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재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5 조회 : 226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712년(숙종 38) 12월 충청도 제천현 유원(지금의 제천시 대향동 느릅원)에서 안극(安極)과 전주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를 본향으로 한 광주안씨는 조선시대에 명문가였으나, 남인에 속하여 조선후기의 가세는 좋지 못했다. 1736년(영조 12) 봄에 덕곡(지금의 중대동)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실학의 종장(宗匠)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에게 사사(師事)하며 학문의 성취를 이루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을 포함하여 약 48종에 달하는 저서를 저술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대부분을 이택재(싧澤齋)에서 지었다. 안정복이 자신의 서재를‘이택재’라 이름 지은 이유는 자신을 비롯한 성호 이익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학문을 궁구했던 것을 후손들에게 알리고 그 전통을 계승하고자하는  의미에서였다고 한다.
이택재는 1761년 창건 이후 안정복 생전인 1786년(정조 10)에 한 차례 다시 지었으며, 약 100년 후인 1880년(고종 20)에 후손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근래 보수하면서 약간 바뀌었으나 골격은 유지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목조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 퇴칸을 개방하여 제사지내는 용도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어 조선후기 전형적인 제사 건물의 격식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처마를 받치는 공포를 짜지 않은 민도리집 홑처마로 되어 있다. 현재 일부 부재를 후대에 교체하면서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가구 구조나 기둥 크기 등은 조선후기 건축기법이며, 전체적으로 안정복의 검약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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