을 기울이며 왕건은 불철주야 노력을 해야만 하였다.

 

한편, 고려의 개국 소식을 듣고 왕건이 다시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던 장선낭자의 하염없는 기다림 속에 세월은 흘러갔고, 그러던 어느 날 약초를 캐던 그녀의 할아버지마저도 손녀딸의 혼인을 보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제 의지할 곳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외로운 산속에서 장선낭자는 점점 더 쇠약해지는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구정암에 올라 오직 왕건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왕건은 끝내 소식이 없었고 장선낭자는 결국 구정암에 앉아 왕건을 기다리다 쓰러지고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왕건은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이제 일구월심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을 그립고 또 그리운 장선낭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하 몇 명만을 데리고 기억을 더듬어 조용히 낭자를 찾아 가게 되었다. 하지만 왕건이 장선낭자를 찾았을 때에는 너무도 때가 늦은 뒤였다. 구정암 위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는 장선낭자를 발견하고 왕건은 끝내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인 일이오······?! 이제야 내가 낭자를 맞으러 왔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않고 이렇게 먼저 영영 떠나버리고 말다니, 내가 어찌 고개를 들 수 있단 말이오, 낭자! 하늘도 정말 무심하구려!”

너무나도 애통해하는 왕건의 모습을 보고 수행하던 신하들도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왕건은 생명의 은인이며 오직 자신만을 기다리다 숨진 장선낭자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럽게 장사 지내 주었다.

 

그 후로 이 고장 사람들은 구정암을 장선낭자가 왕건을 기다리다 죽은 바위라 하여 장선낭자 바위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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