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곡리(楸谷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3 조회 : 2097
마을의 유래와 위치
이부락은 노곡리 도척면 소재지로부터 약 5km 정도 거리에 있는 산골 마을이다.광주시에서 방도2리와 더불어 가장 남단(南端)에 위치하고 있으며,대화산(大華山)을 등에 지고 있는 마을로서, 서쪽으로는 용인시(龍仁) 양지읍정수리와 경계하고 있다. 이 마을은 400여 년 전에 화전민(火田民)이 들어와 동리를배포하였다고 한다. 도척면 내에서 가장 오지마을이었다.
'추곡'이라는 마을이름은 '가래실'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300여 년 전에서판서(徐判書)라는 분이 당쟁(黨爭)으로 인하여 이 곳으로 피난 와서 살게 되면서가래나무(楸木)를 많이 심어, 온 동리가 가래나무 일색이어서 '가래실'이라불렀는데, 1908년 대한제국 시대 행정구역 개편 때 가래나무 추(楸)자를 따서추곡리(楸谷里)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 마을이 배포한 것은고려시대 말경으로 추정된다.
고려 충숙왕(忠肅王)때에 일연선사(日蓮禪師)가대화산(大華山)에 백련암을 세우고 약수(藥水)를 발견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오는것을 보면, 이미 그때 이 마을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문화유적

백련암(白蓮庵) 부도(浮屠)
이 마을에는 백련암(白蓮庵)이라는사찰(寺刹)이 있는데, 이 절의 부도(浮屠)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53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백련암 부도는 방형의 지대석 위에 놓여 있는 높이 1.75m, 넓이 98cm의석종형(石鐘型) 부도로 전체 형태가 아주 간략화된 것으로 탑신(塔身)부와대석(臺石)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석종형(石鐘形) 부도는 원래 인도의복발탑(覆鉢塔)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형태가 종(鐘)모양과 같다고 하여 이름이붙여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크게 유행하던형식으로 이 부도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권세경(權世經)의 묘

추곡리는 산세(山勢)가 좋아서 선현(先賢)들의묘도 몇 기 있다.
조선 숙종시대의 문신(文臣)으로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인권세경(權世經)의 묘가 있다. 권세경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권순창(權順昌)의 아들이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약관(弱冠)의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관직(官職)에 나아가 회양부사(淮陽府使)와청주목사(淸州牧使)를 거쳐 사도시정(司導寺正)에 이르렀고, 시문(詩文)에 능하여유집(遺集)을 남겼다. 또한 권세경의 4대손이며 조선 순조대(純祖代)에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권낙인(權樂仁)의 묘가 같은 국내에있다.

조선백자도요지
추곡리에서는 17~18세기에 조선백자(朝鮮白磁)를굽던 도요지(陶窯址)가 3개소 발견되었는데, 이 곳에서는 백자 대접ㆍ접시ㆍ잔 등이발견된 것으로 보아 사옹원(司饔院) 분원에서 가마를 옮겨 생산할 때 이 마을에서도백자(白磁)를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산신제단(山神祭壇)
이마을에는 서판서(徐判書)가 피난 왔던 약 350년 전부터 마을의 수호(守護)를 위하여산신제(山神祭)를 올리고 있으니, 말치고개 맞은편 산 중턱의 소나무 숲 안에산신제단(山神祭壇)을 설치하고, 매 2년마다 음력 10월 초순에 길일(吉日)을 택하여정성껏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고 있다.

천주교회당터
이 마을에는천주교회당(天主敎會堂)이 있던 터가 있는데 이것은 1880년대 흥선대원군(大院君)에의한 천주교 박해(迫害)때 산간지대로 신자(信者)들이 피하면서 생겼던 것으로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 중 폭격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공터만 남아 있다.
예전에는 농지가 밭이 많았으나 추곡리 소류지(小溜池)가 개설된 후로는답(畓)면적이 많이 늘어났다.
대화산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추곡리를 거쳐유정리(柳井里)를 흘러 노곡천으로 유입되는 하천이 있다. 대화산의 약수는 수질이좋아서 경기도 수질검사 결과 질이 좋은 약수로 판명되었다.
마을 호수(戶數)가50여 호인데 양천 허씨(陽川 許氏)가 대성(大姓)이며, 10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비육우(肥肉牛)를 기르는 목장이 여러 개 있기도 하다. 추곡리는 지리적으로산간오지(山間奧地)인데 교육열(敎育熱)은 투철하나, 교육여건이 좋지 않아서,조선시대(朝鮮時代)부터 주로 한학(漢學)을 배우기 위하여 서당(書堂)을 차리고자녀들을 훈학(訓學)한 실적이 있어, 그 내력을 살펴보면, 1870년대부터 1945년광복 때까지, 여러 훈장(訓長)을 모시고 한학(漢學)공부를 시킨 기록이있다.

텃골
텃골이라는 이름은 예전부터 집터가 있었다고 하여'텃골'이라 했으나, 인가(人家)가 한동안 없다가 최근 전원주택(田園住宅)지로개발되면서 주민이 입주하고 있다.

가래실 마을
옛날 서판서(徐判書)가피난 와서 사는 동안에 자기 집 주위와 마을 곳곳에 가래나무를 많이 심었다 하여,그 후 '가래실'(楸谷)이라고 하였다. 3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추곡리 마을회관이있는 마을이다.

건너말
가래실 건너편에 위치한 마을이나, 언제부터이 곳에 동리가 배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곳에 한학(漢學)을 가르치는서당(書堂)이 있었고, 선생님으로 조(趙)선생이 훈학(訓學)하던 곳이다.

대뻔지 마을
대화산 아래 있는 마을로, 1950년대만 해도 인가(人家)가 8~9호있었으나, 지금은 2~3호에 지나지 않고 있으며, 이 일대는 크고 작은암석(岩石)으로 조성되어 있는 경사지이다

장승백이
이 곳은 가래실입구로서 예전에 장승과 성황당(城隍堂)이 있던 곳으로, 이름 하여 '장승백이'로부르게 되었다.

말치고개
추곡리와 용인시 양지면 정수리와의 경계를이루는 고개로서, 마치 말의 이빨과 같다고 하여 '말치(馬齒)고개'라고 하였다.추곡리에서 용인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소무니고개
텃골에서용인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고개의 형태가 풍수지리학상(風水地理學上)의소무니(여자의 항문)혈 모양과 같다하여 '소무니고개'라 전하여지고 있다.

대화약수(大華藥水)
대화산에 있는 이 약수(藥水)는 암석(岩石)사이에서 흐르는약수로서, 고려 충숙왕(忠肅王) 12년경에 일연선사(日蓮禪師)가 발견한 것이라고한다. 이 약수명을 '장군수'(將軍水)라고도 불러왔는데, 구전(口傳)된 바에 의하면세종대왕(世宗大王)이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시에 어안(御眼)을 치료하기 위해이 약수를 떠다가 치료한 바 있다고 한다. 그 후 세인(世人)들에게 널리알려졌으며, 조선조 철종(哲宗) 때에에 좌찬성(左贊成) 김병기(金炳冀)가 낙향하여신병치료를 이 약수로 한 바, 병이 쾌유되어 이를 기념코자 석벽(石壁)에'대화수석'(大華水石)이라고 음각(陰刻)한 것이 현재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주:장군수: 예전에 약수의 품격에 따라 장군(將軍)수, 상수(上水), 하수(下水) 등으로구분했는데 장군수는 약수 중에 제일 질이 좋은 것을 말한다고 한다.)

백련암 부도(白蓮菴 浮屠)
백련암은 고려시대인 1325년에 일련선사(日蓮禪師)에의하여 창건되었다.(고려 충국왕12년) 처음 절 이름은 일련암 이었으나1387년(우왕13년)에 해안 스님이 중건을 하고, 일련선사의 부도와 3층 석탑을 건립한 후 백련암으로 개칭하였다. 3층 석탑은 1925년 을축년 홍수때 산사태로 인하여매몰되어 없고, 일련선사의 부도만 남아있다. 도척면 추곡리산 25번지에 소재하고있다.

흥진절터
지금도 10여 평 작은 규모의 암자(庵子)이나 1970년에안덕선 주지가 꿈을 잘 꾸고 지었다 하며, 날이 갈수록 번창한다고 하여 '흥진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전구덩이
가래실 마을에서 300m 동쪽에 있는데,일제 강점기에 금을 캐던 광산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먹바위
가래실마을 북쪽 500m 지점의 대화산 중턱에 있는 바위를 말하는데, 바위의 색깔이 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너말
가래실 마을 남쪽 250m 지점에 형성되어있는 작은 마을이다.

금성산
텃골 앞산을 말하는데, 대화산의줄기이다.

되짝골
가래실마을 남쪽 500m 지점에 있는 골짜기로서 이 곳이광주시와 용인시의 경계지점이다.

미역골
가래실에서 동북쪽으로 작은골짜기를 말한다.

부엉이굴
예전에 부엉이가 서식하였던 공에 있는 작은동굴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가래실 마을 동쪽 500m 지점에있다.

삼박골
가래실 마을 서쪽에 있는 들판을말한다.


수청골
가래실마을 북쪽 500m 지점에 있는 골짜기를말한다.

안터
가래실 안쪽에 있는 골짜기를말한다.

양바우들
가래실마을 서남쪽에 있는 들판을말한다.

호랑바위
거먹바위 옆에 있는 바위를 말하는데, 호랑이가 앉아있는 모습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독골
가래실마을 위에 있는작은 저수지 뒤에 있는 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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