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향리(五香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3 조회 : 1315
마을의 유래와 위치

이마을에는 5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즉 무학봉(舞鶴峯), 맹자봉(孟子峯),자지봉(紫芝峯), 국수봉(菊樹峯), 노적봉(露積峯) 등이다. 다섯 개의 봉우리를마을 신앙(信仰)으로 숭배하고 향기롭게 살아 왔다 하여 '오향리'(五香里)라고 불러왔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조선시대(朝鮮時代) 이전부터 오향리라고 불려진 것으로보인다.

지금은 상오향리(上五香里)와 하오향리(下五香里)로 분리되어있으나, 조선조 말까지는 오향리(五香里)로 있었다. 대한제국(大韓帝國)시절행정단위가 면(面)으로 조직되면서 실촌면사무소(實村面事務所)가 이 마을에설립되었고, 1919년 기미년 3.1독립운동 당시에는 실촌면 만선리에 거주하던이병승(李秉昇) 씨가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3월1일 독립만세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로부터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입수하여귀가한 후 봉현리 거주 문홍규(文鴻圭) 씨와 상의하여 두 사람이 주동(主動)이 되어광주(廣州)에서는 처음으로 3월 12일에 면민(面民)들을 인솔하고 오향리에 있는실촌면사무소로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때이선리(二仙里)의 구장(區長)이던 오여첨(吳呂添)이 많은 군중을 동원하였다. 이세사람은 후에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무수한 고통을 겪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마을은 실촌면 열미리에서 44번 국도를 타고 양평방면으로 가다가 열미리와접해 있는 마을로서 아늑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며, 예로부터 명현(名賢)이 많이탄생하기도 하였다.

마을의 문화유적

조선백자 도요지
이마을에서는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 까지 조선백자를 굽던 도요지가 6개소에서발견되었다. 그 중 '목장말'에서 발굴된 것은 문화재청에서 사적지(史蹟址)로지정하였다.

송 일(宋 馹)의 묘
송 일(宋 馹)은 본관(本貫)이여산(礪山)이며, 자는 덕보(德甫), 호는 반학(伴鶴)이고 장령(掌令)송승희(宋承禧)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으로 1557년에출생하여 선조(宣祖)28년(1595)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가 되었고, 차례로 승진하여 여러 관직을지냈으며, 선조(宣祖)40(1607)년에는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치적(治績)을남겼고, 광해군(光海君)3년(1611) 행주목사(幸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614)년황해도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1616년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된 뒤병조참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들어갔다.

송시길(宋時吉)의 묘
조선중기(朝鮮中期)의 문신(文臣)으로본관(本貫)은 여산(勵山)이며, 자는 중립(仲立)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역임한 송일(宋馹)의 아들이다. 인조(仁祖)1년(162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관직을 거쳐, 인조(仁祖)26년(1648)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하고,효종(孝宗)3년(1652)동승지(都承旨), 경기관찰사 등을 지냈다. 효성이 지극하여잠시도 부모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가면서도 부친의묘에 성묘하고 떠났다.

하오향리에는 수령이 400년이 넘은 팽나무가 광주시보호수 제59호로 지정되어있다.

상오향(上五香)
오향리의 중심마을로44번 국도에서 서북쪽으로 산 밑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어서 '상오향'이라고부른다. 상오향에는 박촌말. 송촌말이 있는데 각기 자연부락을 이루고 있는집성촌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촌말(朴村)
송촌말과 마주보고 있는마을이다. 400여 년 전부터 밀양 박씨들이 입향 하여 세거(世居)해오고 있는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송촌말(宋村)
박촌말과 마주 서 있는마을로서 조선 중기(中期)에 병조참판을 역임한 송 일(宋 馹)의 후손들이입향(入鄕)하여 세거하여 오고 있어서 붙여진이름이다.

안오향
상오향에서 골프장이 있는 산으로 1km 정도 들어가서형성된 마을이다. 오향리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이름이다.

하오향(下五香)
오향리를 지나가는 44번 국도변 좌우로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윤촌말(尹村)
하오향리의 중심마을이다. 약400년 전에 파평 윤씨가 입향하여 세거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4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거주한다.

면사무소터
상오향리 313번지에실촌면사무소가 있었다. '관청(官廳)터'라고도부른다.

요골
상오향리에서 북쪽으로 약 700m 거리에 있는 골인데,지금은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어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있다.

노적봉
하오향리의 동쪽 앞산 봉우리를말한다.

능골
상오향리 북쪽 여산 송씨(勵山宋氏)의 조상묘역이 있는곳으로 큰 산소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목장말
이곳에 목장이들어서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에서 조선백자도요지가발굴되었다.

도룡재
상오향리에서 약 500m 북쪽에 여산 송씨의 조상으로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를 역임한 송시길의 묘소가 있는 곳을말한다.

가새골
오향리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양평방면으로 가다가눈치고개를 넘기 직전 좌측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눈치고개
오향리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약 1km 지점에 있는 연곡리로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도장골
하오향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를말하는데, 지금은 전원주택지가 되었다.

아래들
하오향리의 아래쪽에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열미들이라고도 부른다.

중보들
중간말 앞에있는 논들을 말한다.

물방아거리들
윤촌말 앞에 있는 들인데, 예전에물방아가 있었다.

물건너들
윤촌말 앞의 오향천 건너에 있는 논들이어서붙여진 이름이다.

김촌말(金村)
하오향리의 중간말을 '김촌말'이라고도한다. 경주 김씨(慶州金氏)들이 살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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