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동리(光東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0 조회 : 1145
마을의 유래와위치

조선조 말 대한제국(大韓帝國)시대까지는 광복동(光福洞)과동대동(東垈洞)으로 2개 마을이었다.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통폐합하면서 광복동의 '광'(光)과 동대동의 '동'(東)을 따서 '광동리'(光東里)라고리명(里名)을 만들었다.

퇴촌면(退村面)소재지로서 면사무소(面事務所)와경찰지서ㆍ우체국ㆍ농협이 이 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8.15 광복 후 1960년대 까지는이 마을에 5일장이 섰다. 매 5일과 10일에 장이 섰으나, 제대로 유지가 안 되어폐쇄되었다가 지금은 5, 10일에 규모는 작으나 장(市場)이 서고 있다.
1973년팔당댐이 건설되면서 이 마을의 일부가 수몰되어 농경지가 많이줄어들었다.

중부고속도로 경안 나들목에서 45번 국도를 따라 도마치 고개를넘어 도마리(退村面道馬里)에서 88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서광동교(光東橋)를 건너면 광동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337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가면 오리를 거쳐 남종면 분원리에 이른다. 서쪽으로는 정지리(亭支里)와 연접하고있으며, 108번 도로를 따라 실촌읍 곤지암리로 갈 수 있다. 88번 도로는 양평군강하면 방면으로 향하고, 아울러 천진암으로 올라가면서 관음리와 우산리가연결된다.

마을의 문화유적

조영무(趙英茂)의 묘

광동리산16번지에는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의묘가 있다. 조영무는 조선 개국시에 1,2차 왕자(王子)의 난(亂) 때에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승리하는데 크게 공헌하여 태종(太宗)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관직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말년에 이 마을에와서 은거(隱居)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퇴촌(退村)이라는 지명(地名)이 생기게되었다고 한다.


여여길(呂與吉). 여우길(呂祐吉)의 묘

광동리산19에는 조선 인조대(仁祖代)의 문신(文臣)으로 성혼(成渾)의 문인이며선조(宣祖)24년(159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여여길(呂與吉)의 묘와 그의 후손들이현달하여 가문을 빛내었고, 묘소가 여러 분상 있다.
또 같은 장소에 여여길의아우인 여우길(呂祐吉)의 묘가 있는데, 그는 선조(宣祖)24년 문과에 급제하고,선조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 시절에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로 일본에 건너가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강화(講和)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돌아올 때는 일본에포로로 잡혀갔던 조선군(朝鮮軍) 1,000여 명을 데리고 왔다.

그의 당시통신사로 갔을 때의 일기(日記)가 남아 있다.

광동리 346번지에는 수령이220년 된 느티나무가 광주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광복동(光福洞)-광백이-광동2리
예전부터 이 마을은 산수(山水)가아름답고 들판이 넓어 항시 밝은 빛이 비추고, 풍년을 이루어 와서 복 받은마을이라 하여 광복동이라고 불러왔다.
이 마을에는 한양 조씨(漢陽 趙氏)와함양 여씨(咸陽 呂氏)가 세거하여 오고 있다.

동지벌말-벌말-광동1리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 인조(仁祖)가남한산성(南漢山城)에 진을 치고 있을때에 군량미(軍糧米)를 보급하는데, 이 곳이평야지대로서 수확이 많아 광주(廣州)에서 군량미를 제일 많이 보냈다고 한다. 그후 동쪽에 있는 넓은 마을 이라고 하여 '동지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광동리의중심 마을이다. 이 마을은 익산 임씨(益山 林氏)와 한양 조씨가 대성(大姓)을이루고 있다.

웃광백이 마을
광복동의 위쪽에 산 밑으로 5~6호의인가(人家)가 있는 마을을 말한다. 광백이 위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탑골 마을
현 면사무소가 있는 부락이다. 익산 임씨(益山林氏)들의 집성촌이다. 예전에 이 마을에 탑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지말
광백이 마을의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응달말
광복동(광백이)의 북쪽 음지(陰地)에 형성된 부락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광동교(光東橋)
도마리(道馬里) 에서 광동리로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예전에는 자그마하였으나, 팔당호가생기면서 큰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

동벽소(沼)
도수리와 경계를 이루고있는 곳에 있었던 소(沼)인데, 동쪽에 있는 큰 소(沼)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물이깊었으나 지금은 하천이 변형되어 없어졌다.

살구지
광동리에서정지리(亭支里) 방면으로 가면서 왼쪽에 있는데, 옛날 살구나무가 많아 붙여진이름이라고 한다.

장터
8.15 광복 후 형성된 5일장이 섰던 터여서 붙여진이름이다. 장이 폐쇄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장이 서게 되었으나, 옛 장터는 주택이들어서고 지금의 장이 서는 곳은 벌말의 다른 곳이다.

삼태기산
광백이마을 응달말 뒷산을 말하는데, 얕은 산이지만, 모양이 삼태기 같다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국사봉(國思峰)
국사봉 정상에 올라가 보면, 동쪽으로 도수리,남쪽으로는 광동리, 서쪽으로는 오리, 북쪽으로는 금사리가 보인다. 예전에낙향하여 퇴촌에 살던 문관들이 국사봉에 올라 나라 일을 걱정하며 사방을둘러보았다는 전설이 있다.

사만절
국사봉 밑에는 예전에 절이 있었는데,신도가 무려 사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간에 빈대가 많아 절이폐쇄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부처골
광동리와 정지리 사이에 있는골짜기인데, 이 곳에 동자(童子)불상(佛像)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울어린이대공원으로 이설(移設)하여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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