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무관(演武館)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3.11.18 조회 :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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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관은 무술 연마를 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로 수어 또는 연병관, 학무당이라고도 불렸다. 산성로타리에서 동쪽으로 210m 지점의 도로변에서 북쪽으로 약 42m 지점에 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332m로 대략 320m 전후인 도로변에 비해 12m 정도 높은 위치여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연무관의 규모는 100평이며, 처음에는 연무관 또는 학무당이라고 하던 것은 숙종이 당시 수어사이던 이재호로 하여금 개축케 한 후 연병관이라 편액을 내렷고 정조 3년(1799)에는 수어영으로 바뀌었으며 정조 19년(1795)에는 수어청이 혁파되면서 수어영에서 연무관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혀재 건물의 중앙에 연무관이라는 현편이 걸려 있다. 이곳에서 장졸의 조련과 무술시합을 열어 뛰어난 무재를 뽑아 중앙으로 보냈다고 한다.

【왕이 친히 이곳에 임어하여 여주,이천,광주 세고을의 문무사와
수어청에서 따라온 장사를 시험보이고, 급제를 내리거나 상을
주는데 등수에 따라 각각 차등이 있었다. 이날 밤… 연병관에서
매화법을 보시니 시위하였던 문부백관이 모두 장관이라 하였다.
왕도 탄식하며 “이것이 원승환이 시험한 영원의 홍이포라는
것이다. 병자년 이전에 이 법을 알았던들 그런 변을 당했겠는
가“ 하셨다. 】

이것은 정조 3년(1779) 8월8일 정조 임금이 여주의 두 영능에 전배하러 갔다가 귀경길에 이곳 연무관에서 무술시합과 홍이포의 시범을 구경한 내용이다. 또한『남한지』에는 연무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옥같이 단단한 진터와 철벽같이 견고한 성곽이 높은 산 위에 축조
되어 있고, 풍운을 탄 용처가 기이한 힘을 내는도다. 궁상각치우
5음 6율이 경내에 진동하여 삼밀(신밀, 구밀, 의밀)을 본에 전하
니 삼본(위는 덕본, 녹은 공본, 직은 능본)이 공허하도다. 】

【연병의 무술연마 예와 이제 다르랴만
용과 맹 심신단련 그 자취를 상상할제
두 그루 떡갈나무야 너는 알까 묻노라】

한편 천주교 남한산성 성지개발위원회의 자료에는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때에 신자들을 무술 연마의 대상으로 삼아 이곳에서 목검으로 찌르고, 때리고 하는 등의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연무관은 성내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파출소 맞은편 구릉에 높직하게 지어져 있다. 연무관 정면 193m 지점의 순교성지 성당 부근에 과녁이 있어 이곳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한다.
현재 연무관의 전면쪽은 약간 경사지고 편편한 전정이 잇으나 그 폭이 건물규모에 비해 좁은 편이다. 이에 비해 건물의 후면쪽은 전면쪽과는 달리 비교적 시야가 트이고 넓은 후정이 전개되어 있고 후면의 동쪽도 넓은 부지가 마련되어 있다. 현재 건물 정면 앞의 경사진 지형에 여러 단의 자연석 계단을 길게 설치하여 주진입로를 만들고 부 진입로는 전면 좌측에 마련되어 있어 도로쪽에서 진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연무관의 전면 좌측과 전방에는 수령 400년 이상된 고목 2주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연무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규모가 크고 높이가 높은 육중한 건물로서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인데 정면 쪽은 2단의 기단을 축조한 이중 기단 형태이다. 이중 기단의 중앙에는 화강석 계단을 1개소 놓았다. 건물의 기단은 인근에서 채석한 것으로 보이는 비교적 장척의 화강석으로 큼직큼직하게 다듬어 설치되어 있다.
정면쪽과 측면쪽 고멕이벽은 전벽돌을 치장쌓기하였는데 환긱를 뚫어 놓았다. 이 전벽돌 치장쌓기는 근래의 보수시에 새로 전부 다시 쌓은 것이다. 또한 건물 후면쪽과 양측면에는 자연석으로 배수로를 겸한 석축을 기단과 인접하여 설치하였다. 양측면은 전후면의 지형레벨에 차이가 있어 기단을 뒷부분에서 한단 접어 꺽었으며 이에 따라 기단바닥의 레벨과 초석의 레벨도 조정된 모습이다.
주초석은 정면과 양측면 주초석을 높이가 높은 장주초석으로 하였는데 팔각으로 모를 접은 형식으로 모양을 내었으며 후면쪽 열만 자연석 주초석이 사용되었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이 있는 굵직한 원기둥이 사용되었으며 전면 기둥에는 판재를 둥글게 다듬어 주련을 붙였다. 건물 내부의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전면쪽은 창호를 내지 않고 완전히 트여 있어 개방된 모습이고 후면쪽 퇴간열도 바깥쪽을 벽체로 막지 않고 마루도 깔지 않아 회랑형식으로 트여져 있다.
가구구조는 모두 굴도리가 사용된 2고주 7량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공포는 주심도리 부분에 초익공을 둔 조선후기 익공계 양식이다. 귀공포에는 귀한대 제공을 두지 않았다. 공포부재들은 전면과 후면쪽의 형태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며 같은 종류의 부재라도 여러 가지의 형태를 갖고 있다. 중수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연무관 건물의 평면형태와 가구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들이 발견된다. 정면이 5칸인데 반하여 후면은 6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면 어칸에 기동울 1본씩 더 세운 것이다. 따라서 이 기둥열의 건물내부 마루칸 쪽은 대량이 없이 고주주두에 단재의 보머리만 양쪽으로 돌출시켜 놓은 형상이다. 또한 건물내부 중앙간 고부열 앞에는 약간 거리를 두어 기둥을 각각 1본씩 더 세워 대량 밑에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로서 비교적 길게 내밀어져 있다. 용마루의 양단과 합각마루의 끝부분에는 각각 1개씩의 용두를 놓았으나 추녀마루 끝에는 망와만이 놓여 있다. 그리고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에는 양성바르기를 하였고 건물 네 귀의 사래 끝부분에는 토수를 끼워 치장하였다. 건물 규모로 미루어 지붕 끝을 와당으로 처리했음직도 한데 지금 현재는 기와끝이 와구토바르기로 마감되어 있다.
건물 측면의 합각벽은 박공과 풍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내부의 천장은 굵은 연목의 몸이 그대로 노출되는 연등천저이고 외지반자쪽만 판재를 대었다. 건물 내외부 모두 모로단청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중앙간 대량에는 전.후면에 용문을 그리고 측면쪽 대량의 한쪽 면에도 봉문을 별화로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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