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개관 이 마을은 무갑산을 마을 뒤에 두고 있어 ‘무갑리’리 부른다. 속칭 ‘무래비’라고도 불려오고 있다. 이 마을은 경안동에서 퇴촌면을 거쳐 양평군 강하면으로 통하는 380번 지방도를 따라 가면서 무갑리 사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무갑산 밑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신월리와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퇴촌면 원당리와 접해있다. 무갑리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 둔촌공(遁村公) 이 집(李 集)의 후손들이 세거(世居)하여 오고 있다.
(2) 제의절차
① 장승의 제작과 형태
무갑리 장승은 마을에서 큰길 방향으로 2km정도 지점에 있는 천현한우 앞에 위치하고 있다. 북방흑제장군과 남방적제장군이 약 500m의 간격을 두고 세 개씩 마주 세워져 있는데, 각각의 장승 옆에는 솟대가 함께 서 있다. 장승은 2년에 한 번씩 북방흑제장군과 남방적제장군을 각각 1개씩을 만들어 새로 세운다. 장승제작에 가장 첫 단계는 장승을 깎기 위해 미리 베어다 놓은 나무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이때에는 손도끼를 이용한다. 그리고 껍질을 어느 정도 벗겨낸 후 장승에 글자를 써 넣을 부분을 준비한다. 글자를 쓰는 부분에 전기톱으로 홈을 낸 후에 손도끼를 이용하여 깎아 낸다. 손도끼로 하다가 다시 힘이 많이 필요한 부분은 전기톱을 사용하여 다듬는다. 도구는 필요에 따라 바꿔가며 사용한다. 글자를 쓰는 부분을 어느 정도 깎아 내고 나면 목재 면을 다듬는 도구를 이용해 다듬는다. 글자를 쓰는 부분의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자와 펜을 이용하여 얼굴 모양의 위치를 잡는다. 위치를 표시하고 나면 우선 머리 윗부분과 입이 될 부분에 전기톱을 이용하여 표시를 한다. 그리고 미리 표시 해 놓은 눈 부분을 전기톱으로 깎기 시작한다. 눈이 어느 정도 되면 조금씩 내려가면서 얼굴 형태를 어느 정도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입 부분을 파내기 시작한다. 얼굴 윤곽을 어느 정도 잡기 시작하면 정과 망치를 이용하여 코와 입 등에 세부작업을 한다. 얼굴 제작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글자를 쓰는 부분을 다듬는 작업이 계속 된다. 장승이 제작되는 동안 솟대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두 팀으로 나누어 작업을 한다. 도구들을 이용하여 얼굴의 코와 입 모양을 구체적으로 잡으면 입에 이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이는 장도리와 끌을 이용하여 하나하나 섬세하게 작업을 한다. 이를 만드는 작업이 되면 코에 콧구멍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이것은 드릴을 이용하여 뚫는다. 장승을 제작하는 동안 옆에서는 귀와 상모에 양 옆으로 나오는 부분을 제작한다. 상모에 옆 부분은 작은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만든다. 귀는 우선 한 개를 만들고 같은 그것으로 다른 나무들에 크기 밑그림을 그린 후에 같은 크기로 제작한다. 얼굴 모양이 다 잡히면 상모에 들어갈 나무를 꽂을 자리를 만든다. 우선 드릴로 구멍을 두 개 뚫은 후에 정과 망치를 이용하여 자리를 넓히고 나무로 들어갈 크기를 가늠하면서 작업한다. 자리가 다 완성되면 미리 제작 했던 나무를 꽂아 넣는다. 장승의 모양이 완성 되면 다음으로 하는 작업은 토치를 이용하여 나무를 건조 시킨다. 이유는 나무에 습기가 많아 글자를 썼을 때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토치를 사용한 것은 오래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제보자 장한영(남, 66세,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무갑리, 제관), 2009년 3월 2일 조사.
토치 작업이 끝난 후에는 미리 제작 했던 귀를 못을 이용해 얼굴 좌우측에 고정시킨다. 위아래에서 사선으로 2개 중앙에서 한 개씩 해서 고정 시킨다. 장승의 모양을 잡는 작업이 끝나면 이제 장승에 글자를 써 넣는다. 올해는 강석준 올해 무갑리 장승 글자는 강석준(남, 80세,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무갑리)씨가 적었다. 씨가 글자를 써 넣었다. 장승에 글자를 써 넣는 작업은 평소 글을 잘 쓰는 사람을 택해서 한다고 한다. 장승에 글씨를 써 넣고 나면 미리 제작했던 솟대의 새에 눈을 그려 넣는다.
다음 작업은 얼굴에 화장을 하는 작업이다. 화장은 락카로 하는데 예전에는 물감을 사용했다고 한다. 락카를 칠하기 전에 락카색이 닿으면 안 되는 부분에 신문지로 감싼 후에 테이프를 이용해서 고정시킨다. 상모와 눈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락카를 칠하고 나면 고정시켰던 신문지를 떼고 상모에 먹으로 선 모양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과 눈썹을 그려 넣는 것으로 장승제작을 끝마친다.
② 제의과정
무갑리에서는 산신제, 고창터 제사, 장승제를 지내는데, 그 순서는 산신제→고창터 제사→북방흑제장군 장승제→남방적제장군 장승제 순이다. 제의와 관련해서 날짜를 부르는 말에는 겉날과 속날이 있다. 겉날은 음력 2월 1일으로, 이 날 노인회관에 모여 책을 보고 제의를 지낼 좋은 날을 정한다. 올해는 2월 6일이 택일 되었다. 속날은 당주를 선정하는 날로 이 날 역시 노인회관에 모여 책을 보고 부정 없고, 당주로 선출되기에 문제가 없는 사람을 정한 후에 해당자에게 통보한다. 하지만 아내가 생리중일 경우에는 당주로 선정 되더라도 당주를 맡을 수 없다. 제의에는 당주 3명과 축관 1명을 포함해서 총4명이 참여한다. 당주가 된 사람들은 뽑힌 날 저녁부터 목욕재계를 시작한다. 목욕재계는 동네 마을 뒤에 있는 개울가에서 하고 있으며,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씩 제의 당일까지 한다. 이 때 목욕재계는 당주만이 아니라 당주의 아내들도 하루에 두 번씩 해야 한다. 목욕재계를 할 때는 먼저 당주 세 사람이 목욕재계를 한 후 당주의 아내들이 목욕재계를 한다. 목욕재계는 오전에는 5시경, 오후에는 9시경에 하며, 매번 새 수건을 각자 사용한다.
당주로 선택되면 그날부터 당주와 당주의 아내들은 한 집에 모여 생활한다. 단, 남자와 여자로 구분해 동성끼리만 같은 공간을 사용한다. 이들은 이렇게 합숙을 하며 제의를 지낼 때 까지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한다. 당주로 선정되면 그 날부터 마을사람들과의 대화는 물론 접촉을 피해야 한다. 마을 사람들도 제사가 끝날 때 까지는 당주를 맡은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제물을 준비하는 일과 목욕재계 외에는 집 밖 출입을 삼가며, 비린 음식(생선류)과 육식을 하지 않는다. 채식 위주로 식사를 하며, 당주를 맡은 기간에는 과일로 부족함을 달랜다. 음주와 흡연 역시 금기로 정해져 있으며 부부관계도 제사가 끝날 때 까지 금기로 한다. 금기와 관련하여 마을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전에 제사에 지낼 쌀을 옮기다 땅에 흘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을 새것으로 바꾸지 않고 그냥 사용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제사 후에 눈이 크게 부어오르는 일이 있었고 후에 마을 사람들은 제사 준비 할 때 항상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다.
이렇듯 엄격하고 까다로운 금기 때문에 최근에는 당주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때문에 마을에서는 당주를 맡는 사람에게는 30만원씩을 지원함으로써 수고에 대한 보상을 하고 있다. 제비는 산신제 다음날 대동놀이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십시일반으로 걷은 돈을 기금으로 마련해 사용한다. 무갑리 제의 중 가장 마지막 순서로 행해지는 장승제는 남장승인 북방흑제장군에서 먼저 제의를 지내고, 여장승인 남방적제장군에서 제의를 올리는 것으로 진행된다. 장승 앞에 도착한 당주들은 상을 차린다. 상차림이 끝나면 술을 올리고 일동이 절을 올린다. 이렇게 3회를 반복한 후 한지에 포와 제물을 싸서 장승에 매달아 놓는다. 이렇게 남방적제장군까지 모든 제의를 마치면 전원이 당주 집으로 이동하여 정리를 하고 식사를 한다.
③ 산신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무갑리 산신제는 약 200년 전부터 행해졌다. 과거 이 마을에는 산신제의 유래와 관련된 기록이 있었는데, 6․25 전쟁 때 모두 불타 사라졌다. 때문에 현재 정확한 유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무갑산이 험하기 때문에 산에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산신제를 지내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뿐이다. 이외에도 산신제가 정기적인 놀이판인 고창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과거 이 마을에서는 3년에 한 번씩 ‘고창’이라고 하는 큰 놀이판을 벌였다. 여기서 고창이란 고창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 날은 악사, 줄광대가 오는 일대의 행사였다. 그리고 놀이판이 마치면 마을에서는 산신제를 지냈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고창이 더 이상 행해지지 않자 마을에서는 2년에 한 번씩으로 정기적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산신제당은 노인회관의 정면에 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제당이라고 해도 따로 제단이나 표시를 한 것은 아니고, 산 중턱 평지에 나무로 둘러싸인 곳을 사용하고 있다. 제사상에는 대추, 감, 곶감, 사과, 밤, 탕, 밥, 북어, 술, 떡, 소머리가 올라간다. 이 중 소머리와 술, 떡을 제외한 나머지는 광주 시내에서 구입해 온다. 하지만 절대 가격을 흥정하지 않는다. 술은 집에서 막걸리를 담근 후에 제사 지내는 제당 앞에 묻어 두었다가 제삿날 꺼내서 사용한다. 그리고 떡은 집에서 직접 절구에 벼를 빻아 만든다. 과거 마을 재정이 어려울 당시에는 소 값이 비싸기 때문에 소머리만을 구입해서 제사를 지낸 경우도 있었다.
제기는 매년 새것을 구입해서 사용한다. 쟁반부터 술을 옮겨 담는 주전자와 그릇 일체를 모두 새것으로 준비한다. 때문에 제의를 마친 후 사용한 제기는 당주를 맡은 집에서 나눠 갖는다. 23시20분이 되자 지게 하나에 제사에 필요한 제물과 짐을 싣고 산신제당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지게는 하나만 이용하고, 나머지 제물과 제기들은 박스를 이용하여 손으로 옮긴다. 23시 35분 경 산신제당에 도착한 일행은 준비한 짐을 풀고 산신제를 올리기 위한 준비를 한다. 술은 미리 제당 옆에 묻어 놨던 술을 꺼내 준비해 온 주전자에 옮겨 담는다. 상차림이 끝나면 당주 3명은 제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향을 피운다. 제사가 시작되면 우선 절을 한 번 하고, 술을 올린다. 그리고 당주 세 사람이 같이 절을 하고 다시 술을 올린다. 이어 두 사람만 절을 하고 옆에서 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독축이 끝나면 당주 세 사람이 함께 절을 하고, 술을 새로 올린 후에 다시 절한다. 그리고 축문을 태운 뒤, 당주들의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제의를 마친다. 산신제에 쓰이는 축문은 과거에는 전해 내려오는 축문을 한자 그대로 옮겨 적어 사용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축문에 한글을 병기한 축문을 복사해서 사용 하고 있다. 현재 축문의 원본은 노인회 총무가 맡아서 관리한다.
제의가 끝나면 제물로 올린 소머리에서 고기를 잘라내어 세 곳으로 던지고 한지에 북어와 제물을 싸서 나무에 매단다. 이것이 다 끝나면 음복을 하고 내려갈 준비를 한다.
24:20분에 산에서 내려와 고창터 제사와 장승제를 지내고 위해 차로 이동한다. 장승까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차를 이용한다고 한다. 우선 마을에 앞에 있는 큰 나무에 도착해서 상을 차리고 제사를 시작한다. 술을 올리고 당주가 함께 절을 하는 것을 세 번 반복한 후에 산신제와 같이 북어와 제물을 한지에 싸서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 그리고 음복 한 후에 북방흑제장군으로 이동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