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심이는 산너머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자 밭일 나간 아버지의 저녁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나갔다. 낮에 아버지가 캐놓은 쑥이 담긴 소쿠리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발밑의 무언가에 걸려 그만 뒤로 나자빠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물 쏙 빠지게 아픈 엉덩이를 싹싹 비비면서도 정작 걱정되는 것은 아버지께 들을 꾸중이었다. 불 때고 밥하는 일은 위험하니 절대 하지말라고 신신당부한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다 이렇게 다쳤으니 말이다. 열두 해를 드나든 부엌이면 이제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손바닥만큼의 세상도 볼 수 없는 장님으로 태어난 은심이에겐 늘 가던 길도 위협의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구수한 쑥국을 끓여드리려 했는데······.’
코끝을 찌르는 내음을 맡으며 주섬주섬 바닥에 흩어진 쑥을 주워 담았다. 그때 저쯤 어디에선가 ‘매에에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난히 소리에 민감한 은심이에게도 들릴 듯 말 듯 하였으니 눈 뜬 사람들은 못 듣고 지나쳤을 그런 작은 소리다. 소리 나는 쪽으로 귀를 대고 다가갔다. 겨우내 쌓아두었던 땔감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다시 ‘에에에에--’하는 소리가 났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은심이는 감각적으로 손을 먼저 뻗어 만져보았다. 털이 고운 결을 가진 짐승이 심장을 팔딱이며 누워있었다. 축 처진 귀며 동그란 눈엔 눈곱인지 눈물인지 맺혀있고 길쭉한 코와 입, 그리고 다리가 넷에 꼬리도 꽤 길었다. 겁을 먹었는지 꼼짝않고 은심이가 만지는 대로 놀라지도 반항하지도 않고 그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은심이의 손에 끈끈한 것이 묻어났다. 녀석의 몸 여기저기에 작은 상처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녀석의 정체가 무엇이든 우선 상처를 치료해야 되겠다 싶어 소쿠리에 있던 쑥을 상처에 발라주었다. 옛날 은실이가 어릴 적에 툭하면 넘어져 피가 날 때마다 아버지는 쑥을 발라주시곤 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쑥이 상처를 아물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바르고 며칠 지나면 상처는 나았고 새로운 살이 돋아났기 때문에 은심이는 쑥을 최고의 명약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앞다리 쪽에는 상처가 깊어 움푹 파인 곳에서 피가 많이 흘러 입고 있던 옷을 찢어서 꼭 묶어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져본 짐승인 듯한데 강아지나 토끼는 분명 아니고 그보다 몸집이 좀 크고 털의 결을 따라 손으로 전해오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촉감에서 특별한 고결함이 느껴져 왔다. 사냥하는 사람에게 해를 입었던지 아니면 저보다 더 사나운 짐승의 먹잇감이 되려다 살아났는지 알 수 없지만 상처가 어서 빨리 낫기를 빌었다. 그때 마침 아버지의 인기척을 듣고 반가움에 얼른 달려갔다.
“아버지, 저기 땔감 밑에 다친 짐승이 뭐예요? 저는 처음 만져본 짐승 같아요.”
“얘가 무슨 헛소리야! 여기 뭐가 있다는 거야, 짐승이라니?”
은심이는 다쳐서 끙끙 앓고 있던 짐승을 치료해 준 경위를 설명하며 아버지를 끌다시피 하여 땔감 쪽으로 함께 갔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대로 거기엔 아무도 만져지지 않고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헛것을 봤나? 아니, 어차피 보지는 못했고 분명히 손으로 만지고 소리도 들었는데······.’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얘기해봐야 아버지는 더 이상 믿지 않을 것이다.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어쩌면 자기가 마음속으로 상상한 일이 사실처럼 느껴지는지도 몰라 갑자기 자신의 말에 확신을 잃었다. 상처가 금세 나았는지, 아니면 누워 쉬지 않아도 될 만큼 그리 큰 상처가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다행이라 여기자고 하면서도 그렇게 도망치듯 모습을 감춘 녀석이 내심 섭섭하고 또 궁금하기도 했다.
그 묘한 일이 있고난 뒤 그녀석의 팔딱거리는 심장소리와 부드러운 털의 촉감이 한동안 은심이의 마음속을 헤집고 다녔다. 산골을 자분자분 걸어오는 봄꽃 향기가 온 마을을 뒤덮자 차츰 희미한 기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따뜻한 봄볕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한낮이었다. 어디선가 ‘매에에에···’하는 소리가 들려 귀가 번쩍 뜨였다. 며칠 전 그 묘한 일의 주인공 녀석의 목소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 나는 쪽으로 막 달려가려는 순간 그녀석이 먼저 은심이의 품에 와락 안기는 바람에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얼굴에서 등으로 다리까지 차례로 더듬어보았다. 상처는 말끔히 나았고 보드랍고 매끄러운 털의 감촉은 여전했고 똑바로 서 있는 걸 만져보니 키도 꽤 큰 녀석이었다. 은심이는 반가운 마음에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다가 물었다.
“넌 이름이 뭐니? 대체 어떤 짐승이냐, 나 같은 소경은 보이지 않으니 만져봐야만 알 수 있는데 너와 같은 짐승은 처음 만져 보는 것 같아.”
“······.”
그 녀석은 말이 없었다. 그제서야 은심이는 이마를 치며
“맞다, 넌 짐승이지? 말 못하는. 내가 아무리 눈이 멀었다고 짐승인 너에게 말로 답해줄 것을 기대하다니·······.”
“나는 비록 눈이 보이지 않지만 누구하고든 이야기할 수 있어. 길가에 핀 민들레하고도 얘기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과도 말이 통해. 그러니 너와 얘기하는 것이 어려울 리 있겠어? 널 이제부터 왕방울이라고 부를게. 눈이 왕방울만하게 큰 것 같아서 말이야, 어때?”
왕방울은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이름이 마음에 드는 듯 좋아라 앞마당을 한바퀴 뛰어서 은심이에게 다시 안겼다. 왕방울과 정신없이 이야기하며 놀다보니 어느새 해가 산너머 떨어지는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오시면 말씀드려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을 때 왕방울은 은심이의 품을 벗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도망치듯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은심이는 아버지께 왕방울에 대해 얘기하려다 문득 아버지도 모르는 저만의 비밀 친구로 간직하고 싶어졌다. 또 왕방울 역시 자기의 모습을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자기를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동냥젖을 먹이며 키워 오신 아버지에게 비밀을 만든다는 것이 어쩌면 불효가 되겠지만 그래도 왠지 그것이 왕방울을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아버지가 일하러 가시면 왕방울은 매일 은심이 집으로 놀러와 함께 산책도 하고 풀밭에 함께 누워 간질이며 놀기도 했다. 산골의 외딴 집에서 자란 은심이는 이웃과도 한참 떨어져 늘 혼자 놀아 외롭고 쓸쓸했다. 그래서 사람 아닌 풀, 꽃, 새 등이 유일한 친구였다. 사실 이웃에 사람이 살아도 자기처럼 눈이 먼 사람과 놀아줄 친구도 없으려니와 어머니가 그립고 사람의 정이 그리워 울적해 질 때면 마당에서 혼자 묻고 답하며 지내는 것이 놀이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친구가 생긴 것이다. 워낙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왕방울은 그나마 눈 먼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이 천천히 산책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한번 일어나면 뛰어서 집 앞 언덕을 휘잉 달려갔다 오곤 했다. 처음에 조심조심 걸어가던 은심이도 왕방울의 속도가 빨라지면 ‘에라 모르겠다!’며 냅다 쫓아 달려가게 되었다. 그러면 숨이 차면서도 시원하고 가슴이 확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은심이가 열다섯 살이 되고 왕방울도 몸집이 더욱 크고 단단해졌다. 밤새 내린 비로 온 땅이 질퍽해진 이 날도 왕방울은 어김없이 은심이를 찾아왔다. 마당이 질척거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자 은심이를 등에 태워주었다. 저를 업어 키워 준 아버지의 등과는 달리 왕방울의 등은 딱딱하고 어색했다. 처음엔 중심을 못 잡아 흔들리고 무서워 매미처럼 배를 찰싹 붙여 엎드렸는데 천천히 걸어가자 흔들흔들 아버지의 등과는 다른 재미가 더했다. 왕방울이 장난스럽게 조금 빨리 걸어가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세상에 아버지 말고 그렇게 따뜻한 등에 업혀본 것은 처음이었다.
왕방울의 등에 몸을 맡겨 어디론가 한참을 가고 있었다. 꽃향기가 온 데 퍼지고 몸으로 스치는 나뭇잎들의 촉감이 상큼했다. 간혹 은심이의 머리와 왕방울의 긴 털을 고르게 흔드는 바람결을 따라가는 길은 은심이가 처음 가보는 깊은 숲속이었다. 세상이 보이지 않는 은심이에겐 이 세상 자체가 꿈이라 생각하지만 지금 가고 있는 이곳이야말로 늘 꿈꾸던 곳.
꿈결인 듯 잠시 눈 감았던 것 같은데 벌써 해가 지고 어두워져 은심이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저를 태우고 온 왕방울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하늘과 땅 사이에 혼자였다. 적막이 산을 휘감고 있었다.
“왕방울아! 어디 있니? 대답 좀 해 다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왕방울아!”하고 부른 은심이의 목소리만 메아리로 되돌아올 뿐 멀리서 들려오는 사나운 짐승의 울음은 은심이를 더욱 공포스럽게 했다. 평생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아버지도 불러보았지만 소용없고, 처음 와본 이런 산중에서는 낭떠러지가 있는지 큰 바위가 있는지 도무지 불안해서 한 발짝도 내밀 수가 없었다. 손과 발로 살살 짚으며 더듬어 주변을 살펴보니 다행이 은심이가 있는 곳은 큰 바위였다. 그래도 집으로 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이런 낯설고 무서운 곳에 자신을 두고 왕방울은 어디를 갔단 말인가?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두고 사라진 왕방울이 야속하여 왕방울과 함께 놀았던 즐거운 시간마저도 후회스러웠다.
두려움과 원망이 교차하며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그때까지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그 바위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비비며 떠 보니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은심이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웬 처자가 이런 깊은 산중에서 이러고 있느냐? 봄이라지만 산속의 밤은 겨울과도 같고 산짐승 또한 두렵지도 않느냐?”
머리를 깎고 누덕누덕 기워 축 늘어진 옷을 걸치고 보따리 같은 걸 메고 꼬부랑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 우습고도 신기했다. 처음 보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누구······.?”
“나는 그저 세상을 떠도는 중이다. 사람들은 나더러 스님이라 부르더라만.”
예전에 집에 가끔 오던 스님께 시주하던 일을 생각하니 처음 보았을 때 낯설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깊은 산중에서 사람을 만나 무척 기뻤다.
그런데 은심이 가만히 생각하자니 장님인 자신이 어떻게 스님을 볼 수 있는 것인지,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분명 세상이 보였다. 깜깜하고 어두운 밤이었지만 머리 위 하늘에는 둥그런 달도 떠 있고, 큰 바위 옆에 초록으로 물든 나무들도 달빛에 어렴풋이 보였다. 뜻밖의 일에 무슨 말을 어찌해야할지 몰랐다. 그 왕방울과 만나기만 하면 믿을 수 없는 묘한 일들이 자꾸만 생기는 것이었다.
그동안 은심이는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제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그 소원이 이렇게 갑자기 이루어지니 믿어지지 않아 어쩌면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감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늘 만져야만 알았던 자신의 손이며 다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스님, 그런데 혹시 저를 태우고 다니던 왕방울 못 보셨어요?”
“왕방울이라니, 솔방울은 봤어도 왕방울은 모르겠다.”
“음, 다리가 네 개 있고 털이 아주 고아요. 꼬리도 길고, 눈이 왕방울만큼 커서 제가 붙인 이름인데 저의 집에 늘 와서 함께 놀다가 오늘은 이렇게 멀리까지 나온 건데 저만 여기 놔두고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음 백말이로구나. 네가 타고 온 것은 하얀 말이다. 내가 저 전라도에서 시작해 좋은 곳을 다 찾아다니고 있는데 물도 맑고 숲도 우거진 이 산이 아주 명당이로구나. 해서 산길 따라 오다가 멀리서 이 산을 보니 산꼭대기에 백마가 하얀 털을 날리며 먼 하늘을 보고 있더구나. 너무 놀라서 눈을 감았다 다시 보니 어느새 그 말은 사라지고 산 전체가 백마의 등허리고 옆을 따라 보니 말의 입이 있더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오늘 여기서 머무르려 하는데 너를 만났구나.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듯하구나. 밤도 깊었으니 오늘밤 이곳에서 하루 눈을 붙이고 날이 밝으면 내 길을 알려주마.”
스님은 보따리 같은 바랑에서 옷가지를 꺼내 은심이를 덮어주고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는 참선에 들어갔다. 은심이는 이 일이 꿈이 아니길 바라며 무거운 눈꺼풀을 거부하지 못하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여전히 꼼짝 않고 있는 스님을 은실이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제 본 그 스님과 머리며 옷은 비슷한데 얼굴이 좀 아닌 것 같았다.
“스님, 안 주무셨어요?”
“큰 스님 말이니?”
은실이 들은 목소리는 분명 어제 그 스님이 아니었다.
“아니, 어제의 스님은 어디가시고 대체 누구?”
“음, 나는 동진이라고 해. 큰스님은 또 다시 길을 떠나셨다. 너도 아는지 모르겠다만 지금 신라는 사회가 몹시 불안해. 조정에서는 왕권다툼이 치열해 매우 혼란하단다. 불교에서도 교언영색에 식상한 백성들은 깨끗하고 청빈한 생활의 도선스님 같은 선승들에 의해 새로운 세상으로 바뀌고 있지.”
산골 마을에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까맣게 모르고 살던 은심이는 세상이 혼란스럽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스님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큰스님의 행적에 대해 들었다.
“어제 네가 보았던 그 분은 도선스님으로 전라도 영암 월출산에서 태어나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으셨어. 불교 경전으로 공부하다가 당나라의 사찰풍수에 심취하였지. 풍수에서는 인간의 삶을 땅과 연관지어 해석하는데 큰스님이 땅을 연구한 것은 쇠한 지기(地氣)를 비보(裨補)하여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활기차게 이끌어주는 데 있다고 보았던 거야. 즉,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수도 경주는 지기가 시들어 국운이 기울고 있다고 보고 새 도읍지와 새 인물을 바라는 시대를 읽으신 분이지. 그래서 송악(개성)을 지기 왕성한 도읍지로 보고 그 지역 토호인 왕융에게 집터를 잡아주고 아들을 점지해 줄 땅을 골라주며 장차 아들 왕건의 탄생을 예언하였는데 예언대로라면 앞으로 그에 의해 삼한이 통일 되고 새 나라가 건국된다는 이야기란다.”
스님은 잠시 말을 끊더니 은심에게 다짐을 받았다.
“아이고, 내 큰일 날 말을 하고 있네. 이 얘긴 절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야 해. 큰 역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네, 그런데 큰스님은 어디로 가셨고 동진스님은 왜 함께 가지 않으세요?”
“도선스님은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좋은 자리에 절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이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려고 지금도 수행중이란다. 나는 큰스님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는 중이고.”
사실 은심이는 나라며 왕이며 불교며 도무지 어려운 말엔 별 관심 없었다. 다만 자신과 함께 했던 백마의 소식이 궁금했고 장님이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눈을 뜨게 된 연유를 설명해주었으면 했다. 그런 은심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스님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옛날부터 이 산 중턱 어느 굴속에 산을 지키는 흰말 부부가 살고 있었어. 그러나 동네사람들 중 이 말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왜냐하면 흰말이 사람의 눈에 띄게 되는 날은 목숨이 잃게 되어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 말의 새끼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사람을 좋아해 가끔씩 마을로 내려가 사람과 놀다오곤 했다는군.
부부말이 한사코 말리는 중에도 몰래 마을에 다니던 새끼 말이 오늘은 어느 소녀를 태우고 숲을 거닐다가 산을 지나던 큰스님을 보게 되었어. 사람의 눈에 띄어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었다고 판단한 말은 당황한 나머지 소녀를 바닥에 내려놓고 산꼭대기로 사라져 버렸지. 그런데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늘을 보고 있던 말을 자세히 보니 눈이 없는 거야. 그 순간 장님이었던 소녀는 바로 눈을 뜨게 되었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스님은 그 말을 보지 못했다는 거지.”
“그럼 그 눈을 소녀에게 주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아마도·······.”
그 소녀가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된 은심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세상의 밝은 빛을 나에게 주고 가다니.’
그러한 말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은심이를 더욱 슬프게 하였다.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은심이는 말로만 듣고 손으로 만지기만 했던 진달래, 개나리를 보며 어떻게든 그 은혜에 보답하리라 다짐한다. 눈에 가득 봄 빛깔을 담고 산하를 덮은 수목의 초록 이파리를 보며 산이 된 백마를 추억 속으로 그렇게 묻어야만 했다.
그날부터 은심이는 왕방울이 자신을 찾아와 즐겁게 놀아주었던 예전처럼 매일 산에 오르며 다정한 친구가 되어 평생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 얘기가 하나 둘 산을 타고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은 이 산을 ‘백마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한편 예언대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도선대사가 이 땅을 명당으로 확인한 후 산의 모양이 장차 왕건이 타고 다닐 말의 형상이라 하여 ‘백마산’이라 명명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아직도 백마산 곳곳에는 말과 관련된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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