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리(道馬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0 조회 : 1423
마을의 유래와위치

도마리(道馬里)라는 지명(地名)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유래(由來)가전해온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대표적인 광주읍지(廣州邑誌)인『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도마치고개의 한자 표기가 '도마치'(倒馬峙)라고되어 있는 바, 이는 '말이 넘어진 고개'라는 뜻이다. 이에 관한 전설로는 예전에는광동리에서 우천(牛川)을 건너 도마리에서 도마치(倒馬峙)를 넘어 중부면엄미리(奄尾里)를 거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는 길이었는데, 도마치 고개가너무도 가파르고 험하여 말이 고개를 넘다가 여러번 넘어지는 일이 발생하여 이런이름이 생겼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고, 또 일설에는 이 마을에 여우가 사람을괴롭히는 일이 있어 어느 도공(陶工)이 여우를 잡아 죽이자, 죽은 여우의 혼이 다시사람을 괴롭혀서, 그 여우의 혼을 누르기 위하여 도공(陶工)이 도자기(陶磁器)로만든 말(馬)을 여러 개 만들어 고개에 세웠다고 한다. 그 뒤로는 여우의 괴롭힘이없어지고 이 마을 이름을 '도마리'(陶馬里)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설화는예전에 말(馬)이 많이 지나가는 길이어서 '도마리'(道馬里)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퇴촌면사무소에서 서북쪽에 있으며, 마을 앞으로 42번 국도가지나간다. 면사무소까지의 거리는 88번 도로를 타고 약 3km이며 자연부락은윗도마치ㆍ중간말ㆍ아래도마치ㆍ양달말ㆍ응달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 전체가40여 호 정도로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이 마을 아래도마치는 팔당호 상류에 접해있고, 서쪽으로는 중부면 상번천리(上樊川里)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도장골고개를 넘으면 퇴촌면 무수리로 통한다. 동북으로는 남종면(南終面)삼성리(三成里)와 이어져 있다. 이 마을 뒤로는 검단산(黔丹山) 줄기가 흘러내려와응달말의 수리골 산들이 마을을 둘러치고 있어 마치 삼태기 속에 마을이 있는 듯한지형(地形)을 이루고 있다.

도마리의 문화유적

조선백자도요지
이마을은 조선시대에 조선백자(朝鮮白磁) 도요지(陶窯地)가 발견된 것만 해도 7개소가된다. 주로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상감청화백자(象嵌靑花白磁)와분청사기(粉靑沙器)를 굽던 가마터가 국립박물관 발굴팀에 의하여 1966년 발견되어문화재청에 의하여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곳이 네 곳이나 있다. 이는 이웃인광주시(廣州市) 남종면(南終面) 분원리(分院里)의 조선시대의 사옹원(司饔院)분원(分院)에서 관리하던 관요(官窯)였다고 한다. 도마리 250, 251번지 일대에있다.

선사시대 유적
또한 도마리 113번지 일대에서는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유물(遺物)이 경기문화재단의기전문화재연구원 발굴팀에 의하여 1998년 발견되었다(기전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참고)

최 항(崔 恒)의 묘
이 마을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된 최항(崔 恒)선생 墓가 있다. 문정공(文靖公) 최 항 선생은 조선 세종대왕(世宗大王)의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創制)시에 집현전(集賢殿) 8학사 중에 중견 학자로서훈민정음 창제에 지대한 공을 세웠고, 많은 음운서(音韻書)를 찬술(撰述)한학자이며, 또한 정치가로서 성종(成宗)때에는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한 분이다.호는 태허정(太虛亭)이다. 묘는 도마리 산 11번지에 있다. 사묘(祀廟)는 도마리197-8번지에 있고, 재실(齋室)은 <영모재>(永慕齋)라고 하는데, 도마리195번지에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중간말 도로변에 서거정(徐居正)이 찬(撰)한것이 건립되어있다. 2004년 10월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안 당(安 塘)의묘
도마리산 22번지에는 정민공(貞愍公) 안 당(安 塘)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안 당은 순흥 안씨(順興 安氏)로 조선 중종(中宗)대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문관(文官)이다. 신도비문(神道碑文)은 율곡(栗谷) 이이(李 珥)가 찬(撰)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느티나무가 도마리 221번지에 있다. 수령(樹齡)이 550년이나 된다. 이 나무는예전에 우물에 사람이 빠져 죽어서 그 우물을 메웠는데, 거기서 이 느티나무가자라났다는 전설이 있다. 광주시 보호수 제77호이다. 최 항 선생의 후손인삭녕(朔寧) 최씨의 세거지(世居地)였으나 지금은 거의 마을을 떠나고 종손과 몇몇가구가 살고 있다.
구석기(舊石器)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아주먼 옛날부터 이 마을에는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있다.

윗도마치마을
도마리의 중심 마을이다. 도마리에서 가장 위쪽에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30여 호가 살고 있으며, 현재도 농업을위주로 하고 있고, 버섯재배와 소채도 재배하고 있다. 이 곳에 오래된 느티나무가광주시 보호수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 회관도 이 부락에있다.

중간말
윗도마치에서 퇴촌면사무소가 있는 광동리 방향으로 88번지방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광동교를 건너기 전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농가2호가 살고 있다.

아래도마치
중간말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아래도마치가 된다. 도마리의 자연부락 중 맨 아래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응달말
중간말에서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문정공(文靖公)최 항(崔 恒)선생의 묘가 있는 마을로 최 항의 종손 1가구와 묘를 관리하는묘직(墓直)이 살고 있다. 도마리에서 가장 음지(陰地)에 속해있는 곳이라서 붙여진이름이다. 이 부락에는 최 항 선생과 그의 아들의 묘소도 있다.

도장골
응달말에서 무수리(無愁里)로 가는 방향의 골짜기를 말한다.예전에 몰래 시신(屍身)을 묻는 것을 도장(盜葬)이라고 하였는데, 이 곳에 그런일이 비일비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도롱고개
도마리에서 남종면삼성리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즉 이 고개를 넘으면 삼성리를 경유하여팔당댐에 다다른다.

장작골
이 골짜기에서 예전에 장작(火木)을 많이생산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부면 상번천리에서 도마치 고개를 넘어도마리에 들어서면서 첫 번째 좌측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절골
예전에 이 골짜기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절이있던 골짜기라고 하여 '절골'이라고 부른다. 윗도마치에서 왼쪽골짜기이다.

느락골
중간말에서 마주보이는 골짜기를 말한다.

북덕고개
또 하나의 삼성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이 고개는 붉은흙으로 덮여 있어 '붉덕'이라는 방언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양지말
도마리 삼거리에서 도롱고개를 넘어 가기 전, 양지쪽에 있던마을로서 예전에는 몇 호의 농가가 살았으나, 지금은 인가(人家)는 없다. 양지쪽에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마치고개(일명 굴뚝고개)
현재의도마치 고개가 아니고, 예전에 다니던 도마치를 말한다. 마치 굴뚝이 서 있는 듯가파른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고개로 말미암아 도마치(倒馬峙) 즉,말이 넘어지는 고개라는 설화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제참박골
장작골에서도마리로 내려오면서 다음 골짜기를 말한다.

무수리골
도마리에서무수리로 넘어가는 길에 펼쳐진 골짜기를 말한다. 무수리로 가는길에 있다 하여붙여진 이름이다.

능골
능자리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확실한근거는 없다.

새미골
절골에서 윗도마치 쪽으로 능선 하나를 넘어서면새미골이다. 물 좋은 샘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도 그 샘이 있다.


안 당(安  ) : 本貫은 順興, 字는 彦寶, 號는 永慕堂이다. 安珦의후예로 檢校 漢城府尹을 역임한 安璟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成均館 司藝를 역임한安敦厚이고, 어머니는 成均館 司藝를 역임한 朴融의 딸이다.朝鮮 中期의 文臣으로漢城 出身이다. 成宗 11년(1480) 生員이 되고, 이듬해 親試에 及第하였고, 1483년史官에 보임되어 成宗實錄의 編纂에 참여하였다. 그 뒤 藝文館奉敎 侍講院司書全羅道都事 刑曹正郞 등을 거쳐 司贍寺 僉正이 되었다. 燕山君 2년(1496)에司藝로 湖南地方에 나가 凶年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賑恤하고, 그 이듬해에司憲府掌令이 되었다.1505년 通政大夫에 올랐다. 中宗 1년(1506)에 燕山君이革罷하였던 司諫院이 복고되면서 大司諫이 되고, 1507년에 定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이어 우부승지 좌부승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508년에 順興君에봉해졌다. 1509년부터 1511년까지 工曹 刑曹 禮曹의 參判과 大司憲을 여러 차례역임하였다.
1512년 慶尙道觀察使를 거쳐 1514년 漢城府 判尹이 되어 약 8개월동안 首都行政을 책임 맡았다. 그해 戶曹判書를 거쳐 1515년 吏曹判書가 되어舊弊를 革新하고 奔競을 금지시켰으며, 官吏의 登用에 있어 循資法에 구애되지 말고人才를 발탁할 것을 주장하여 金安國 金正國 金湜 趙光祖 등을 薦擧擢用하였다. 그해 8월 朴詳 金淨 등이 中宗의 廢妃愼氏의 復位를 청하였다가大諫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이들을 辯護하다가 그 자신도 大諫으로부터 탄핵을받았지만 士林들로부터는 推仰을 받았다. 1517년 戶曹判書, 1518년 右贊成右議政에 올랐다. 그 뒤 昭格署의 革罷를 주장하였고, 1519년 靖國功臣의削勳問題를 贊成 支持하였다. 己卯士禍가 일어나자 領議政 鄭光弼과 같이 趙光祖를구원하다가 大諫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左議政이 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大諫의탄핵과 賢良科 설치를 주장한 사람으로서, 세 아들을 모두 薦擧되게 하였다는허물까지 뒤집어쓰고 罷職당했다. 그 뒤 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1521년 그의 아들安處謙이 庶姑母의 아들 宋祀連의 고변으로 處刑되면서 連坐되어 絞死刑에처해졌다.
말이 적고 淸廉潔白하며,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積極的이어서士林들을 많이 登用시켰다. 明宗 때 손자 安玧의 주청으로 赦免 復官되었다.諡號는 貞愍이다.
墓는 廣州市 退村面도마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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