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14년(1636) 모질게도 추웠던 병자년 겨울, 청나라 군사가 경기도에 이르고 임금의 수레는 어찌할 겨를도 없이 급히 서울을 떠나 강화로 향했다. 그러나 청군은 이미 그 길도 끊어 놓았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으로 외적을 방어할 보루와 장벽이 있는 땅은 남한산성만한 곳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수구문을 경유하여 남한산성으로 서둘러 들어가셔서 그 변고의 추이를 살피소서.”
신하들이 이렇게 권유하였고, 급박한 상황에 다른 방도 없이 인조임금은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왔다. 성 밖의 청군은 산성으로 점점 좁혀 들어오며 성 안의 군신들을 옥죄고 있었다. 청나라 대군들이 성을 둘러싸고 포위하자 바깥과 통할 수 없이 45일 간의 처절한 항전의 날이 시작된 것이었다.
산성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났을까, 그 날은 추위와 함께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비가 그치지 않아 성을 지키는 군졸이 모두 비에 젖게 되자 임금과 세자가 뜰 가운데 나가 서서 입을 모아 하늘에 기원하고 있었다.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 부자가 죄를 얻은 때문이요, 한 성의 군사와 백성이 무슨 죄가 있으리오. 하늘이 재앙을 내리려 한다면 재앙은 우리 부자에게 내리고, 원하옵건데 백성을 살리옵소서.’
신음하듯 하는 말에 따라 눈물이 흘렀고 눈물인지 빗물인지 임금의 옷이 모두 젖었다. 신하가 안으로 들기를 간청했으나 임금은 듣지 않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다행히 밤중에 비가 그치고 이튿날은 친히 음식을 베풀어 군사들을 위로했다.
겨울 해는 짧아 일찍 어두워지던 어느 날 바람이 세차고 큰 눈이 내렸다. 기다리던 지방 수령과 병사들의 지원도 오지 않고 성안의 물품은 얼마 남지 않았다. 땔나무와 풀도 끊겨 소와 말도 다 죽고 살아남은 것은 굶주림이 심해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먹으려 했다. 임금의 침구도 오는 길에 모두 빼앗겨버리고 산양 가죽 이불뿐이었다.
임금은 비와 눈이 오는 몹시 추운 날, 성을 지키는 장수에게 이불을 나누어 주고는 옷을 벗지 않은 채 침소에 들었다. 그리고는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았다. 임금의 수라상은 점점 형편없어지고 그마저도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백성과 군사들을 생각하면 입에 대기 민망하여 임금은 혼잣말만 하며 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왔을 때는 새벽에 뭇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이제는 닭 우는 소리도 끊어져 없구나.’
그 환란 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가는 것. 남한산성에도 정축년(1637년) 새해가 되었다. 광주목사 허휘가 쌀로 떡을 만들어 임금께 올리자 임금은 몇 갈래씩 나누어 백관에게 보냈더니 이들도 눈물을 흘렸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10여 년간을 청과 형제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청은 또다시 12만 대군을 몰고 와 이제는 임금과 신하라는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국난의 위기에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신하로서의 불충을 깊이 깨닫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조임금은 자신의 우매함으로 이런 망극한 변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백성이 겪어야하는 고통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 14년 영욕의 세월을 덧없어했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무서운 굉음이 들려왔다.
“쾅!, 우르르 쾅쾅!······.”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에 임금은 놀라 신하를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소신 대령하였사옵니다.”
수어사 이서가 들어와 부복을 하였다.
“아니ㅡ, 저게 무슨 소리요?”
창백한 얼굴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인조임금이 이서에게 물었다.
“잠깐 고정하고 계시옵소서. 소신이 곧 알아보고 오겠사옵니다.”
임금은 급히 말하고 나가는 이서를 붙잡고 지팡이를 더듬어 찾았다.
“이 수사! 과인의 옆에서 떠나지 마오. 무슨 변이 일어나더라도 과인과 백성을 지켜주시오. 그대는 목숨을 내놓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광해군을 폐위하고 나를 옹립한 공신으로 평생 내 측근에서 국사에 참여하여 왔지 않았소.”
“고정하옵소서 상감마마, 소신은 마마에게 생명을 바친 몸이옵니다. 잠시 나가서 동정을 살펴보겠사옵니다.”
“과인도 같이 나가 보겠소.”
“아니 되옵니다. 발의 상처가 도지실까 염려되옵니다. 가만히 계시옵소서.”
수척한 왕을 부축하여 자리에 모신 뒤 이서는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냐?”
지나가던 군졸이 대답을 했다.
“호병이 화약을 터뜨려서 성벽을 부수었다 합니다.”
“무엇이! 어느 쪽인가?"
크게 놀란 이서가 한달음에 성벽이 무너진 곳으로 성급히 가보니 화약연기가 아직도 하늘로 올라가고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겁먹은 사람들이 어디로들 숨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군졸들은 눈비에 젖어 꽁꽁 언 손이 오그라져 창도 제대로 쥐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다.
“여봐라! 군사들은 어서 나와 내 말을 따르도록 하여라. 숨은 놈은 한 칼에 쳐 없앨 것이다.”
이서는 서슬이 시퍼런 칼을 빼들고 약해지는 군졸에게 호령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몸을 숨기고 있던 군사들이 슬금슬금 나타나기 시작했다.
“빨리 가서 가마니 백장을 구하고, 그 가마니에 모래를 담아 오너라.”
이삼백 명의 군졸이 모이자 이서는 한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나는 상감마마를 뵈옵고 올테니 그동안 모래가마니를 쌓아서 허물어진 성벽을 막아 놓아라. 만일 지체하거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큰 벌을 내리리라!”
그리고는 임금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대체 어찌된 일이오? 이 수사!”
“오랑캐 놈들이 성벽을 허물어 놓았사옵니다. 그래서 성벽을 막도록 이르고 있사오니 걱정 마옵소서.”
그 말에 적이 안심이 된 듯 임금은 비스듬히 누웠다. 이곳으로 피신하면서 한밤중에 어두운 길을 더듬던 말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다친 발이 겨울철이라 쉽게 낫지 않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프곤 해서 똑바로 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몸의 상처보다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백성을 보살피지 못하는 고뇌가 더 큰 임금은 이서장군에 대한 신임이 누구보다 두터웠다.
“남한산성이 백제 때 도읍하여 적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만큼 명승의 땅이므로 이곳에 성을 쌓아 서울의 방어벽으로 삼아야합니다.”
하는 주장을 받아들여 이서에게 남한산성의 축성을 총 관리·감독하게 하였다. 산성을 쌓을 때, 2년5개월의 짧은 시간에 끝마치느라 피로가 겹쳐 몸이 파리해지고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었던 이서의 모습이 임금의 기억에 되살아났다. 마침내 이런 국난을 이곳에서 막아야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의 충성심을 마음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이런 임금의 심중을 잘 아는 이서는 편전에서 말없이 물러나와 다시 성벽을 쌓고 있는 현장으로 나갔다. 많은 군사들이 땀을 흘리며 모래 가마니를 메고 와 성벽을 쌓고 있었다. 살을 에는 추운 날씨에도 군사들의 노력으로 무너진 성벽을 얼마만큼은 복구할 수 있었다.
혹한의 겨울에도 잠시 따뜻한 볕이 들던 어느 날 예조판서 김상헌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마마, 사람이 궁하면 근본으로 돌아간다 하옵니다. 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셨으니 마땅히 승은전에 제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또 성 안에는 온조왕의 사당이 있습니다. 온조왕이 태자가 된 배다른 형의 화를 피해 남하하여 도읍한 곳이 하남 위례성입니다. 또한 전하께서도 적을 피해 이 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온조왕의 영혼이 전하를 지켜주실 것이옵니다.”
임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하도록 명하였다.
온조왕의 사당에 제를 지내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이즈음 인조임금은 날마다 꿈에서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 날도, 도성을 나올 때 짐 보따리를 메고 어가를 따르던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귓전에 맴돌아 도망치듯 더욱더 깊은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꿈속에서까지 굶주리는 백성과 불안에 떠는 군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이상하게도 이날 꿈에서만큼은 예전의 평온을 되찾은 고요한 산성의 숲을 평화롭게 거닐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앞을 가로막는 근엄한 표정의 군왕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다. 나를 위해 제단을 세워주어 참으로 기쁘고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허나 나만이 이 제단에 있는 것이 좀 적적하니 부탁 하건데 그대의 신하 중 하나를 나에게 보내줄 수 없겠는가?”
인조는 황망히 엎드려서 물었다.
“그것은 쉬운 일입니다. 어느 신하를 드리오리까?”
“내가 골라서 데리고 갈 것이니 내일 아침이 되면 알 것이다.”
잠이 깬 임금은 꿈이 하도 이상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도승지가 황급히 들어와 임금에게 아뢰었다.
“상감마마, 망극하옵니다만 어젯밤에 갑자기 이서 장군이······.”
“아니, 그래 이서의 병이 위중하더냐?”
도승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이서장군이 별세하였다고 하옵니다.”
임금은 너무도 기가 막혀 곧이듣지를 않으셨다.
“무엇이? 누가 죽어?”
“수어사 이서 장군이 숨졌다고 하옵니다.”
“그 말이 사실이냐? 이수사가 죽다니, 어허 하늘도 무심하지······.”
“엊그제까지만 해도 병중에 북쪽 성을 지키던 그를 불러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을 염려하였더니
‘나라의 위난이 이와 같은데 어찌 몸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
하며 아무런 병도 없는 사람같이 말했지 않은가?“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고 계속해서 병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많은 적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런 장군을 회상하니 쉬도록 하지 못한 자신의 탓으로 이런 일이 생긴 듯 해 임금은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그러면 어젯밤 꿈에서 온조대왕이 데려간다던 신하가 바로 이서 장군이란 말이었구나.’
자신과 나라를 위한 충신이었으며 산성축성에도 공이 컸던 큰 신하를 잃은 인조임금의 슬픔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임금이 산성으로 피난 왔을 때 창고에는 쌀과 피잡곡을 합하여 겨우 1만 6천석이 있었으나, 군병 1만 명의 한 달 먹을 양식은 되었다. 이서는 수어사로서 철두철미한 계획과 관리로 군량을 많이 쌓아 두었고, 소금과 간장· 종이· 면화· 병장기 및 기타 쓰일 만한 여러 가지 물품 또한 모두 창고에 잘 마련해 두었다.
국난을 당해 이렇게 갑자기 산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조그만 물품을 미리 챙겨둔 이서의 덕택이었던 것이다. 임금과 군사들은 이서가 국가의 신하로 평소 산성의 관리 감독을 철저히 잘 해 그나마 이렇게 견디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는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깊은 탄식과 통곡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서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병자년 겨울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한 장수와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싸울 힘이 없었고, 조정안에서는 최명길 등 주화파와 김상헌 등 척화파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었다. 남한산성은 완전 고립된 상황에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며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져 거의 모두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있었다.
결국 인조임금은 결사항전의 뜻을 굽히고 산성을 나오게 되고 정축년(1637년) 1월 30일 45일간의 대항전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의 예는 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행해졌다. 남한산성의 천연의 험준함은 적군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이라는 천연 요새에서 1만의 우리 군대는 목숨 바쳐 성을 지켜냈고, 12만 대군의 침략을 막아냈던 것이다. 이는 산성을 지키려는 용사들의 굳은 의지와 함께 온조대왕의 은근한 보살핌 때문은 아니었을까.
전쟁이 끝나고 1638년 인조임금은 원래 온왕묘(溫王廟)이던 곳에 온조왕의 위패를 모셔 ‘온조왕사(溫祖王祠)’를 건립하게 하였다. 이후 정조임금은, 병자호란에서처럼 일시적으로 나라가 유린당하는 치욕을 당했지만 그 정신만은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이러한 조선시대의 뿌리를 백제에서 찾고자하였다. 그 뿌리인 온조대왕을 모신 이 곳에 1795년(정조19년) 사액(賜額)을 하사하여 ‘숭렬전(崇烈殿)’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해마다 국사로 제사를 지내던 것을 현재는 매년 음력 9월5일에 숭렬전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인조는 또 남한산성 축성의 총 책임자였던 이서장군을 함께 배향하도록 하였는데 병자호란 당시 그 꿈 때문이라고 전해온다. 이서(李曙)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감하여 무장이 되었고 글 읽기도 좋아해 때로 시에 회포를 담아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평소 독서를 즐겨서 소장한 장서가 매우 많았고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남한산성 축성 후에도 산성 안의 시설·병기·군량미 등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다가 끝내 전란 중에 병사하였다.
이서장군의 배향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희생되었던 힘없는 백성들과 전쟁에서 산성을 지키다 숨진 무명용사의 넋을 대신하는 일일 것이다. 산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했을 영혼. 그렇게 산성을 떠돌던 영혼은 숭렬전의 온조대왕과 함께 남한산성을 지키며 지금까지 오래도록 살아있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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