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안동(京安洞)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0 조회 : 3063
경안동의 유래

우리나라고대 역사를 보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나라를 빼앗기고 남으로 망명하여 회안국(淮安國)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면 회안이라는 곳이 어디냐 하는 학설이 분분 하지만,가장 유력한 것이 지금의 광주시 경안동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근세까지도경안동에는 회안교(淮安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조선 초기의『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경기도편에는 경안역(慶安驛)이 나오는데,주(州)에서 남쪽으로 50리에 있다고 기록되었고, 고려 공민왕(恭愍王)이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급히 가던 중 이 驛에서 머물렀다고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경안(慶安)이라는 지역의 역사는 자못 깊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조선시대의 경안역(慶安驛)은 지금의 경안동이 아니고 역동(驛洞)인역말이었다.

지금의 경안동(京安洞)은 조선시대에는 광주유수(廣州留守)산하에 경안면(慶安面)으로, 도직장(都直長)을 두어 관리하였고,대한제국(大韓帝國) 시절, 면제(面制)가 실시되면서 면장(面長)을 두게 되고각리(各里)에는 구장(區長)을 두었었다.
경안면(慶安面)이 광주면(廣州面)으로바뀐 것은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일이다. 광주면(廣州面) 경안리(京安里)였다가광주읍(廣州邑) 경안리로 바뀐 후, 2001년 3월 광주군(廣州郡)이 광주시(廣州市)로승격되면서 경안동(京安洞)이 되었다. 경안이라는 지명(地名)도 조선시대까지경안(慶安)으로 쓰여 왔으나, 1917년 광주군청(廣州郡廳)이 남한산성에서경안면(慶安面) 경안리(慶安里)로 옮겨 오면서 일제(日帝)에 의해 경안(京安)으로표기되기 시작하였다. 광주읍치(廣州邑治)가 약 300년간 남한산성에서 있다가,1917년 이후에는 경안면(慶安面)으로 옮겨진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군청(郡廳)이경안으로 옮긴 곳이 지금의 경안동사무소가 있는 곳이다. 군청이 경안리로 오면서광주초등학교(廣州初等學校)가 같은 해에 개교하였다. 광주군청이 경안으로이전하게 된 것은 서울에서 지금의 광진교(廣津橋)를 거쳐,경충국도(京忠國道)(서울~충주)가 신설되면서이다. 당시에는 제방(堤防)이 없어장마가 지면 온 동리가 물이 들어 피해를 보게 됨에, 당국에 건의하여 지금의제방을 쌓게 되어 1937년 경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6.25전란으로광주읍(廣州邑) 소재지인 경안리(京安里)가 전소(全燒)되면서 광주군청(廣州郡廳)도불타 없어지게 되었고, 초ㆍ중학교 교사(校舍)도 불타 없어져서, 학생들이노천(露天)에서 수업을 한 참상(慘狀)도 있었다. 수복 후 광주초등학교 작업실일부가 남아, 그 곳을 수리하여 임시로 군 청사(郡廳舍)로 사용하다가 1955년 현시청사(市廳舍) 자리인 송정동(松亭洞)으로 이주(移住)하기에 이르렀다. 경안동은광주(廣州)의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교육의 중심지이고, 근대 사회발전 과정에서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광주(廣州)의 시청소재지인 중심지역이다.

조선시대에 경안역(慶安驛)이 있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는경안발소(慶安撥所)가 있었으며, 경안주막(慶安酒幕)이 있었다.
조선 후기경안면(慶安面)의 행정구역을보면,

역촌(驛村)ㆍ전지리(前枝)ㆍ후지리(後枝)ㆍ장내동(墻內)ㆍ사동(寺洞)ㆍ주막리(酒幕)ㆍ쌍령리(雙嶺)ㆍ목감리(木甘)ㆍ회덕리(回德)ㆍ조현동(鳥峴)ㆍ탄동(炭동(洞))ㆍ벌원리(筏院)ㆍ송정리(松亭)ㆍ수하리(水下)ㆍ중리(中里)ㆍ대동(垈洞)ㆍ삼리동(三里)ㆍ직동(直洞)ㆍ태전리(胎田)등 19개 동리(洞里)가 있었다.

광주군청이 경안면(慶安面)으로 이전하기전에는 경안리(京安里)라는 행정구역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즉, 18세기에는경안면의 행정구역은 역촌(驛村), 경안면(慶安面) 1里 그리고 경안면 2里로 3개행정리가 있었다. 1리는 지금의 송정동 관할구역이고, 2리는 지금의 광남동 관할구역이었다. 그 때는 지금의 경안동은 경안천(京安川) 제방이 없었던 관계로 장마에물이 자주 들어 마을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고 지금의 '안골' 및 '갓골'에만인가(人家)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안역(慶安驛)은 지금의 역동(역말)에 있었으며,경안주막(慶安酒幕)은 지금의 쌍령동 주막거리에 있었다. 여기서 주막(酒幕)이라함은 조선시대의 관영(官營) 숙박시설(宿泊施設)을 말한다.

1914년일제(日帝) 강점기에 행정구역 축소 조정으로 다음과 같이 통폐합 하였다. 이 때마을 이름은 모두 리(里)로 단일화하였다.

경안리(京安里) - 경안리를 새로만듦.
역리(驛里) - 역촌을 개칭함.
장지리(墻枝里)) -전지리ㆍ후지리ㆍ장내동ㆍ사동 등 4개 마을을 합침.
중대리(中垈里) -중리ㆍ대동을 합침.
목현리(木峴里) - 목감리와 조현동을합침.
송정리(松亭里) - 송정리와 수하리를 합침.
회덕리(回德里) - 회덕리와군내면(郡內面) 이조현리(두새오개)를 합침.
쌍령리(雙嶺里) - 쌍령리와주막리를 합침.
탄벌리(炭筏里) - 탄동과 벌원리를 합침.
삼리(三里) -삼리동을 그대로 둠.
태전리(胎田里) - 태전리를 그대로 둠.
직리(直里)- 직동을 개칭함.
목리(木里) - 오포면(五浦面) 관할에서 1973년에광주면(廣州面)으로
편입되었음.

위와 같이 13개 里의행정구역(行政區域)은 광복 후에 6ㆍ25 전란을 겪고, 5ㆍ16 군사정권(軍事政權)이들어서고 문민정부 시절 광주군(廣州郡)이 市로 승격되기 전까지 계속 이어져왔고,현재도 법정리(法定里)로서 존재하고 있다. 다만 리(里)를 동(洞)으로 고쳐 부를뿐이다.

1956년 8월 자유당(自由黨) 시절에 처음으로 지방자치(地方自治)가실시되어 초대 면장(面長)과 면의회(面議會) 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초대민선(民選) 면장(面長)으로 남상범(南相範)이 당선되고 면의회(面議會)가 다음과같이 구성되었다.

의 장 김교진(金敎晋) 광주면 경안리
부의장강성일(姜聲一) 목현리
의 원 박용공(朴容功)탄벌리
이관응(李寬應) 태전리
이종승(李鍾承) 송정리
한경록(韓景錄)역리
류광열(柳光烈) 경안리
김종소(金鍾紹)경안리
임주섭(林柱燮) 삼리
박송호(朴松浩)회덕리
남기호(南基鎬) 직리
정하익(鄭夏益)장지리

제2대 면장(面長)과 면의회(面議會) 의원선거에서도 면장(面長)에남상범(南相範)이 재선되었고, 면의회(面議會)는 다음과 같이구성되었다.


의 장 강성일(姜聲一) 광주면 목현리
의 원박철희(朴喆熙) 경안리
이기범(이기범)경안리
황원섭(黃元燮) 역리
한경록(韓景錄)역리
류근수(柳根秀) 경안리
최영수(崔榮秀)쌍령리
이길구(李吉求) 장지리
서강덕(徐康悳) 장지리
박용공(朴容功)탄벌리
이관응(李寬應) 태전리

1979년에는광주면(廣州面)이 읍(邑)으로 승격되었고, 2001년 3월 광주군이 광주시(廣州市)로승격되면서, 장지리ㆍ태전리ㆍ직리ㆍ목리ㆍ중대리ㆍ삼리 등 6개 법정리(法定里)를합하여 광남동(廣南洞)이라는 행정동(行政洞)이 탄생하게 되었고,송정리ㆍ회덕리ㆍ탄벌리ㆍ목현리 등 4개리를 합하여 송정동(松亭洞)이라는행정동(行政洞)을 만들었다.
경안동은 경안리ㆍ역리ㆍ쌍령리 등 3개리를 합하여행정동인 경안동을 만들었고, 광주읍사무소가 경안동사무소가되었다.

경안동의 지형지세

경안동은 경안천과 목현천(木峴川)이합수(合水)하는 삼각주(三角洲)에 소재한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장마가 지면,양쪽에서 물이 흘러들어 민가(民家)가 살 수 없는 불모지(不毛地)였다.
그 당시경안의 마을은 주로 산 밑에 형성되어 있었고, 지금의 경안동사무소가 위치한 곳,그리고 제방(堤防) 밑에는 마을이 없었다. 예전에는 3번 국도(國道)가 서울 강동구천호동에서 현 하남시를 거쳐 중부면 광지원리를 경유하여 중부면 상번천리솔치(松峴)고개를 넘어 지금의 경안동 중앙도로(中央道路)를 통하여 개설되어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경안 제방축조(堤防築造) 공사가 시작되어 4년 여 만에완공됨으로써 장마로 인한 피해가 줄어들게 되자, 마을은 점점 신작로(新作路)를중심으로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관말(官村)
조선조에 군방의관사(官舍)가 있던 마을이라 하여 관말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광주중학교 뒤편이다.

갓골(柯谷)
경안동에서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가장자리에 위치한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광주성당 뒤쪽에 있는마을이다.

안골(內谷)
경안동에서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아늑한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해태아파트가 있는마을이다.
이 마을은 해주 정씨(海州 鄭氏)와 파평 윤씨(坡平 尹氏)의世居地이기도 하다.

장터
경안동의 현재 재래시장이 있는 곳이다. 이 곳市場은 조선조 때부터 5일장이 섰는데,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도 3일과8일에 장이 섰고, 경안역(慶安驛)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안장(慶安場)의역사는 적어도 300년 이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이 곳에우시장(牛市場)도 함께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 장터는 경안역(慶安驛)에속하였다.

파발교(擺撥橋)
사내개울(목현천)을 건너는 다리. 임진왜란때까지 이 다리 근처에 파발막(擺撥幕)이 있어 남한산성으로 파발을 띄우던곳이다.

큰다리(경안교)
경안에서 이천 방면으로 놓여 있는 지금의경안교를 '큰다리'라고 불렀다.
경안교는 원려 고려시대부터 놓여 졌던 것으로보인다. 『중정남한지』에 기록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경안천교(慶安川橋)
州의 남쪽 30리 慶安面에 있다. 高麗의 김방경(金方慶)이대마도(對馬島)
를 정벌할 때 경안교(慶安橋)를 쌓았는데, 돌로 무지개모양을 만들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다리 아래 연못 속에 처음으로 毒龍이있어서 다리
를 놓으려 하기만 하면 질풍(疾風)과 풍우를 일으켜 일을 마치지못했는
데, 신승(神僧) 한 사람이 있어 묘회암(妙會庵)으로부터 와서 물에들어가
용과 싸우기를 한참이나 하더니, 붉은 피가 떠오르고 중은 이내사라지고
난 뒤 드디어 다리가 완성되었다. 그 공을 기념하여 다리 가에 碑를세었
다고 하나 세월이 오래 되자 상하고 부러졌으며, 다리 역시 허물어져지
금은 완전히 없어졌다.

동삼구(東三區)
왜정시대(倭政時代)에경안리를 동1구ㆍ동2구ㆍ동3구로 나누어 부른 적이 있는데, 동3구는 지금의경안동사무소에서 길을 건너 있는 마을을 말하였고, 동2구는 지금의 경안동사무소가있는 쪽의 마을이고, 동1구는 갓골과 변두리를 칭하였다.

사내개울(목현천)
목현동에서 회덕ㆍ탄벌동을 거쳐 경안천으로 흐르는개천으로 예전에는 홍수로 자주 범람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의 목현천을말한다.

경안천(京安川)
지금의 경안천은 아주 오랜 역사 속에 변함없이흐르고 있는 하천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안천이 범람하기를 거의 매년 거듭하여지금의 경안동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못하였고, 제방이 축조된 1930년대 중반부터본격적인 마을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