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리(水陽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3 조회 : 2025
마을의 유래와 위치

이마을은 조선조 말기 까지 구수동(九水洞), 구양동(九陽洞), 복상동(卜尙洞)등 3개마을이었으나,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구수동(九水洞)의'수'(水)와 구양동(九陽洞)의 '양'(陽)을 따서 '수양리'(水陽里)로 부르게 되었다.수양리는 4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는데, 지금은 4개 행정리(行政里)로 분할하여1~ 4리까지 있는 비교적 큰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산악(山岳)으로 되어있어, 농경지가 많지 않고, 산업화되면서 이 지역에도 중소기업체가 많이 입주하여있다. 예전에는 양잠(養蠶)을 하는 농가가 많았고, 1970~80년대 까지만 해도 인삼을재배하는 농가가 많았는데 현재는 별로 없다.

곤지암리에서 3번 국도를따라 이천(利川) 방면으로 가면서, <중부골프장>을 지나면 수양리가 나온다.동으로는 실촌면 신촌리(新村里)와 이천시(利川市) 신둔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북쪽으로는 실촌면 봉현리(鳳峴里), 서북쪽으로는 곤지암리와 열미리(悅美里)에닿았다. 서쪽은 도척면 진우리(鎭牛里)가 된다. 이 마을 가운데를 3번 국도가관통(貫通)하고 있다.

마을의 문화유적

심종민(沈宗敏)의묘
수양리 석문동(돌문이)에는 조선조 광해군(光海君)대의 문신(文臣)으로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종민(沈宗敏)의 묘가 있는데, 그는 우계(牛溪) 성혼(成渾)과율곡(栗谷) 이 이(李 珥)의 문인(門人)으로 관직에 나아가 개천군수(价川郡守)를지냈고, 효성이 지극하고 청빈(淸貧)하였다. 그 외에 그의 후손들의 묘가 나란히있다.

현덕창(玄德昌)의 묘
조선 영조(英祖)대의 인물로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부호군을 역임한 현덕창(玄德昌)의 묘가 있는데, 그의묘비(墓碑)의 글씨는 선조(宣祖)대의 명필인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를집자(集字)하였다.

수양리 195번지에는 300년 된 느티나무가 두 그루있는데, 모두 광주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구양동(九陽洞)-갱이-수양3리
이 마을 한복판 양지 바른 곳에 거북의형상을 한 큰 바위가 있어 '구양동'(龜陽洞)이라고 불러왔는데, 현재는'구양동'(九陽洞)으로 칭하고 있으며, '구양이' 혹은 '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구양'이라는 발음이 '갱이'로 변한 것이다.
이 마을에는 약 300년 된느티나무가 있어 광주시 보호수 제62호로 지정 되어 있다. 1983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수양3리가 되었다.

복상골(伏象)-수양4리
이 마을을 에워싸고있는 산세(山勢)가 마치 코끼리가 엎드려 있는 것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기 전 까지는 복상동(卜尙洞)으로 기록되어있다. 돌문이(石門洞)와 함께 1983년 수양4리가 되었다.

돌문이(石門洞)-수양4리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마을명칭으로, 이 마을입구에 조선 명종(明宗)때에 임꺽정이 돌로 쌓아놓은 성(城)이 있었고, 거기에 큰돌문이 있었다고 하여 '돌문이' 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복상동과 함께수양4리이다.
이 마을 서쪽 산자락에는 청 송 심 (靑松沈)씨 묘역(墓域)이있는데, 조선 광해군대(光海君代)의 문신(文臣)이며 이율곡(李栗谷)의 문인이고,평안도 개천군수(价川郡守)를 지낸 심종민(沈宗敏)과 그의 후손들의 墓가있다.

명신촌(明新村)-어둔골-수양1리
이 마을은 양쪽으로 높은 산이막혀 있어, 이웃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를 오면, 긴 봄날에도 해가 일찍 떨어져,금방 어두워진다고 하여 '어둔골'이라고 불렀는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시작되면서 마을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여 밝고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정진하여 잘살아보자고 하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명신촌(明新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982년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양1리가 되었다.

구수동(九水洞)-구시울-수양2리
이 마을의 산세(山勢)가 비룡(飛龍)이상천(上天)하는 형이라고 한다. 용은
물이 있어야 상천(上天)할 수 있다고하여, 처음에는 용이 물을 구한다고 구수동(求水洞)이라고 하였으나, 나중에는'구수동'(九水洞)이라고 하였다. 198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양2리가되었다.
이 마을에는 조선(朝鮮) 영조대(英祖代)의 무신(武臣)인절충장군(折衝將軍) 현덕창(玄德昌) 부자(父子)의 묘(墓)가있다.

묘지골
구수동(구시울)에 있는 골짜기인데, 공동묘지가 있어서'묘지골'이라 부른다.

안터골
'구시울'에서 안쪽에 있는마을이다.

부처재
옛날 이곳에 부처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복상골에 있다.

매봉재
매가 사냥을 할 때, 이 곳에서 전망이 잘 보이기때문에 여기서 목표물을 살피고 날아가 잡았다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쿵쿵재
나무꾼들이 나무를 해서 짊어지고 이 곳을 지나노라면,발밑에서 '쿵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복상골에있다.

큰다리골
지금은 없으나, 예전에 이 곳에 큰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붙여진 이름이다.
'돌문이' 마을에 있다.

호인들(胡人)
예전에중국인들이 이 곳에서 석재(石材)를 채취하였다하여 호인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돌문이'마을에 있다.

말씨골
예전에 이 곳에서 말(馬)이 교미(交尾)하는장소여서 말(馬)의 씨를 받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문이' 마을 뒷산에있다.

서향산(西向山)
돌문이 마을의 건너 산인데, 남쪽부터 서쪽까지길게 뻗어 있는 능선이 서쪽을 향해 있다고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산제터(山祭)
예전에 이 곳에서 산제(山祭)를 올리던 터를말하는데, 이때 산제를 지내려고 날짜를 잡으면, 이 곳에 금줄을 매고 외부인이출입을 못하도록 하고, 특히 제관(祭官)으로 선발된 마을 주민은 집안에잡인(雜人)의 출입을 금하고, 산제터 밑에 있는 물에서 목욕하고 제를 올렸다고한다. 돌문이에 있다.

다랑이골
논다랑이가 많은 골짜기여서 붙여진이름이다. 돌문이에 있다.

움터골
예전에 이 곳에 움이 있었다고 하여붙여진 이름이다. 돌문이 뒤에 있다.

너븐들
'넓은 들'이란 뜻인데,방언으로 '너븐들'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돌문이에 있는 들판인데, 이 마을에서가장 넓은 들이다.

괭이재
복상골에 있는 작은 고개로 예전에 이 곳에고양이가 많았다고 한다.

솔고개
복상동에서 부항리로 넘어가는고개인데, 소나무가 많아서 '솔고개'라고 하였다.

삼천모랭이
돌문이에서신촌리 방향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인데, 이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면, 그 안이 넓어서조선 임진왜란 때 삼천병마(三千兵馬)가 이 곳에 피신한
적이 있다고 하여 후에'삼천모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죽골
명신촌에 있는 골짜기인데,'소죽골'이란 연유는 예전에 소도둑이 소를 훔쳐다가 이 골짜기에서 잡았다고 한다.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소 잡아먹은 골이라 하던 것이 줄여져서 '소죽골'이되었다.

아래땀
명신촌 마을의 아래쪽에 있는 동리여서 붙여진이름이다.

웃땀
명신촌의 위쪽에 있는 동리여서 붙여진이름이다.

작은다리골
구시울에 있는 골짜기인데, 작은 다리를 건너골짜기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국수봉골(國守峯)
명신촌의 뒷산봉우리를 말한다. 나라를 지키던 산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를 넘으면도척면 진우리가 된다.

작살벌
명신촌에 있는 들이다. 예전에는 이곳개천에서 작살로 물고기를 잡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멍골
명신촌에있는 골짜기인데, 마치 두멍(큰 물독)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며기납다리
구양동에 있는다리이다.

안산골
구양동에 있는 골짜기인데, 마을 앞산에 있는골짜기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설태간
구양동에 있는 옛 활터이다.

장창이집골
구양동의 동북쪽에 있는 산골짜기인데, 예전에 장창이라는사람이 이 골짜기에서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그 집터에는 앵두나무가있다.

부처밭골
구양동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에 옛 절터가 있고, 지금은밭으로 되었으나, 이 곳에서 불상을 발굴하였다고 한다.

빈굉이고개
구양동의 부처밭골 위에 있는 산 고개를 말한다. 예전에 이고개 밑에 디딜방아가 있었는데,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방아를 찧을 곡식이 없어빈 방아를 찧었다고 한다. 방아공이를 방언으로 방아굉이 라고 하여 빈굉이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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