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능 설화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1.03.12 조회 : 1288

  심양의 하늘은 쌀쌀한 봄바람이 휘저어 놓은 듯 뿌옇게 먼지가 일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기거하는 세자관 앞은 침통하다 못해 하얗게 질린 세자와 신하들이 여럿 서 있었다. 깨끗이 손질된 관복을 갈아입고 세자 앞에 엎드린 젊은 남자, 정뇌경이었다.

이제 신은 죽는 몸으로 세자저하를 뵈올 빛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나라를 욕되게 하고 걱정을 끼쳐드린 죄 죽어서도 신의 죄로 남을 것입니다. 저하의 행장을 끝까지 보필하지 못하고 이 자리서 영결인사를 올리는 신의 불충을 용서 하십시오, 저하!”

정뇌경이 소현세자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사, 다시는 살아서는 뵈올 수 없는 세자다. 비장한 각오로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 그의 얼굴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힘이 없어서 경을 죽을 곳으로 보내는구려, 남한산성에서부터 나를 따라와 고생한 충신을 이제는 이역만리 원수의 나라에서 피눈물을 뿌리는 참형을 당하게 하다니, 경은 나를 원망하시오. 나의 괴로운 마음을 어찌 해야 하리오. 그대의 노모와 어린 자식이 고국에 있다고 하니 훗날 본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그대의 충절을 기려 보살펴 줄 것을 약속하리다.”

소현세자가 정뇌경의 두 손을 부여잡고 탄식처럼 말을 뱉었다. 세자의 충혈 된 두 눈에서도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머나 먼 타국까지 세자를 보필하면서 가르치던 스승 정뇌경은 차디찬 칼날아래 스러지는 참수형이던지 단두대에 목을 매는 교수형에 처해지는 가장 가혹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세자는 솟구치는 절망과 분노와 이별의 아픔으로 가슴이 메어졌다. 차라리 힘없는 자신을 원망하고 떠나면 이리도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곁에 부복하고 섰던 신하들과 관원들이 숨소릴 죽여 가며 흐느껴 울었다. 그 광경을 차디차게 바라보던 정명수가

그대는 어서 왕명을 받들어 형장으로 나가야 할 걸세!”

하는 쌀쌀한 말을 꺼내지만 않았더라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옷깃을 적셨을 세자였다.

저하, 이렇게 까지 생각해 주시니 신은 죽어도 죽는 몸이 아니옵니다. 부디 옥체보전하시고 만수무강 하시옵소서,”

정뇌경은 청나라 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자에게 절을 올리고 머나먼 고국의 대궐을 향해 네 번 어머니가 계신 고향 쪽으로 고개를 돌려 두 번 절하고 의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정뇌경은 소현세자를 모시고 와 심양에서 일 년을 보낸 서른두 살의 스승이자 신하였다. 장원급제로 벼슬길에 오른 신분처럼 학문의 깊이와 생에 대한 통찰이 세자를 올바른 군주로 만들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유능한 신하였다. 그런 정뇌경이 담담히 사형장으로 걸어갔다.

소현세자는 정뇌경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온 힘없는 조선의 왕자였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하고 어두운 세자관으로 들어갔다. 스승이 죽음의 현장으로 끌려가야하는 현실이, 힘없는 나라의 왕자로 끌려온 자신이 괴로워 며칠을 뜬눈으로 보낸 세자다. 하늘이 노래지면서 그는 침상에 쓰러졌다.

 

정명수가 역관의 신분을 이용해 조국인 조선을 자신의 재물과 권력을 위한 도구로 삼아 청나라로 보내는 공물을 수 없이 착복한 것이 탄로 났다. 조선 조정의 원흉인 역적 정명수의 횡포와 비리를 보다 못한 정뇌경은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믿었던 관료의 배신으로 그 일이 탄로가 나자 모든 정명수를 제거하려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도리어 그가 조종한 청나라 조정은 정뇌경을 강효원, 심천로와 함께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아직 북방의 봄은 추웠다. 넓은 모래벌판이 이어진 사형장에는 오늘의 이 광경을 보려는 청나라 백성들만 오종종하니 모여 있을 뿐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만물은 봄을 알고 새로 싹을 틔우는데 나는 죽는구나, 운명이 박복해 임금은혜 보답도 못하고 올곧은 정의심이 재앙을 불렀으니 바다 밖 천리 땅 내 고향을 혼백이 어이 갈고, 허나 나라를 위한 일에 대장부가 발뺌을 한다면 도리어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는 일, 그토록 나와 우정을 나누던 삼학사 세분의 어진 선현도 이곳 변방에서 떠도는 혼이 아닌가, 내 몸도 곧 그와 같은 길을 가니 죽어서라도 함께 만날 수 있길 하늘에 빌어볼 뿐이네,’ 곧 죽음을 앞둔 정뇌경의 머릿속을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에게 끌려간 윤집 오달제 홍익한의 처참한 죽음이 떠올랐다.

조선에서 세자를 모시고 오던 길에 홍익한이 처형되어 풀 섶에 까마귀밥으로 버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였던 오달제와 윤집의 처형장면을 심양에 도착한 9일 후에 직접 목격하였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이었다. 그들의 시신이 제멋대로 나뒹구는 처참한 광경을 본 그는 놀라고 분한 마음을 진정하고 시신을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정명수의 방해로 끝내 좌절되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주르르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린 북방의 하늘이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듯 바람이 불어 싸늘했다. 그는 조용히 사형대에서 눈을 감았다. 청나라 관원이 정뇌경의 목을 감은 굵은 줄 끈을 잡아당겼다. 둘러섰던 청나라 관원들과 조선관원들이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듯 흐느껴 우는 소리가 모래벌판에서 일었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느니 청나라 조정에 빌기만 했어도 사형은 면할 수 있는 처지였지만 올곧은 선비 정뇌경은 끝내 떳떳한 최후를 마쳤다. 그들은 시신을 수습하고 세자관에서 고인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이역만리 조선에 사랑하는 식구들을 두고 눈을 감은 정뇌경은 평소 친구들에게 운계(雲溪)라는 호로 불렸다. 운계공의 혼령이 제사상 앞에 처참한 심정으로 앉을 때였다. 사방팔방 악마 구리가 끓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먹장구름 속에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귀신들이 나타났다. 갈가리 찢어져 나간 팔다리 눈이 없는 동공,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끔찍한 귀신이었다. 겨우 거적으로 몸을 가린 바짝 마른 몰골이었다. 깜짝 놀란 운계공이 자세히 바라본 귀신들은 일 년 전에 청나라가 죽인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였다. 삼학사는 척화신으로 지목을 받아 포승줄에 묶여 청나라로 끌려온 뒤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학사들이다.

이게 누구신가? 그대들은 삼학사 아닌가? 어찌 이런 참혹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단 말인가?”

운계와 삼학사는 서로 얼싸안고 반가움의 눈물을 흘렸다. 윤집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운계, 어찌하여 자네마저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혼이 되었나? 자네의 억울함을 우리도 알고 있건만 힘이 없어 구해주지 못하고 이렇게 죽어서 만나다니 반가우면서도 하늘이 무심하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렸건만 누구하나 시신을 염습하는 사람이 없어 팔다리는 썩어 문드러졌고 눈도 벌레들이 다 파먹어 장님이 되었다네, 보이지 않으니 고향으로도 못가고 이렇게 원수의 땅인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이 되었다네,”

자네의 제사상 음식이라도 좀 얻어먹으려고 찾아왔다네, 저승으로도 못가고 고향으로 가려고 해도 압록강을 건널 기운이 있어야지 못 먹고 못 입은 우리들은 어딜 가나 문전박대를 당해서 자네마저 외면한다면 우리들은 갈 곳이 없어서 귀신일망정 아사하고 말걸세?”

어허! 가엾고 불쌍한 삼학사 혼령들이 참혹한 몰골을 하고 헤매다니 어서 오시게나, 내 제사음식이라도 배불리들 자시고 갈 길을 찾아보세·····.”

시신을 염습하고 조선으로 가기위한 노제를 지내는 자리였다. 이승을 떠난 육신은 차디찬 몸으로 삼베 수의에 싸여 관에 놓였는데 자나 깨나 명복을 빌던 삼학사의 혼령들이 찾아와 운계공의 혼령과 상봉을 하는 자리가 되었다. 청나라에 죄를 지은 죄인의 제사상이라고 겨우 격식만 갖춘 음식들이 진설됐다.

벗들이여, 어서 이 음식들을 드시게 많이 차리지는 못했는가 보네,”

자네 제사음식이 일 년이 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처음 먹는 음식이네 자네덕분에 우리가 흠향하다니 참 슬프고도 기쁘네,”

운계공과 삼학사가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조금 기운을 차렸으면 벗들이 처형당한 곳으로 가서 떨어져나간 팔다리라도 수습을 해 오도록 하세 그런 몰골로 조국 땅을 밟을 수는 없잖은가?”

고마우이 우리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자네가 우리 시신을 염습해 준다면야 지하에 묻혀서라도 잊지 않을 걸세

삼학사는 운계공을 앞세우고 황량한 벌판을 헤맸다. 윤집과 오달제가 처형당한 모래벌판에서 살이 다 썩고 앙상한 뼈가 드러난 손발이 여기자기 흩어진 것을 겨우 찾아냈다. 눈알은 까마귀밥이 되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닭의 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령들은 서둘러 운계공의 시신 곁으로 돌아왔다.

이제 내 육신이 조선으로 갈 모양이네 자네들은 나와 함께 관 뒤에 바짝 붙어서 고국으로 가세 내가 그대들을 인도할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함께 가세

고맙네, 우리는 원수의 나라에서 저승 가는 길도 막혔는지 받아주질 않더구만, 이제 자네를 만나 고향땅에 가서야 저승으로 가겠네,”

삼학사와 운계공은 관을 실은 말 뒤를 바짝 쫓았다. 넓은 사막을 지나고 드문드문 민가들이 있는 마을도 지났다. 그러나 산사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는 보릿고개였다. 물 한 모금 떠 올리는 상제도 없는 쓸쓸한 귀국길에서 앞 못 보는 혼령들을 끌고 오는 운계공도 쓰러질 듯 힘들 때가 많았다. 돌부리에 차여 넘어지기 일쑤였고 허기진 발걸음을 한 발짝도 떼어놓기 힘들 때가 많았다. 허공에서는 청나라로 끌려와 비명횡사한 수많은 영령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며칠이 지나자 북방과 조선의 경계인 압록강이 보였다. 푸른 강물이 출렁거리며 흐르는 강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난감했다.

이일을 어쩌면 좋은가? 우리 힘으로는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널 수가 없잖소,”

그러게 말이네, 이러다가 애써 찾은 운계까지 저 강물에 수장되는 건 아닌지 안타깝네, 그려

벗들은 나를 믿고 여기까지 왔잖소, 우리의 의리는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걸 벗들이 더 잘 알잖소, 건너갈 방법을 찾아봅시다.”

운계와 삼학사는 절망 속에서도 서로를 위했다. 하늘이 비를 몰고 오는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급기야 세찬 빗발을 쏟아냈다.

아이쿠, 운계, 더는 갈 힘이 없네, 자네까지 구천에서 떠돌게 할 수는 없는 일이네 어서 우리를 놓고 이 강을 건너가세,”

여보게 운계, 자네의 우정으로 여기까지 온 것도 행복한 일이었네, 우리를 놔두고 어서 이 강을 건너가세 비가 더 오면 헤엄치기가 더 힘이 들 걸세, 어서 가세, 운계,”

앞 못 보는 삼학사는 운계만이라도 조국으로 보내려고 했다. 강물이 불어나면 그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돌연 회오리바람과 함께 큰 구름장이 그들 앞에 내려앉았다. 구름 속에는 운계의 백종조부인 북창 할아버지가 앉아계셨다.

운계야, 나를 알겠느냐, 속세에 있을 때 네 큰 할아버지였느니라, 네가 처한 곤경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선계에서 내려왔노라,”

, 북창 할아버지!”

흰 도포를 입고 수염을 날리는 신선은 분명 운계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큰 할아버지였다.

운계야, 너는 죄 없이 죽은 몸이다. 아직 창창한 나이에 나라와 의를 위해 자초한 불행을 어찌 내가 하늘에 있으면서 모른 체 할 수가 있겠느냐, 삼학사와 함께 이 구름위로 오르거라, 내가 이 강을 건너다 주마.”

북창할아버지는 살아계실 때도 도를 닦던 도학자이셨다. 유불선(유교 불교 선계)삼계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분으로 이름이 높았다. 생전에 덕을 많이 베푸신 어른이었다. ‘집안은 물론 근동에서 존경받던 할아버지가 신선이 되셨구나,’ 운계는 절하고 삼학사를 이끌어다 구름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들은 쏜살같이 압록강을 건넜다. 구름이 스르르 걷히자 북창할아버지도 모습을 감췄다. 저 멀리 물살을 헤치며 관을 실은 배가 오는 것이 보였다. 꿈에 그리던 조선 땅이다. 운계의 손을 꼭 잡은 삼학사의 영령은 회한과 감격에 겨워 서로 얼싸 안았다. 비가 그치고 다시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린 관원들 뒤를 그들도 따랐다.

봄이 오는 길, 풀들이 파릇파릇 올라오는 황토 길에는 제비꽃과 민들레가 꽃을 피웠다. 소를 몰고 밭갈이 하는 농부와 어미를 찾는 어린 송아지의 모습도 보였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조선의 초가집들을 지나칠 때마다 순박한 백성들이 나와 목례를 올리거나 연민어린 표정으로 구경들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의주 땅으로 접어들자 의주부윤이 노제 제사상을 차려 올렸다. 의롭게 죽은 운계공의 넋을 찬양하는 제문을 읊자 몇몇 관원들이 통곡하는 울음소리도 들렸다.

나를 위한 제상을 차렸나 보오. 우리가 아직 오 백리를 가야 하는 한양 길이니 많이 흠향합시다.”

운계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것은 조선이 다 아는 사실이네, 객으로 따라붙은 우리까지 호식하네 그려,”

안 먹어도 고국에 오니 힘이 나네, 자네덕분에 구천을 벗어나서 하늘로 오를 날이 멀지 않았네,”

다정한 위로들을 주고받으며 영령들은 제상에 앉아 갖가지 음식들을 냄새로 흠향했다. 사흘 후 평양에서는 평안도절도사 임경업이 노제 제사를 올렸고 황해도에서는 관찰사 오단이 차려 놓은 노제 상을 받았다. 그러나 냉수 한모금도 못 먹는 날들이 더 많았다. 음력 오월의 따가운 햇살아래 한양으로 옮기는 발걸음은 앞 못 보는 삼학사까지 운계의 어깨에 매달려 있어서 괴롭고 힘들며 기진맥진한 지경이었다.

운계 자네에게 우리가 매달려 힘들게 하는구려, 훨훨 바람처럼 구름처럼 집까지 당도했으면 좋으련만 앞을 볼 수도 없고 미안하네,”

우리 모두 조국을 위해 내 던진 목숨 아니오, 이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니 벗들의 고향까지 내가 잘 인도하리다.”

아무리 고국에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리면 뭐하나, 우리 혼백을 모셔간 만장도 없는 헛 제사 아닌가,”

자네의 우정이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그 심양 벌판에서 영원히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 떠돌 걸세 정말 고맙네, 운계

두 달을 넘긴 먼 길을 오면서 배고픔과 고통을 참으며 서로가 위하는 우정이었다. 아득하게 인왕산이 보이고 거대한 임진강 강물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정뇌경이 역적 정명수를 제거하려다 도리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인조임금에게도 청천벽력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죄인처럼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는 세자의 북방 길에 아무도 배종하러 나서는 신하가 없었다. 그때 새파랗게 젊은 신하인 정뇌경이 자원을 했다.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수재로 임금이 아끼는 학사였다.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는 효자며 아들 하나를 둔 가정의 지아비였다.

늙거나 젊거나 한번가면 언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는 원수의 나라가 청나라였다. 누구나 가길 꺼리는 그곳을 임금의 명령이 아닌 스스로 자원한 정뇌경을 잊을 수 없는 임금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한 우두머리 용골대와 마부대등 장수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조선을 이간질 시키는 간교한 역관 정명수의 말만 믿었다. 청나라 신하인 역관을 증거 없이 고소했다는 죄명으로 당장 정뇌경을 참형에 처하려다 인조의 의향을 떠보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정뇌경을 비호하면 죄인과 내통한다는 구실을 붙여 인조임금을 압박할 호재로 삼을 생각이었다.

전갈을 받은 인조임금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으나 별 뾰족한 묘책이 없었다. 정뇌경을 구하려면 청나라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고 그들의 뜻대로 참형에 처 한다면 올바른 충신이 죽음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청나라와 화친을 내세우는 신하들이 우세한 조정에서 끝내 정뇌경은 청나라 법대로 사형에 처해졌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신하의 죽음, 한동안 임금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괴로웠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승지만 대동하고 산책을 나온 구중궁궐 경회루 앞 연못으로 강물이 흘러들었다. ‘거참 이상하구나, 무슨 조화로 연못에 한강물이 흘러드는고?’ 의아한 임금의 귀에 누군가가 아득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임금은 생시인지 꿈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전하! 소인 정뇌경 이옵니다.”

대왕전하, 소신들이 돌아왔사옵니다.”

전하, 불충한 신들의 문안인사를 받으옵소서,”

전하, 전하와 조국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돌아왔나이다.”

애절하고도 비감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연못으로 흘러드는 강물을 타고 아득하게 또는 가까이 안개 속에서 들려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삼학사와 정뇌경의 목소리였다.

아니 그대들은 삼학사와 정뇌경이 아닌가? 어떻게 그대들이 돌아왔나, 어서 가까이 오라!”

인조임금은 손을 뻗어 안개 속을 휘저었다. 그러자 연못의 물이 쫙 갈라지면서 용의 등에 올라탄 네 신하가 임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내려놓은 용이 하늘높이 날아올라가자 신하들의 형체가 드러났다.

전하 그동안, 옥체만강 하셨는지요?”

일제히 부복하며 엎드리는 신하들은 사람의 형체가 아니었다. 정뇌경에게 의지한 채 찢겨진 육신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괴기한 형상을 한 귀신들이었다. ‘으악!’ 가위에 눌려 인조임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 꿈이었구나, 청나라에서 죽은 신하들이 다 보이다니, 요상한 일이다. 이건 필시 정뇌경의 유택을 못 정한 게로구나잠에서 깬 임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에게 생전에 충성을 다하던 신하들이다. 비참하고 외롭게 죽어간 그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임금의 용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나라에 누가 네 학사처럼 죽음으로 나라를 위한 신하들이 있었던가, , , 그대들은 정녕 충신이도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임금은 다음날 정뇌경의 시신을 담은 관이 임진강을 넘었다는 소식을 보고 받았다.

정뇌경은 나라를 위해 역적을 없애려다 화를 당했다.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그를 구해주지 못했다. 원수인 청나라에서도 나라를 생각한 충신의 의로운 죽음을 내 어찌 소홀히 할 수가 있으랴, 광주 땅 능묘로 쓰려고 정한 곳에 정뇌경의 유택을 마련하도록 하라, 그리고 다달이 그의 유족에게 생활에 필요한 양식과 급료를 지급하도록 하라.”

임금은 조정 신하들에게 조의를 다하는 예법을 지켜 모든 장례절차를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또한 자신의 능으로 쓰려고 지관이 정한 새능터를 정뇌경에게 하사하도록 명을 내렸다. 새능터는 성종임금의 태실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고관이나 일반인이나 함부로 묘 자리로 쓸 수 없도록 금지하는 성역이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임금에게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신하가 감히 왕실의 성역보다 높은 곳에 묘를 쓸 수 없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대들은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나라의 녹을 받아도 자진해서 북방길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창 젊은 학사인 정뇌경이 돌보아야 할 모친과 처자식이 있어도 세자를 위해 사지나 다름없는 청나라로 갔다가 나라를 위한 의로운 죽음을 당했다. 굳이 충신의 묘자리를 왕실의 태실보다 낮은 곳에 써야한다면 왕실의 권위는 점점 유아독존으로 오를 것이며 누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는가, 정뇌경의 사후를 나라에서 보상하고 슬퍼해야 할 명분은 넘치고도 남는다.”

임금은 단호하면서 신하들을 달래는 어조로 들끓는 여론을 잠재웠다. 또한 운계공에게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의정부 좌찬성이라는 벼슬을 추증했다. 정뇌경의 충정에 대한 인조임금의 파격적인 성은이 내려진 것이다.

운계공이 묘역을 하사받은 새능은 나무들이 울창하고 산이 깊어 대낮에도 호랑이가 나왔다. 자연히 부근 땅의 기가 세고 귀신들이 많아서 절과 당집들이 번성했다. 음산한 귀기가 감도는 숲속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빈집들만 서너 채 있는 폐허처럼 버려진 마을이었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묘 터에 운계공을 모시고 나서 이 마을은 큰 변화가 생겼다. 하나 둘 집들이 늘어나고 농사를 지으면 잘 된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무당이 굿을 하는 북소리가 끊이지 않던 당집들이 먼저 자취를 감췄다. 굿판마다 크고 높은 벼슬자리에 앉은 운계공의 혼령이 나타나 무당들에게 순박한 시골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굿을 멈추라고 호령을 했다. 굿이 효험이 없다는 소문과 충정공이 마을을 지켜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라에서 하사한 충정공의 사패지는 차츰 사람들이 잘사는 마을로 알려졌다.

 

운계공의 혼에 의지해 조국으로 온 삼학사는 영정이 놓인 남한산성 현절사에 모셔졌다. 청나라는 항복한 조정을 대신해 끝끝내 화친을 반대한 조선의 신하 중 오달제 윤집 홍익한 세 학사를 끌고 가서 참혹하게 죽였다. 청나라의 원혼으로 떠돌던 삼학사와 함께 온 운계공은 현절사에 배향되지 못한 채 새능에 홀로 외롭게 누워있다. 지척이 천리란 말처럼 그토록 정을 나누던 벗들이 오히려 조국에서 따로 제사 밥을 먹는 것이다. 현절사 제향 때마다 삼학사의 혼백은 운계공을 모셔오길 바랬다. 하지만 삼백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이 땅의 역사가들은 하늘로 오른 그들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 학사 모두 죽음으로 나라에 충정을 다한 충신이다.

 

지금 남한산성 현절사에 모셔져 있는 삼학사의 영정 옆에는 누구보다 나라를 위하고 삼학사와 우정을 나눴던 충정공 정뇌경의 영정도 함께 모셔야 한다는 것이 광주 유림들과 뜻있는 지역인사들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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