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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시(金若時) 1335(충숙와복위4)~1406(태종 6) |
고려말 문신, 고려 멸망 후 광주에 은거(곤지암 삼합리에 묘와 묘표) |
고려 말기의 문신. 실촌읍 삼합리 산50-1에 묘와 묘표가 있다.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음촌(陰村). 신라의 왕자 흥광(興光)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정(鼎)이다. 형은 대사성(大司成) 약항(若恒)이다.
1382년(우왕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친 후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에 이르렀다. 1392년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광주 금광동(金光洞 : 현 성남시)에 은거, 고려왕조에 충절(忠節)을 지켰다. 1819년(순조 19)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대제학 이재(李縡)가 찬하여 1727년(영조 3)에 건립한 묘표가 있는데, 특히 봉분(封墳)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문인석 한 쌍은 여말 선초 시기의 문인석에만 나타나는 고식적(古式的)인 형태의 것으로 조선 초기 문인석으로는 드물게 남아 있는 귀중한 석물(石物) 자료이다.
참고문헌 : 『고려명신전』, 『전고대방』, 『순조실록』, 『광주금석문대관』, 『금광동세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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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무(趙英茂) 1338(충숙왕복위 7)~1414(태종14) |
고려 말 조선초의 무신, 조선의 개국공신 (퇴촌 광동리에 묘와 묘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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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개국공신. 퇴촌면 지명의 유래가 된 정승으로, 퇴촌면 광동리 산 16에 묘와 묘표가 있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건야(乾也). 호는 퇴촌(退村)․휴암(休巖). 할아버지는 순후(珣厚)이며, 고조할아버지인 지수(之壽) 때 중국에서 귀화하였다. 아버지는 세진(世珍)이다. 친척 중에 개국공신 조인옥(趙仁沃)과 조온(趙溫) 등 출세한 사람들이 많아 이후 한양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일찍이 이성계의 사병으로 출세하여, 1392년(공양왕 4)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조선 개국 후 판전중시사로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졌다. 이후 상의중추원사로 강계등처도병마사(江界等處都兵馬使)와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는데,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편에서 공을 세워 정사공신 1등에 봉해졌다. 정도전을 죽인 것에 이성계가 노하여 잠시 곡산으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이방원의 신임을 받으며 판중추원사와 참찬문하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였다.
1400년(정종 2)에는 해주 인근에서 왜구를 투항시켰고,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공을 세워 참판삼군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사병혁파 명령을 거부하고 무기를 거두어들이던 군관을 구타했다가 황주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평양부윤이 되었고,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에 봉해졌다. 이후 판삼군부사와 판승추부사 등을 거쳐 1405년(태종 5) 우정승이 되어 판이병조사와 영삼군부사 등을 겸하였고, 1408년 부원군에 봉해졌다.
1412년 자신이 추천하여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박영우(朴英祐)의 잘못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았고, 궁에서 나온 여자를 첩으로 삼는 등 여러 번 물의를 빚기도 하였으나, 태종의 비호로 곧 복직되었고, 1413년 병으로 사직하여 물러났다가 이듬해 죽었다. 죽은 후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조실록』, 『정종실록』, 『태종실록』, 『연려실기술』, 『중정남한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인물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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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金稛) 1341~1398(태조 7)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조선의 개국공신 (오포 능평리에 묘와 신도비 - 도지정 기념물 제10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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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오포읍 능평1리 89-1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실전되었던 것을 후손 사목(思穆)이 광주유수로 있을 때에 찾아 개축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 할아버지는 예의판서 기연(起淵)이고 아버지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지윤(智允)이다. 장인은 개국원종공신 밀직부사 권현(權鉉)으로 고려관직은 판도판서(版圖判書)이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한 뒤 우왕(禑王)대에 친분이 두터운 조준(趙浚)이 실권을 장악하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조선 개국과정에서 태조를 추대하는데 참여,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가자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다.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 『중정남한지』, 『광주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광주의 지명유래』, 『광주금석문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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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金自粹) 1350(충정왕 2)~1413(태종 13) |
조선 전기 문신 (오포읍 신현리에 묘와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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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의 문신. 오포읍 신현2리 산120-1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자수(子粹).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통례문부사지제고(通禮門副使知制誥)를 지낸 오(珸)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을과 제1인으로 급제,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우왕 초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조민수(曺敏修) 관계의 교서 작성을 거부한 죄로 돌산(突山)에 유배된 후, 전교부령(典校副令)과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를 거쳐 1390년(공양왕 2) 성균관제주(祭酒)로 세자시학(世子侍學)이 되었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 1392년(공양왕 4) 판전교시사 좌우상시(左右常侍)에 오른 후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고려 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손에게 결코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그의 시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으며, 묘가 경기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 『문과방목』, 『동문선』, 『광주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광주의 지명유래』, 『내고장 경기도의 인물』, 『광주금석문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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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孟思誠) 1360(공민왕 9)∼1438(세종 20)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직동에 묘와 묘표 - 도지정 기념물 제2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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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직동 산27에 묘와 묘표가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희도(希道)이고, 부인은 최영(崔瑩)의 손녀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된 데 이어 전의시승(典儀寺丞)․기거랑(起居郎)․사인(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내직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이조참의를 거쳐 1407년(태종 7) 예문관제학이 되었을 때 마침 세자가 진표사(進表使)로 명에 가는 길에 시종관(侍從官)으로 수행하여 다녀왔다. 1408년 대사헌으로 왕에게 알리지 않고 왕의 사위 조대림(趙大臨)을 국문(鞫問)한 것이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한주(韓州)에 유배되었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1411년 충주목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이조참판을 거쳐 1416년 예조판서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노부(老父)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고, 호조판서가 되어서 고향의 노부(老父)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하였으나 왕은 그를 충청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었는데,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또다시 사직하려 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19년(세종 1)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에는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가 되고 1425년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에 다녀와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었고, 1427년 우의정이 되었다. 1429년 궤장을 하사받고 『태종실록』을 감수, 1431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듬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를 겸하여 『팔도지리지』를 찬진하고, 1435년 치사(致仕)했다.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고 스스로 악기를 제작했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사람됨이 종용하고 간편하며, 선비를 예절로 예우함이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손님이 찾아오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이 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 집이 사성의 집 아래에 있으므로 항상 가고 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그가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정사를 논할 때는 과감하게 결단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주의 지명유래』, 『광주군지』, 『중정남한지』, 『광주금석문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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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관(具致寬) 1406(태종 6)~1470(성종 1) |
조선 전기 문신 (곤지암 열미리에 묘와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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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실촌읍 열미리 산3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이율(而栗)․경율(景栗). 아버지는 목사 양(楊)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 3등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된 후 예문관검열(檢閱), 승정원주서(注書), 사헌부감찰(監察), 황해도도사(都事)를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의정부검상(檢詳)․사복시윤(司僕寺尹)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직후 함길도에 파견되어 경성부사 이경유를 참살하고 보공대호군(保功大護軍)에 승진, 동부승지․좌승지에 임명되었다.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고 이조참판에 승진되어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 예종의 세자책봉을 위해 주청사의 부사로 청에 다녀와 호조참판이 되고, 이어 평안도절도사가 되어 선정하고 돌아와 1462년(세조 8) 우찬성(右贊成)에 오른 후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피봉되고,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이때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이 변경을 침범하자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 되어 이를 토평하고, 1468년(예종 1)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호조판서를 겸직하였다.
이듬해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원상이 되어 이조판서를 겸직하고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추록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참고문헌 :『단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국조방목』, 『해동명신전』, 『연려실기술』, 『해동잡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정남한지』, 『광주부읍지』, 『광주군지』, 『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광주의 지명유래』, 『내고장 경기도의 인물』, 『광주금석문대관』, 『광주문화』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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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崔恒) 1409(태종 9)~1474(성종 5) |
조선 초기의 문신(퇴촌 도마리에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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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퇴촌면 도마리 산11에 묘가 있고, 197-8에 사묘, 195번지에는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며, 중간말 도로변에는 신도비가 있다. 최항선생묘는 1976년 8월 27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정보(貞父). 호는 태허정(太虛亭)․동량(㠉梁). 증조할아버지는 충생(忠生)이고, 할아버지는 윤문(潤文)이며, 아버지는 지승문원사 사유(士柔)이다. 어머니는 종부시사 오섭충(吳燮忠)의 딸이고, 부인은 서미성(徐彌性)의 딸이다. 처남이 서거정(徐居正)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세종이 집현전부수찬에 제수하였다. 이후 18년간 집현전에 재직하면서, 고제(古制) 연구 및 각종 편찬사업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47년에는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이 되었고, 대리청정하던 세자를 겸직으로 보좌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동부승지로서 수양대군의 집권에 협조하여 정난공신에 봉해졌고, 도승지․이조참판․대사헌이 되었으며,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에 책록되었고, 이후 호조참판․이조참판․형조판서․공조판서․이조판서․우참찬․좌참찬․좌찬성을 역임하며 세자빈객․세자이사와 성균관대사성․판병조사를 겸하였고, 『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오경의 구결(口訣) 정리에 참여하였다. 1467년 삼의정에 차례로 임명되었고,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부원군에 봉해졌고, 좌리공신에 책록되었다.
최항은 성품이 겸손하고 침착하며 말이 적은 학자로, 관료로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거나 결단성을 보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중국으로 보내는 거의 모든 외교문서가 그의 손을 통할만큼 문장에 능하였고, 국가에서 많은 서적을 편찬할 때도 그가 관여하였다. 또한 40년간 6명의 왕 아래서 일을 했지만, 한 번도 탄핵을 당하거나 외직으로 나간 일이 없는 대표적 훈구파 관료였다. 저서로 『태허정집(太虛亭集)』과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가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 『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동문선』, 『연려실기술』, 『해동잡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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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申砬) 1546(명종 1)∼1592(선조 25) |
조선 중기의 무신 (곤지암 신대리에 묘와 묘갈 – 도지정 기념물 제9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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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실촌읍 신대리 산1-1에 묘와 묘갈이 있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입지(立之). 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다.
1567년(선조 즉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경력(經歷)을 지내고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檼城府使)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 온 니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군사를 인솔,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이 철수했으므로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3사(司)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0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가 되어 빈약한 병력으로 출전,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군과 대결했으나 참패, 부하장수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했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신립(申砬)의 묘역(墓域)은 1986년 5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되어 탄금대에서 순국, 처절했던 충장(忠壯)의 정신과 임진왜란의 국난(國難)을 일깨우고 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하고, 신익상(申翼相)이 서(書)하였다. 다음의 묘갈명(銘)이 역사의 단면을 전해주고 있다.
대석(大石 : 실촌읍 곤지암리)의 무덤은 의리(衣履 : 옷과 신)의 소장(所藏 : 간직하여둔 물건)이라. 남한산(南漢山)은 뒤에 솟고, 한강물 곁을 도는데, 천추만세(千秋萬世)에 분(憤)과 한(恨)이 함께 길도다. 후승(後承)이 창대(昌大)하니, 여경(餘慶)은 끝이 없도다."
참고문헌 : 『광주금석문대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정남한지』, 『광주의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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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황(安滉) 1549(명종 4)~1593(선조 26) |
조선 중기의 문신(중대동에 묘와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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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중대동 산 15-2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본관은 광주. 자는 경호(景浩). 아버지는 목사 여경(汝敬)이고, 어머니는 현령 민부(閔頫)의 딸이다.
1564년(명종 19)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덕흥대원군의 아들 균(鈞)이 왕위에 오르면서(선조) 왕의 매부가 되었다. 1574년(선조 7) 문과 초시에 합격하였을 때 선조가 기뻐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냈다.
홀연히 계림(桂林)에 걸린 방명(芳名)을 보니 忽見芳名掛桂林 넘치는 기쁜 기분 어찌나 깊은지 津津喜氣一何深 엄부(嚴父)의 집안 가르침을 가히 이루었고 可成嚴父趨庭訓 자친(慈親)의 베를 끊은 마음을 족히 위로하였네 足慰慈親斷織心 봉지(鳳池)에 붓을 적실 날이 응당 멀지 않으니 染筆鳳池應不遠 죽백(竹帛)에 이름을 남기는 것 이제부터이네 垂名竹帛在如今 알겠노라 내려진 일산 펄럭이는 곳에 遙知賜蓋飜飛處 우로(雨露)의 은화(恩華)가 달 아래 드리움을 雨露恩華月下陰
1577년 왕의 특지로 6품에 초수(超授)되었고 1589년 사도시정, 1592년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음직(蔭職)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왕을 호종하였다. 이듬해 의주에서 환도하다가 강서현(江西縣)에서 병사하였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자헌대부 형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졌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 『광주금석문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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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1589(선조 22) |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초월 지월리에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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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초월읍 지월리 산29-5에 묘가 있다.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 엽(曄)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로 호조참판 김광철의 딸이며, 남편은 안동김씨 성립(誠立)이다. 오빠가 봉(篈), 동생이 균(筠)이며, 대대로 문장으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오빠의 친구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웠다.
용모가 아름답고 똑똑하여 어깨너머로 배운 글로 8세 때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이 알려져 여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1577년(선조 10) 김성립과 혼인하였으나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에게도 학대를 받았다.
어린 남매를 차례로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한 상태에서 친정집마저 옥사에 연루되고 동생 허균도 귀양을 가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지내다가 27세로 요절하였다. 조선에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한으로 여겼다. 남편은 후처 홍씨와 합장하여 혼자 묻혔다. 허난설헌묘는 1986년 5월 7일에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자신의 작품을 태워버리도록 유언하였으나 동생 허균이 보관하였고, 후에 명의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보여주어 『난설헌집』이 중국에서 먼저 발간되었고, 1711년 일본에서도 발간되어 애송되었다. 전해지는 시 213수 중 128수가 도가적 신선사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서경덕에게 배웠던 아버지나 스승 이달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성적 섬세함을 보여주는 애정시는 황진이 등 기생 시와 달리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 『조천록』, 『내고장 경기도의 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주금석문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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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흠(申欽) 1566(명종 21)~1628(인조 6) |
조선 중기의 무신(곤지암 신대리에 묘와 묘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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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퇴촌면 영동리 산12-1에 묘와 묘표, 신도비가 있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고,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좌참찬 인수(麟壽)의 딸이다. 송인수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郞)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1583년에 외숙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심히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한 말로 인하여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라는 배척을 받고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으며, 곧 경원훈도(慶源訓導)로 나갔다가 광주훈도(廣州訓導)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다.
1589년 춘추관 관원에 뽑히면서 예문관봉교․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공로로 지평으로 승진되었다. 1593년 이조좌랑에 체직, 당시의 폭주하는 대명외교문서 제작의 필요와 함께 지제교(知製敎)․승문원교감을 겸대하였다.
1594년 이조정랑으로서 역적 송유진(宋儒眞)의 옥사를 다스리고 그 공로로 사복시첨정으로 품계가 승진되었으며, 곧 집의에 초수(超授)되었다. 같은 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에 다녀와 그 공로로 군기시정에 제수되었다.
1595년 함경도어사와 의정부사인을 거쳐 장악원정․성균관사예․종부시정․세자시강원필선․홍문관교리․홍문관응교․의정부사인․홍문관전한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발탁되었고, 같은 해 형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병조참지․우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대사간․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되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602년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예조참판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병조참판․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그 뒤 병조판서․예조판서․상호군․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애책문(宣祖哀冊文)을 짓고 한성부판윤․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가 되어 명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자되었고,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동지성균관사․예문관대제학을 겸대하였다. 그러나 1613년 계축유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에의 가죄(加罪)와 함께 다시 논의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에 사면되었다. 1623년(인조 1)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난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학문에 전념하여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으며,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인하여 선조의 신망을 받아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사림의 신망을 받았으며,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칭송되었다.
신흠묘역 및 신도비는 1994년 4월 20일 경기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조선 중기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로 한세대를 풍미한 선현의 일생을 조명하고 있다. 신흠은 1651년(효종 2)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저서로는 『상촌집(象村集)』․『야언(野言)』 등과 「낙민루기(樂民樓記)」 외 여러 편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 『광주금석문대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주의 문화유적』, 『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광주의 지명유래』, 『중정남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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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申埈) 1592(선조 25)∼1658(효종 9) |
조선 중기의 무신 (곤지암 신대리에 묘와 묘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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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실촌읍 신대리 산1-1에 묘와 묘갈이 있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평중(平仲). 아버지는 충익공(忠翼公) 경진(景禛)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훈되었고, 평흥군(平興君)에 봉해졌다.
1633년 강화유수․수원부사․광주부윤이 되었고, 어영대장을 거쳐 형조판서․공조판서․총융사를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묘갈은 이수(螭首) 전면에 구름 속에서 해가 떠오르는 일출광경을 아름답게 조각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 『효종실록』, 『광주금석문대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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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뇌경(鄭雷卿) 1608(선조 41)~1639(인조 17) |
조선 후기의 문신(장지동에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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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장지동 산61-2에 묘가 있다.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아버지는 환(晥)이고, 어머니는 서주(徐澍)의 딸이다. 부인은 파평윤씨이다. 4대조가 을사삼간(乙巳三奸)인 순붕(順朋)이다.
16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직 등 청요직을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의 필선이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의 심양(瀋陽)으로 끌려갈 때 수행원으로 동행하였다. 당시 청에서 벼슬을 하며 모국인 조선에 악행을 저지르던 역관 정명수(鄭命壽)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이 조선이 바친 세폐를 빼돌렸음을 고발하였으나, 이미 증거를 없앤 뒤여서 청의 관헌에 잡혀 오히려 사형을 당하였다.
성격이 진실하고 재주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대간에 임명되자 을사삼간의 후예라는 이유로 스스로 파직을 청한 일화는 유명하다. 도승지․이조참판․찬성에 추증되었고, 정조 때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 『정조실록』, 『성호사설』, 『심양장계』, 『중정남한지』, 『광주금석문대관』, 「운계 정뇌경의 순국에 관한 일고찰」(강세구, 『문명연지』 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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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상(李衡祥) 1653(효종 4)∼1733(영조 9) |
조선 후기의 문신(퇴촌 우산리에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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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퇴촌면 우산리에 묘가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사민(師閔)이고, 할아버지는 현감 장형(長馨)이며, 아버지는 진사 주하(柱夏)이다.
1678년(숙종 4) 생원시에 합격하고, 16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좌랑으로 재직 중 동지사가 가지고 가는 세폐포(歲幣布)가 병자호란 이후의 보포(報布)보다 9척이나 긴 것을 알고, 이것이 앞으로 폐단이 될 것을 우려하여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끊어버리고 보냈다. 그 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덕유산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1703년(숙종 29) 제주목사로 있을 때 석전제(釋奠祭)를 지내던 3읍의 성묘(聖廟)를 수리하고 덕망 높은 선비를 뽑아 글을 가르치게 했으며, 신당 129개를 불태워 음사(淫祠)를 단속하였다. 또한 다른 명산대천(名山大川)과 달리 사전(祀典)에 누락되어 있던 한라산(漢挐山)을 사전에 올리도록 상소하여 치악산(雉岳山)․계룡산(鷄龍山)과 마찬가지로 정월․2월․7월에 제사지내도록 윤허를 받았다. 목민관으로서 학문을 진흥시키고 도민(島民)의 풍속을 교화시킨 공으로 송덕비 4개가 세워졌다.
그 뒤 영광군수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영천(永川)의 호연정(浩然亭)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정진하면서 『둔서록(遯筮錄)』을 초안했다. 30여 년간 초야에 있다가 1728년 소론의 일파인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경상도소모사가 되었으나, 같은 소론으로서 당론을 누설했다는 무고를 받고 잠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한성부윤에 제수되었다.
1735년 영천의 성남서원(城南書院)에 제향되었고, 1796년(정조 20)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829년(순조 29) 제주유생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여 영혜사(永惠祠)에 제향되었다.
시조에 깊은 관심을 가져 자료를 널리 모았으며, 시조를 한역한 작품 77수를 남겼다. 저서로 『병와집』, 『둔서록』, 『악학편고(樂學便考)』, 『강도지(江都志)』,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예학편고(禮學便考)』, 『성리학대전』 등 다수가 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국조문과방목』, 『병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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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安鼎福) 1712(숙종 38)~1791(정조 15) |
조선 후기의 실학자(중대동에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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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실학자. 중대동 산15-2에 묘지가 있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ㆍ한산병은(漢山病隱).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서우(瑞羽)이고, 아버지는 증 총관(贈摠管) 극(極)이며, 어머니는 이익령(李益齡)의 딸 전주이씨이다.
젊어서는 특별한 사승관계 없이 가학(家學)을 통해 공부하다가 35세에 이르러 안산에 거주하던 이익(李瀷)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1749년(영종 25) 후릉(厚陵) 참봉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 정릉직장(靖陵直長),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사헌부감찰,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 목천현감(木川縣監) 등을 역임하고 79세가 되던 1790년(정조 14)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까지 올랐으나, 관운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려서는 할아버지의 임소를 따라 자주 옮겨 다니다가 할아버지가 사망한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 고향 광주로 돌아와 경안면 덕곡리(德谷里 : 현 중대동, 일명 텃골)에 ‘순암’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우거하였는데,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여정이 시작되었다. 당쟁에서 밀려난 남인(南人)의 가문에서 성장한 그는 정통 주자학과 퇴계 이황의 학문적 입장을 사상적인 배경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형이상학적인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심학(心學)이나 이학(理學)은 공중에 매달린 말(懸空說話)에 불과하고, 비근(卑近)하여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것을 날마다 실천하는 ‘하학(下學)’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가 1740년(영조 16)에 『하학지남(下學指南)』을 저술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의 학문적 여정에 전환점이 된 것은 1746년(영조 22) 성호(星湖) 이익과의 만남이었다. 이 만남에서 그는 자신이 그동안 혼자 공부해오던 방식의 문제점을 확인하려는 듯 주로 학문의 방법과 요체 등에 대해서 물었다. 이에 대해 이익은 『중용』과 『대학』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경전을 읽을 때에는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학문에 진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 경전의 문의(文義)가 이미 밝혀졌다고 해서 이를 따르기만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또 당론(黨論)이 들끓는 시대적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학문을 해야 할 것인지를 묻자, 이익은 시비를 따지기보다는 선악이 모두 스승이 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겸허히 하여 자득(自得)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하여 결론적으로 이익은 ‘지식(知識)’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지식이 밝아진 후에야 행로가 평탄하다는 것이다.
비판적 읽기를 통해 지식을 밝혀야 한다는 이익의 가르침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대표적 저술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은 그동안 경전처럼 중요시되던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그것은 이익의 『자치통감강목』에 대한 비판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 『동사강목』을 계기로 경사일체(經史一體)의 주자학적 역사 인식은 균열을 일으켜 마침내 주자학을 상대화시키고 조선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실학의 역사 인식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익의 가문과 문인에게서 양명학과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경계하였다.
수차례의 서찰과 「천학고(天學考)」ㆍ「천학문답(天學問答)」 등의 저술을 통해 그는 성호좌파(星湖左派)라 할 수 있는 권철신(權哲身)과 남인계 소장파들의 성리학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 양명학에의 경도, 천주교에의 몰신 등을 우려하면서 그 이단성을 설파했던 것이다. 그것은 노론이 집권한 상황에서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이익의 비판정신을 수용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주자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성호학파 내에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적 자세를 견지한 실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술은 실학자답게 다양하다. 이미 언급한 『하학지남』ㆍ『동사강목』ㆍ「천학고」ㆍ「천학문답」 뿐만 아니라, 토지제도에 대한 「정전설(井田說)」, 정적(政績)과 시의에 따라 조치할 바를 기록한 『임관정요(臨官政要)』, 수상과 견문을 기록한 「상헌수필(橡軒隨筆)」, 지리와 관련한 「동국지계설(東國地界說)」ㆍ「왜국지세설(倭國地勢說)」 등이 있다. 또한 그는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재정리한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편집하고,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연보(年譜)를 찬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아울러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다. 사후에는 순조대에 척사(斥邪)의 공으로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 『순암집』, 『정조실록』, 『순조실록』, 『광주금석문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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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신(權哲身) 1736(영조 12)~1801(순조 1) |
조선 후기 학자, 천주교인 (퇴촌 천진암에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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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천주교인. 퇴촌면 우산리 500 천진암 터에 묘가 있다. 양평군 양근면 갈산동 출생.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庵). 세례명은 암브로시오(Ambrosius). 아버지는 관찰사 암(巖)이고, 동생은 일신(日身)이다.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1777년(정조 1)부터 천진암 주어사(走魚寺)에서 김원성(金源星)․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이벽(李蘗) 등 남인계열의 학자들과 서학교리연구회의 모임을 갖고 천주교에 입교, 신자가 되었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辛亥迫害 ; 진산사건) 때에 체포되었으나 학문적 차원에서 교리를 통해 신앙생활만 한 것이 인정되어 화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1799년 정약종(丁若鍾) 등과 다시 피소되어 정조의 관용으로 모면하였다가 이듬해 정조가 급서하고 노론벽파(老論辟派)가 득세하면서 일으킨 신유박해(辛酉迫害)에 연루되어 혹심한 형벌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이익의 제자로 남인학파의 리더로서 가족과 함께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서학파의 대가로 손꼽힌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 『여유당전서』, 『황사영백서』, 『조선기독교급외교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주의 지명유래』, 『내고장 경기도의 인물』, 『광주문화』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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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신(權日身) 1742(영조 18)~1791(정조 15) |
조선 후기 학자, 천주교인 (퇴촌 천진암에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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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천주교인. 퇴촌면 우산리 500 천진암 터에 묘가 있다. 양평군 양근면 갈산동 출생. 본관 안동(安東). 자는 성오(省吾). 호는 직암(稷庵). 세례명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
아버지는 관찰사 암(巖), 형은 철신(哲身)이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의 사위이다.
남인계열의 학자로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1782년(정조 6)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이승훈(李承薰)에게 영세를 받았다. 그 후 이벽․이승훈 등과 함께 포교에 진력하여 이존창(李存倉)․유항검(柳恒儉) 등을 입교시켰다.
1785년에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집회 도중 이른바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에 연루되었으나 학행과 가문으로 무사하였다. 그러나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 때에 다시 체포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나 도중에 예산으로 바뀌어 배소로 가는 도중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 『조선기독교급외교사』, 「서학의 수용과 그 의식구조」(김옥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주의 지명유래』, 『내고장 경기도의 인물』, 『광주문화』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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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李蘗) 1754(영조 30)~1786(정조 10) |
광주 출신 천주교 순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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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ㆍ천주교도. 광주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 세례명은 요한세자. 아버지는 부만(溥萬)이고, 배우자는 정약용의 누이이다.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포의(布衣)로 지내면서 근기남인(近畿南人) 계열의 권철신(權哲身)ㆍ권일신(權日身)ㆍ정약전(丁若銓)ㆍ정약용(丁若鏞)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서학(西學)을 탐구하여 천진암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가 열릴 때 권철신 등과 토론하였고, 정약용도 그를 통해 서학을 접하였다.
1783년(정조 7) 동지사행(冬至使行)을 따라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서를 가지고 이듬해에 돌아온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권철신ㆍ권일신 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후 서울의 수표교(水標橋)에서 교리 공부와 함께 포교에 힘을 쓰다가 1785년(정조 9)의 천주교 적발 및 탄압과 아버지의 반대로 갈등하다가 이듬해 죽었다. 저작으로 『성교요지(聖敎要旨)』가 있다.
참고문헌 : 『여유당전서』, 『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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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李鍾勳) 1855(철종 6)~1931 |
광주 출신의 국어학자,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역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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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실촌면 유사리 출생. 호는 정암(正庵).
당시에는 학교가 없어 서당에서 한문 수학을 하였다. 서당에서는 글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항상 앞섰으며, 성격은 온휴하고 강직하나 힘이 장사였다. 아이들과 싸우는 일은 없었으나 솔선수범하여 부정과 불의를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으니, 그 모습이 이미 유년기부터 남다른 바 있었다.
5, 6세 무렵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원적산으로 떠나는 어른을 따라나섰는데 지관이 이산, 저산을 돌아다니는데도 이종훈은 다리가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묘지를 보러 다녔다. 그만큼 효심이 깊었음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또 하나의 일화로는 16, 17세 무렵 유사리의 일명 잘 뚝고개 마루턱에 위치한 풍산김씨 선조의 망주석을 걷어차서 두 동강이를 낸 일이 있었다. 그는 3일간의 여유를 주면 망주석을 세워놓겠다고 하였는데 이틀 째 되던 날 밤 감쪽같이 망주석을 세워놓았다. 이는 잘못을 범하여 책임질 일이 생겼을 때 물러서지 않고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이종훈의 품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1880년 25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1894년(고종 31)의 동학농민운동 때 선두에 서서 활약하였다. 1898년 6월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자, 옥리를 매수하여 시체를 빼내어 광주에서 장례를 치렀다. 1902년(광무 6)에는 손병희(孫秉熙)와 같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만나 쇠약해가는 국운과 부패, 혼란에 찬 사회를 통탄하고 구국의 방도를 논의하였다. 1904년에는 혁신운동을 일으켜 솔선하여 단발하고 색의(色衣)를 장려하는 등 민중에 대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큰아들 이관영이 매국노 이완용의 집에 방화하고 양평으로 피신하자 이종훈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경성구치소에 구금당하고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이관영의 은신처에 대해서 함구하였다. 그 후 이관영은 용문산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으로 일제와 접전하다가 적탄에 맞아 1907년에 순국하였다.
당시 천도교 장로였던 이종훈은 1919년 2월 25일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을 배관(拜觀)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을 만난 자리에서 3․1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키로 약속하였다. 2월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3․1운동에 대한 최종회의에 참석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자진 신고하여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7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간도의 용정 등지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하며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일에 전력하다가 1931년에 만주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공훈록』, 『경기인물지』, 『내고장 경기도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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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申翼熙) 1894~1956 |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2대 국회의장 역임 (초월 서하리 생가 - 도지정 기념물 제13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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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정치가. 중부면 엄미리 산에 추모비가 있다. 초월읍 서하리 출생. 본관은 평산(平山). 이명은 왕방평(王邦平). 호는 해공(海公). 아버지는 장례원경(掌隷院卿) 단(檀)이고, 어머니는 정경랑이다.
1908년 한성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1913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6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와세다대학 재학 중 송진우, 안재홍 등과 지역적으로 나뉘어 있던 조선학생단체들, 즉 철북구락부, 명서친목회, 호서다화회 등을 묶어 ‘조선유학생학우회’라는 하나의 단체로 통일하였다.
이 단체에서 그는 총무, 평의회장 등의 직책을 맡으며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발간에 간여하였다. 일본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고향인 광주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설립하여 개화사상을 가르쳤다. 1917년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보성전문학교의 전신인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1919년 김시학․윤치호․이상재․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 봉기할 것을 협의한 후 대내외적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북경, 남경, 상해 등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고, 3월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으며, 그로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26년간 임정을 지켰다. 당시 상해는 일제의 횡포 및 압제를 덜 받을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온 동제사(同濟社)의 조직 및 신한청년단의 활동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장소로서는 좋은 곳이었다.
신익희는 이동녕․이시영․신규식 등 동지들과 함께 상해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의 허름한 집을 임시 사무소로 정하고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4월 10일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 정부관원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신익희는 이 회의에 경기도 대표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내무분과 및 외무분과 위원에 피선되어 임시헌장 10개 조를 제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는 상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후 내무총장․법무총장․문교부장․외무부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였다. 한때는 중국군 육군중장을 겸하기도 했고,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1929년에는 남경에서 민병길․윤기섭․김홍일 등과 함께 민족독립진영의 단결을 위해 한국혁명당을 조직하기도 했고, 그 후 한국독립당에 참여해 김구, 김규식 등과 가깝게 지냈다. 1935년에는 주의와 사상을 초월한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을 절실히 느끼고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분열되자 1937년 김인철 등과 함께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 제2진으로 조소앙 등과 함께 귀국하여 곧바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맡았으며, 1946년 봄 대한반공연맹을 조직해 이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국민대학 초대 학장과 자유신문사 사장, 대한체육회 회장직도 맡았다. 그 후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거쳐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광주에서 출마했는데 그의 명성이 워낙 높아 무투표 당선되었다.
제헌국회에 진출한 그는 초대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49년 한국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동안 그는 3선 국회의장으로 정치적 비중을 더해갔으며,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이 국민들에게서 멀어지자 1956년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해 5월 2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는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로부터 3일 후인 5월 5일 호남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초월읍 서하리의 생가는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 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되었고,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종로구 효자동 집 역시 2005년 2월 11일 서울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내고장 경기도의 인물』, 『대한민국독립유공자공훈록』, 『우남 이승만박사․해공 신익희선생 재조명』, 『경기인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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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金允經) 1894~1969 |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교육자 (남한산성면 광지원리에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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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한글학자․교육자. 중부면 광지원리에 묘가 있다. 오포읍 고산리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한결. 어렸을 때 한문을 배웠다.
15세가 되던 1908년 신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우산학교와 의법학교를 다녔다. 1911년 상동에 있는 청년학원에 입학했다가 주시경의 영향으로 국어를 연구하게 되었다. 졸업 후 경남 마산의 창신학교에 부임해 국어․역사․수학을 가르치다가 1917년 서울에 돌아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 창립회원이 되었고 1922년 수양동우회 창립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배화여학교에 부임하였다.
1926년 일본 릿쿄(立敎)대학교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조선문자의 역사적 고찰」이라는 졸업논문을 쓰고 1929년 졸업한 후 일본에서 돌아와 배화여학교에 복직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재판이 5년이나 계류(繫留)된 끝에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1942년 성신가정여학교에 부임하여 국어․지리를 가르치다가 그해 10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었고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해방을 맞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62년 연세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1963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맞춤법 제정, 표준말 사정에 힘을 기울였고 한글의 역사를 깊이 연구하여 주시경의 문법체계를 이어받은 『나라말본』(1948)을 지어 국어연구에 이바지하였다. 한글전용․가로쓰기․국어순화 등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다.
1938년 발간된 『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는 국어문자의 역사이자 국어학의 역사서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 문자에 대해 서술한 후, 훈민정음의 창제와 변천, 훈민정음에 대한 여러 학설을 역사적으로 정리했으며, 개화기 이후에 나온 국어문법서들을 자료와 학설을 통해 자세히 검토하였다. 이 밖에 『한글말본』(1946)․『어린이 국사』(1946)․『주시경선생 전기』(1960)․『새로 지은 국어학사』(1963)․『한결 국어학논집』(1964) 등의 저서가 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내고장 경기도의 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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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희(姜正熙) 1918~1996 |
광주 출신의 유학자, 교육자, 성균관 총무처장 전례연구위원장 역임. 초월초등학교 교가 작사(초월 신월리에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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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유학자. 초월읍 신월리 산38에 묘가 있다. 초월읍 지월리 출생.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국사菊史. 아버지 강규형이고 어머니는 덕수이씨이다.
5세 때 성균관 진사인 석경 김두현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9세 때 4서 3경을 익혔다. 16세에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초등학교)에 편입하여 1년 만인 1935년에 졸업하였으나 집안이 넉넉지 못해 독학으로 이듬해 3종 교원 시험에 합격하여 양곡공립보통학교에서 교육자로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도척공립보통학교(현 도척초등학교), 초월국민학교(교감), 광주공립중학교, 광주농업고등학교(현 광주중앙고등학교), 안양예술고등학교(교장) 등 초중고는 물론 서울산업대, 동덕여대 등에서 철학 강사로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였다.
1957년 40세 때 성균관대학 경제학사 및 동대학원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59년 내무부 사무관으로 전직하여 서울시의 각 부처 과장직과 용산구청장 등을 역임하였다. 관계를 떠난 1970년부터 약 5년간은 교통공론사(부사장), 유림월보사(주간) 등 언론사에서 활동하였으며, 1976년 유교의 본산인 성균관 전학에 임명되었다. 1996년 3월 7일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강정희는 성균관의 총무처장과 전례연구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중요무형문화제 제85호로 지정된 석전대제의 전형을 재정립하여 1995년 11월 1일에 문화체육부장관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제308호)로 인정받았다(1996년 3월 7일 해제). 이 밖에도 각종 대중매체를 이용해 국민실천예절 등 유교문화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향교의례의 합리적인 향상을 위한 석전의례반 교육생을 양성하여 전국 234개 항교 의전 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시를 즐겼고, 서예에도 능하여 많은 비문과 축시, 문집의 서문, 상량문 등 약 90편을 썼다. 초월초등학교의 교가를 작사하여 지금도 불리고 있으며, 진주 봉산사 및 성균관 유림회관의 현판을 썼다. 저서로는 『어린이 예절』, 『중용의 연구』가 있다.
자료 : 성균관유도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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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광우(南廣祐) 1920~1997 |
광주 출신의 국어학자,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역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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