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곡리(老谷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3 조회 : 1538
노곡리의 유래와위치
노곡리는 속칭 '노루목'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말까지노곡동(老谷洞)이라고 불러왔다. 이 마을에서 상림리 방향으로 서 있는 산의 모양이마치 노루가 새끼를 데리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형국이어서 '노루목'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겼다. 도척면사무소(都尺面事務所)의 소재지이고, 도척면에서 가장 큰동리이다. 광주시청(廣州市廳)에서 노곡리까지는 약 16km 거리이며, 마을의 분포는'노루목' '안터말' '고녹골' 등 3개 자연부락(自然部落)으로 형성되어 있다.
1923년 궁평리(宮坪里)에 소재하였던 면사무소가 노곡리에 거주하던 연정우라는유지가 그의 토지(土地)를 면사무소 용지로 희사하여, 그 해에 면사무소청사(廳舍)를 건축하고, 도척면 2대 면장 신문균(申汶均)씨가 재직 시에 면사무소를이전하면서 노곡리가 면 소재지가 되었다. 노곡리의 성씨로는 곡산 연씨(谷山延씨)와 경주 김씨(慶州 金氏)를 위시하여 30여 개 성씨가 분포되어있다.

곤지암에서 진우리(鎭牛里)를 경유하여 노곡리를 거쳐 이천시 마장면오천리로 통하는 도로가 있으며, 곤지암에서 궁평리ㆍ도웅리ㆍ상림리를 거쳐노곡리를 경유, 유정리ㆍ추곡리로 해서 용인시 양지읍으로 통하는 도로가 형성되어있다.

마을 안으로 노곡천(老谷川)이 흐르는데, 이 하천(河川)은 아주옛날에는 노곡강(老谷江)으로 표시된 옛 지도도 있으나, 지금은 준 하천에불과하다. 노곡천은 방도리를 기점으로 유정리를 거쳐 노곡리의 용머리까지이어지고, 추곡리를 기점으로 유정리를 거쳐 용머리에서 노곡리를 가운데 두고합수(合水)되어 상림리로 흐르는 하천(河川)이다.

노곡리에는도척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경찰지서, 도척단위농협, 우체국, 초등학교, 중학교가있고, 이 마을에 있는 도척성당(都尺聖堂)은 우리나라에서 몇째 안 가는 깊은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천주교의 박해가 심하던 약 200년 전부터 천주교인들이이곳 도척에 은거하기 시작하여 신앙생활을 하였고, 생계수단으로 도요지(陶窯址)와점촌(粘村)을 근거해 생활하였다. 이 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면서 1940년에도척성당에 초대 신부(神父)가 부임하게 되었다.

마을의 문화유적

노곡리에는 쌍룡정(雙龍亭)이 있는데, 유정리 해룡산(海龍山)의 용과'용머리'의 용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하여 정자(亭子) 이름을 쌍룡정(雙龍亭)이라명하였으며, 따라서 도척면의 명소(名所)가 되었다. 또 노곡리 191번지에는 250년된느티나무가 있는데, 이는 광주시 보호수(保護樹) 제69호로 지정되어있다.
노곡리의 지세(地勢)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역사적으로 기록을 보면조선조 말엽에 의병항쟁(義兵抗爭)중에, 의병들이 도척면 노곡리에 진을 치고 있을때, 왜군이 이천(利川)으로부터 습격을 해왔으나, 우리 의병(義兵)들이지세(地勢)를 잘 이용하여 노곡리에 이르러서 왜군을 패퇴시킨 바 있다.

1950년 6.25 전쟁 때에도 노곡리에서 북한 인민군과의 격전이 있었으나,국군 1개 소대가 인민군 수개 소대를 전멸시킨 전적이 남아 있다. 노곡리 동리어구에는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국군 용사의 무덤이 있고 비석도 세워져 있다.따라서 전해오는 이야기로 노곡리를 지세학상(地勢學上)으로 절지혈(切地穴)이라서이 지역을 먼저 습격하게 되면 반듯이 패한다는 말이 있다.


노루목
이 마을에서 상림리(祥林里)로 넘어가는 산의 생김새가 새끼노루가어미노루를 바라보는 형상이라고 해서 노루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면사무소가 있는 동리이다.

안터말
노곡리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노곡리에서도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터말' 이라고 하였다. 이 곳에는수령(樹令)이 약 300년 된 향나무가 있는 유명한 샘물이 있다. 이 샘물은 주민들이매년 정제사(井祭祀)를 지내고 있으며 음력 정월 초이틀이 정제사 날이다. 우물고사라고도 하며 3~4명의 제관(祭官)이 소의 생고기만을 제수(祭需)로 하고,탁주(濁酒)를 제주(祭酒)로 하여 먼저 샘에 제를 올리고 다음으로 뒷방죽, 앞 방죽순으로 지낸다.

고녹골
이 마을의 수답(水畓)은 풍부한 샘물이 있어어떤 가뭄에도 물 걱정을 하지 않는 옥답(沃畓)들이다. 그래서 붙여진 아름이'고은논'(麗畓)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비옥할 옥(沃)을 넣어 '고은옥골'이라하였던 것이 줄여서 '고녹골'이 되었다.

점말
예전에 옹기(甕器)를굽던 곳이라 하며, 전에는 인가(人家)가 5호 정도 거주하였으나 옹기 굽는점토(粘土)가 없어지면서 인가가 철거된 곳으로서 지금도 이 곳에서는 옹기 파편이발견된다.

옻물
예전부터 유명한 옻물이 나는 곳으로 근래(近來)에도옻이 오르면 이 곳의 옻물로 씻으면 치료가 된다고 한다. 지금의 동부연수원앞이다

송장봉
이 곳의 산 형체가 마치 죽은 사람의 시체(屍體)와같다고 하며, 일설에 의하면 이 곳에 옛날부터 송장을 많이 묻었다 하여'송장봉'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신주골
옛날부터 '신주골' 이라고전해 오고 있는데, 자세한 연유는 알 수가 없다.

갯물
예전부터 샘물이많이 나는 곳으로, 또한 샘물이 나는 자리가 마치 '개'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갯물'이라고 불려오고 있다.

분당골
예전부터 용인시 백암에서 광주시남종면 분원(分院)으로 질러가는 길목으로서, 분원 가는 도중에 '당(堂)'이 있던곳이라 하여 '분당골' 이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태봉
예전에왕족(王族)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하여 이 산을 '태봉'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안산
마을의 앞산이라고 하여, '안산'(案山)으로 부르고 있다.

헉고개
노곡리에서 이천(利川)으로 가는 산길에 높은 고개가 있고, 오가는행인이 이 고개를 이천 쪽에서 노곡리로 넘어 오자면 험하여, 한번 넘으려면 힘이들어 '헉헉'하며 넘는다고 하여 '헉고개'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빈대박골
헉고개에서 왼쪽으로 북향(北向) 골자기를 말한다. 예전에 이 곳에박씨가 살던 곳인데 빈대가 어찌 많은지 '빈대박골'이라는 이름이전해진다.

절골
예전에 절이 있던 곳으로서 이 곳에서는 돌로 만든절구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절에서 쓰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되린개음달
이 곳은 하루 중에 햇빛을 볼 수 없어서 늘 음달이라는 뜻으로 '되린개음달'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노루목 마을에서 이천방면으로 가다가 우측에 있는산이다.

달팽이골
이곳 산골짜기가 마치 '달팽이'같이 꼬불꼬불비틀어져 있고, 또한 골짜기가 깊어, 늘 하늘만 보이는, 후미지고 외진 곳으로유명한 골짜기이다.

고터
예전에는 인가(人家)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옛 집터가 있었다 하여 '고(古)터'라는 지명이 생겼다. 헉고개 밑에 있다.

이층바위
'신주골' 옆자리에 이층으로 된 바위가 있으며 이 바위에구멍이 뚫어져 있고 바위가 2층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복사골
예전에 인가(人家)가 있던 곳으로 그 당시 이곳에서는복사나무가 많이 있던 곳이라 하여 '복사골'로 전해지고 있다. '갈고개'에서노루목으로 넘어오면서 좌측에 있는 골짜기이다.

무재
복사골 뒷산으로분당골에서 넘어오는 옛길로 여기에 작은 고개가 있다.

갈고개
진우리(鎭牛里)에서 노곡리로 넘어오는 고개로, 길고도 높은 이 고개를넘으려면 길고 험해서 행인(行人)이 고개 마루턱에 오르면 누구나 힘에 겨워 갈증이심하다. 그래서 '갈고개' 라고 부르게 되었다.

돈터
복사골에서'황층'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며, 이 곳은 땔나무꾼이 쉬어가기 좋게 편편한곳이어서, 나무꾼들이 쉬는 동안 돈치기를 하던 곳이라서 '돈터'라고불러왔다.

간말
아래 점말과 웃점말 중간 지점에 마을이 있었다 하여'사이 간'(間)자를 써서 '간말'이라고 전해진다.

큰황층작은황층
예전에 황(黃)씨 형제가 살던 곳으로, 큰 형이 살던 곳이 '큰황촌'이라 하고 작은 황씨가 살던 곳을 '작은 황촌'이라 하였는데, 황촌이 변하여'황층'이 되었다.

용머리
노곡리에서 '사기소' 마을로 가는 중간지점의 산 형태가 용(龍)과 같다고 하여 '용머리'라 하며, 하천변에 큰 바위 역시용의 머리와 비슷하다 하여 '용머리'라고 부르고, 바위에는 큰 구멍이 뚫려있어,용의 눈이 아닌가 하였고, 바위 밑으로는 깊은 내가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섭산
누에(蠶)가 섶으로 올라가는 형국의 산이라 하여 '섭산'으로불리고 있다.
용머리 위쪽에 있다.

느다리
지금의 노곡리 50번지지점에 넓은 도랑이 있어, 이를 건너기 위하여 판자 목으로 된 나무를 걸쳐 놓고왕래한 다리로서 널판으로 된 다리라고 하여 '느다리'로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시멘트 콘크리트로 다리가 놓여 있다.

은골
'여새' 위에 있는골짜기이며, 유정리 뒤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여새(여울)
노곡리와유정리의 경계지점에 있는 하천으로, 이곳 하천의 물세가 세차게 흐르는 여울이있다 하여 이 곳을 '여새'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횟가마골
강회를굽던 골짜기로 이 곳에서는 옛 부터 질이 좋고 강한 소석회(燒石灰)가 생산되던곳이다. 그러나 점차 주원료인 화목(火木)이며 인건비의 상승 등으로 인하여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폐광된 것이지만, 지금도 '횟가마골' 이라고 부른다.여새에서 서쪽 방면으로 산기슭에 있다.

돌쪽다리
노곡리에서 유정리가는 중간에 있는 도랑에 옛부터 놓인 '돌쪽다리'가 있었는데, 1970년대 까지도 이돌쪽다리를 이용하였으나, 도로확장 관계로 이 돌쪽다리는 없어졌다.

사정거리
예전에 이 곳에 활쏘기 하던 궁터이며 여기서 노곡리 안산을 향하여활쏘기 시합을 하였으며, 주로 광주(廣州)ㆍ이천利川)의 한량(閑良)들의 시합장소였다.

장님보(洑)
노곡리에서 가장 오래된 보(洑)로 비교적몽리(蒙利)면적이 광범위하다. 한해(旱害)가 심할 때에는 이 보(洑)에서면단위(面單位)의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이름 있는 보(洑)이다.

삼박골
고녹골 왼편 골짜기로서, 예전에 이 지역에 박(朴)씨 셋이 살았다고한다. 그래서 유래된 이름이 '삼박골'(三朴谷)이라 한다.
주변의 산들이 모두박씨 종중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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